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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특집-청소년 시선의 흐름/이장근/소년시의 필요성과 내가 쓰는 청소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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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특집-청소년 시선의 흐름/이장근/소년시의 필요성과 내가 쓰는 청소년시
소년시의 필요성과 내가 쓰는 청소년시
이장근
저는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칩니다. 올해는 1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1학년은 눈빛부터 다릅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있나? 저기에는 무엇이 있나?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저건 어떻게 해야 하나?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귀엽다가도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합니다. 바뀐 환경이 얼마나 낯설까요? 또 적응하려고 얼마나 애를 쓸까요? 혹시 고민이 있는데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는 건 아닐까? 저 역시 눈동자를 굴리게 됩니다. 그러다 눈에 그늘이 있거나 어제보다 어깨가 처진 아이를 발견하면 이야기할 기회를 엿봅니다.
요즘에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게 예전보다 매우 편해졌습니다. 바로 청소년시 때문입니다. 저는 청소년시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교사 중 한 사람입니다. 제 교직 생활은 청소년시가 있었을 때와 없었을 때로 나뉜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저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조회에 들어가서 오늘 시를 쓸 아이에게 손바닥만 한 노트를 주며 종례 때까지 한 편 써보라고 합니다. 노트 첫 페이지에는 제가 쓴 시가 있고, 차례로 친구들이 쓴 시가 있습니다. 오늘 시를 쓸 아이는 앞에 쓴 시를 읽으며 온종일 무엇을 쓸까에 대해 고민합니다. 친구들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지난 일들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종례 때 수줍게 수첩을 내미는 아이도 있지만, 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걸어가는 저를 쫓아와 짠! 선물 주듯이 수첩을 내미는 아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시를 썼다는 그 자체가 자랑거리여서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반짝이는 시를 만날 때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게 됩니다. 그럼, 아이들이 저도 보겠다며 손을 뻗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또 다른 아이에게는 청소년시집 한 권에 포스트잇 한 장을 붙여서 줍니다. 시집을 다 읽고 제일 마음에 드는 시에 포스트잇을 붙여오라고 합니다. 아이가 다 읽었다며 시집을 들고 오면 포스트잇이 붙은 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많은 시 중에 왜 이 시를 골랐는지? 시의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기억에 남는 시가 또 있는지? 시의 소재와 관련된 경험은 없는지? 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로 발전합니다. 그러다가 목을 가다듬고 직접 낭송을 해주기도 하고 아이에게 낭송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이런 대화를 나눈 후 복도에서 아이를 만나면 눈빛이 예전과 달라 보입니다. 서로에게 한발 다가선 느낌이 듭니다.
오늘도 우리 반에 시 쓰는 아이 한 명과 시집 읽는 아이 한 명이 있다는 생각이 저의 발걸음을 교실로 향하게 합니다. 아이들도 이런 일이 처음에는 낯설었다가 점점 익숙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시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가 선생님을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1년 후에 헤어질 아이들이지만, 인생에서 1년 동안 시를 읽고 쓴 일이 좋은 추억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시를 권하진 못했습니다. 제가 쓰는 시가 중학생이 읽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쓴 시를 보여주면 ‘시는 어려운 거구나!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하는 눈빛이 느껴졌습니다. 그 눈빛에 대고 너도 한 번 써보라고 권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2010년 박성우 시인의 『난 빨강』이 출간되면서부터 아이들에게 시집을 들고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시집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더 없냐는 눈빛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며 저도 청소년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은 종이컵으로 두 컵 반
라면은 반으로 한 번만 쪼개고
스프를 먼저 넣고 끓인다
계란은 불 끄기 30초 전에 넣고
젓가락으로 딱 세 번만 젓는다
고추장을 반 숟가락 넣으면
국물 맛이 끝내준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본 결과
내가 터득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맛있는 건
친구들과 함께 끓이는 것
밤늦도록 집에 혼자 있는 나에겐
친구들이 스프고 계란이고 고추장이다
―『악어에게 물린 날』 중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 전문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권하는 시집은 『악어에게 물린 날』입니다. 그 중에서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이라는 시를 아이들은 재미있어합니다. 중학생이라면 한 번쯤 끓여봤을 법한 라면, 지겹도록 끓였다는 아이가 있다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밤늦도록 집에 혼자 있는 날이 많았을 테니까요. 친근한 소재를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쓰자는 게 이 시집을 쓸 때 다짐이었습니다. 비유나 운율보다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시도 읽을 만하네. 이거 완전 우리 얘기잖아.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 와 같은 마음이 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서에 관심이 없던 아이도 앉은 자리에서 한 권 뚝딱 비우곤 합니다. 시를 어떻게 쓰냐고 묻던 아이도 이 시집을 읽은 후 뚝딱 자기 이야기를 시로 쓰곤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청소년시를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팔랑팔랑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
