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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특집-청소년 시선의 흐름/박강/‘청소년시’- 청소년을 리프리젠테이션(표상/재현/상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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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특집-청소년 시선의 흐름/박강/‘청소년시’- 청소년을 리프리젠테이션(표상/재현/상연)하라
‘청소년시
’- 청소년을 리프리젠테이션(표상/재현/상연)하라
박강
하지만, 지금은
다만 내 잎사귀를 스치고 가는
저 바람 소리를 들어 보렴
너는 지금 바람을 만나고 있구나
바람의 춤을 따라 흔들리고 있구나
지금이 바로 너구나
―손택수의 「나무의 꿈」 중에서
1. 질문하는 텍스트
‘청소년시’는 처음에 ‘동시’가 그랬듯 인정투쟁 중이다. 인정투쟁 중인 청소년시는 특별히 그것을 ‘가지고서 생각해볼 만한 가치 thinking with’가 있는 텍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전형적인 텍스트 속의 맹목성과 한계를 견인하고, 그 자신이 질문과 해석이 되어야 한다. 또한 청소년시는 청소년소설과 마찬 가지로 “문학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기준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독자에게 답해야 할 것이다.
새로이 청소년시를 쓰는 시인‘군’의 등장은 기왕의 ‘시인’이라는 관념을 변모시키고 스스로 그 변화와 맺는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시는 소설에 문학의 자리를 내주고 변방이 된 지 오래다. 변방의 시를 쓰던 이들이 지금 변방의 변방 청소년시를 개척하고 있다. 왜 이들은 변방의 변방을 지키는 변방지기가 되겠다고 하는 것일까? 발표된 청소년시에 대한 기성문단의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이보다 앞선 지적은 ‘청소년시가 필요한가’라는 의문이다. ‘청소년소설’처럼 ‘청소년시’라는 명칭 역시 독자를 의식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창작 미학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속성”이 청소년시에도 내재해 있을 것이다. 문단에 던져진 청소년시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 앞서 ‘창작 미학 운운하는’ 자체에 대한 질문과 재해석을 제기하는 힘이 청소년시에 있는지 지켜보며 진지하게 평해야 할 것이다. 이글을 통해 청소년시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자 시가 무엇이기를 바라는지 고백하는 중층적 텍스트가 될 수 있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2006년 페미니즘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는 ‘대한민국에 청소년은 없다’고 선언했다.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 청소년으로 사는 혹은 청소년기를 경험하는 ‘진짜’ 청소년은 없다는 것이 무크지의 화두였다. 선언 후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의 처지는 여전하다. 청소년은 좋은 대학에 가서 기성사회가 정해 놓은 질서에 안정적으로 진입하는 것만을 강요당하고 있다. 10년 전보다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고 청소년의 주체적 삶에 대한 담론은 많이 부족하다. 사회에 나가 경제적으로 유리한 자리를 점유시키기 위해 강요된 청소년의 삶에 균열을 내고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청소년 독자와 공감하며 새로운 눈으로 청소년의 모습을 포착하는 일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청소년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먼저 창비교육 청소년 시선에 발표 된 김성장의 「물어뜯는」을 읽어 보자.
아이가 손톱을 물어뜯는다 먹이를 찾았다는 듯 완강하게 손톱을 이빨 안쪽으로 밀어 넣어 조금씩 조금씩 손톱을 없애 가는 것이다. 입 둘레의 근육을 불러 모으고 혀에 물결을 얹어 촉촉하게 불려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톱의 변방을 긁어 나간다. 한때는 발톱이었을 손톱, 초원을 떠돌며 껍질을 까고 적을 할퀴느라 안쪽으로 피가 흘렀을 손의 손톱, 한때는 털 사이의 이를 잡느라 피가 흘렀을 톱의 손, 잡아 보면 아이의 체온이 너무 부드럽다는 게 아련한데 눈보라가 손가락을 빠져나와 목을 할퀸 상처가 그의 이빨에 몰려와 저 질긴 톱질을 하는 걸까 그렇게 물어뜯으면 손톱 밑에 쌓인 통증까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쉬지 않고, 차라리 쉬지 않고 자라는 손톱이 고마운 날들
맹렬하던 아이의 눈이 잠시 선해지는 걸 보니 마지막 자투리가 떨어져 나온 모양이다
어!