사각사각
미용실 누나 손에 들린 은빛 가위
붙었다 떨어졌다
내 머리 주위를 날아다닌다
폴폴 날리는 꽃가루
살랑살랑 나는 은빛 나비
나는
지금
꽃이다
―『나는 지금 꽃이다』 중 「나는 지금 꽃이다」 전문
청소년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저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때도 많습니다. 그땐 그랬는데 요즘엔 이렇구나! 아쉬울 때도 있고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가지는 속성은 비슷합니다. 몸이 근질근질하고 마음이 간질간질한 시기, 껍질을 벗고 나가고 싶은 시기, 밤하늘에 팡 터져서 공중분해 되고 싶은 시기, 꽃 같은 시기, 폭죽 같은 시기. 저는 이 시기가 시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를 시라는 친구와 함께 걷는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요? 그런 의미에서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청소년 시집 소식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2010년 이후, 그러니까 10년 동안 나온 청소년시집이 한 손에 들고 가기에는 무거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시집들을 한 곳에 모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 도서관에 청소년시집 코너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사서 선생님께 말했더니 좋은 의견이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꽂이가 있는 곳에 그동안 출간된 청소년 시집들을 모두 꽂았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습니다. 청소년시집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을 사서 선생님께 물어보니, 시집을 읽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친구의 소개로 읽는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유행가나 게임도 아니고, 친구에게 시집을 소개하다니요!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오늘은 그간 아이들이 쓴 시를 휴대폰으로 찍어 부모님들께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아이들의 꽃 같은 시절과 그 시절에 핀 꽃 한 송이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쓴 시를 읽은 부모님 중에는 청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쓴 시를 통해 아이가 훌쩍 큰 것을 느꼈다는 부모님도 있었고, 아이의 고민을 응원한다는 부모님도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은 집에서 평소와는 다른 대화를 할지도 모릅니다. 잔소리를 물리친 시가승리의 브이를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초보 운전이라 붙여 놓으면
다른 차들이 끼어들까 봐
빵빵대고 창문 내리며 욕할까 봐
아기가 타고 있어요
두 시간째 거침없이 직진 중
당황하면 후진합니다
저도 제가 무서워요
내는 글렀다, 니 먼저 가라!
헉! 뒤에 또 붙으셨어요?
답답하시죠? 전 환장합니다!
돌려서 표현하면 양보해 줄까 봐
인생 초보 우리는
교복 줄이고 화장하고 눈에 힘주고 험한 말하고
우르르 몰려다닌다
―『파울볼은 없다』 중 「초보 운전」 전문
아이의 지독한 사춘기 때문에 부모님과의 상담이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중간이 힘들다’는 말이 있듯이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의 중간인 중학생은 흔들리다 못해 비틀거릴 정도입니다. 때론 아기처럼 약한 척도 하고, 때론 듬직하게 무엇인가에 몰입하기도 하고, 때론 잘 하던 것을 때려치우기도 하고, 때론 보는 사람 속 터지는 줄도 모르고 세월아 네월아 방에서 뒹굴기도 하고, 때론 한발 다가갔을 뿐인데 두 발 물러서기도 하고, 때론 부모님보다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초보라는 게 들키면 자존심 상하니까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이 반가운 일이기도 합니다. 자존심을 챙긴다는 건 자아가 생겼다는 것이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부모님과 주고받을 때마다 절실하게 다가오는 사실이 있습니다. 부모님도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년도 중간이니까요.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모님께 청소년 시를 권하기도 합니다. 청소년시는 청소년만 읽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읽는 것이니까요.
5월이 오면 어버이날 선물로 아이들이 쓴 시와 제가 쓴 청소년시를 부모님께 보내드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슨 시가 좋을까요? 고를 수 있는 시가 지금보다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열심히 써야겠습니다.
기억나세요?
잡고 있겠다고 해 놓고 손을 놓아 버린 일
그날 저는 두발자전거 타는 것에 성공했죠
그날처럼 요즘도 손을 놓아주세요
비틀비틀 넘어질까 걱정이 되겠지만
그날처럼 믿음을 갖고 조금씩 멀어지는 저를
뒤에서 오래 바라봐 주세요
기억나세요?
그날 제가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바라본 사람은
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파울볼은 없다』 중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전문
이장근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0년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 동시 당선.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 『칠판 볶음밥』, 청소년 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나는 지금 꽃이다』, 『파울볼은 없다』. 시집 『꿘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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