톱이 더 깊은 곳으로 사라진 걸까 다시 시작되는 칼질
입술에 힘줄이 몰려든다
손톱을 몸속 어느 방에 밀어 넣은 걸까 방에 누가 자라고 있는 걸까
다섯 손가락 손톱에 초승달만 남은 아이도 있다
손톱을 물어뜯지 않고 버티는 이빨들이 있다
―「물어뜯는」
「물어뜯는」은 청소년의 내향적 목소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교실의 구석에 앉은 ‘아이’는 깊이 모를 생각에 빠져 손톱을 물어뜯는다. 아이의 의식은 어디 쯤 있는 걸까. 반복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태초에 손톱은 “발톱”이었고 대지를 달라며 피를 뿌리고 먹이를 향해 달려들던 “톱의 손”이었다. 아이는 길들여졌지만 아직도 “눈보라가 손가락을 빠져나와 목을 할퀸 상처”의 기억이 남아 “질긴 톱질을 하는 걸까” 아이는 “손톱 밑에 쌓인 통증”을 모아 “몸속 어느 방에 밀어 넣은 걸까 방에 누가 자라고 있는 걸까” 아이의 동작이 영상처럼 흐른다. 청소년기는 자신의 욕망을 탐색하는 시간이다. 사물처럼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며 자기 미래를 상상하고 고민하는 시기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주장하며 원하는 것을 경험하고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스스로 구성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어떠한가? 「물어뜯는」은 학교라는 공간에 갇혀 스스로 주체되기를 포기해버린 청소년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다.
국어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열 가지를 쓰라고 했다.
그 열 가지와 함께 배를 타는데
큰 파도를 만나 난파 직전에 있어서
한 가지씩 바다에 버려야만 한다고 했다.
컴퓨터 자전거 일기장 이것저것 버리고
일곱 번째로 아빠를 버렸다.
하나 더 버리라고 해서
나는 여친 명숙이를 버렸다.
그런데 또 하나를 더 버리라 해서
엄마를 버렸다.
마지막 가장 소중한 것으로 스마트폰을 남겼는데
다들 그 이유를 말하는 게 말하기 수행 평가다.
나는 가족들과 연락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는데
다들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 선생님도 웃었다.
엄마도 아빠도 여친도 다 버린 놈이 누구랑 소통하냐고
카톡이랑 게임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란다.
맞는 말이지만 속상하고 부끄러웠다.
또 한다면
소중한 것 가운데 선생님도 넣었다가
가장 먼저 바다에 던져 버릴 것이다.
―「난파선 위에서」
복효근의「난파선」화자는 청소년이고 수행 평가 과제를 하면서 일어난 일을 일기처럼 쓰고 있는데, 그 고백체의 글이 시가 됐다. 과제도 과제에 따른 화자의 생각과 행위도 일상의 청소년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입말의 언어도 청소년의 것이다.「난파선」은 청소년의 목소리를 빌려 쓴 성인작가의 시이고 청소년은 시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난파선」은 폭력적이다. 선생은 학생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묻는다. 시가 폭력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난파선 위에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버려야한다는 설정이 폭력적이다. 버림(선택)이라는 것은 덜어냄을 통해 덜어낼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의 의미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경쟁을 강요당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난파선 위에서 청소년은 폭력적인 질문을 받는다.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화자는 말할 수 없는 걸 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소통’의 도구로 남기겠다고 한다. 하지만 화자의 이야기를 들은 청자는 화자를 비웃는다. ‘하나’를 선택하라는 지시는 처음부터 폭력적이었고, 화자는 자신에게 절실한 소통을 위해 소통의 대상인 아빠와 엄마, 여친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화자는 결국 자신에게 폭력적인 선택을 강요한 선생님을 ‘가장 먼저 바다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는 고백으로 맞서고 시는 끝난다. 대한민국은 청소년을 난파선에 위에 세우고 ‘하나만’ 선택하라 강요한다. 하나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살 수 있다는 통제는 인간을 사물화 시킨다. 두 편의 시는 대한민국 청소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자기의 욕망을 가두고 기성세대의 결정을 따름으로 판단을 유보하는 소년은 자신이 ‘난파선’ 위에 서있다는 인식을 통해 질문한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시작한 청소년에게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난파선과 강요된 선택에 대해 뭐라 변명할 것인가? 청소년기는 미래를 위한 ‘과도한’ 준비기라고만 반복할 것인가?
2. 우리는 ‘청소년’이다.
‘리프리젠테이션’은 철학에서는 주로 ‘표상’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미학에서는 주로 ‘재현’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정치학에서는 ‘대의’ 또는 ‘대표’라고 불리는 영어표현에 해당한다. 더하자면 연극의 용어법으로는 ‘상연’이라는 의미도 있다. 포스트 담론의 주요한 이론적 기여를 감안한다면 재현에 대한 통상적 생각과 달리 ‘재현 과정’과 독립해서 이미 성립해 있는 사물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재현 과정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을 구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장근의 청소년 시집 『파울볼은 없다』의 서시「문제아」는 청소년을 어떻게 리프리젠테이션 하고 있는가?
나의 문제는
문제의 문제에 의한
문제를 위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나라에
태어난 것이다.
문제가 문제를 낳고 문제가 문제를 낳고 문제가 문제를 낳는 책을
성경책처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없어진다면
나도 문제없다.
―「문제아」
청소년은 자신이 태어나 살고 있는 국가를 향해 ‘문제’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화자는 자신을 ‘문제아’라 명명한 기성사회와 기성세대에 비판적 시선을 견지한다. 자신을 ‘문제아’로 만든 것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가 아니라 문제투성이 국가이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문제적 상황이 없어지면 “나도 문제없다” 선언한다. 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나라에 태어”났다. 그래서 화자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는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 실현”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문제아로 호명된 자신을 스스로 문제없음의 존재로 전환시킨다. 전체의 가치를 허물고 ‘공허한 자유 속에서 아무’에 불과한 자신의 생각을 “잘못 된 것”이 아니라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외친다. 이런 외침이 ‘정치’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를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를 ‘중2’라고 한다. ‘중2병’이라는 말은 중2와 그 밖의 사람들을 양분하고 중2병의 청소년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된다. 우리가 모두 숨 죽인채로 자신의 병듦을 자신만의 비밀로 살 때, 중2는 자신들이 병들었다고 말하는 기성세대에게 스스로 병듦을 드러낸다. 병을 인정받으려 한다. 병듦을 드러내는 일은 치유에 가장 가까운 행위다. 병의 증상을 드러내는 일은 치유의 시작이며 병의 원인을 찾는 실마리가 된다. 중2병(중2의 저항)이라는 규정은 청소년을 정신병동에 가두고 ‘예속적 주체로 만들기 위한 기성세대의 포석’은 아닐까? ‘치유’(중2병을 치유할 것인가, 중2병의 재생산을 강요하는 세상을 치유할 것인가)를 위해 중2병 청소년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인생 초보 우리는/교복 줄이고 화장하고 눈에 힘주고 험한 말 하고/우르르 몰려다닌다” “돌려서 표현하면 양보해 줄까” 기대하며 스스로 걷기 위해 좀 더디게 갈 뿐이라고 ,자신들은 “초보운전” 중이라 고백한다. 중2병이라 불리는 자신들은 실은 이해 받지 못하고 욕먹는 것이 두려워 아직 혼자서는 감당되지 않아 그러는 거라고 청소년 화자는 기성세대에게 슬쩍 귀띔한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청소년이 정말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의 병이 깊어 청소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청소년을 ‘다른 존재’로 배제한다. 청소년의 고백은 기성세대도 병들었음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기성세대는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 하는 걸까? 병의 원인을 알아야 병을 치유할 수 있고 치유를 위해서는 병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며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호소하는 통증을 잘 살펴보는 것이 기본이다. 왜 청소년은 중2병을 호소하는 것일까?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청소년은 무엇을 욕망할까? 가슴 속 다른 아우성을 들어보자.
형은 밤낮없이 공부해서
일류대에 간단다.
나는 밤낮없이 알바해서
내 가게를 차릴 거다.
부모님은 나만 보면 혀를 차지만
나는 혀 차는 소리를
박수 소리로 듣기로 했다.
내가 쓰는 야구장이
더 넓을 뿐이라고
―「파울볼은 없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예속적 주체로 ‘호명’ 한다. 자본주의는 청소년에게 자본화된 ‘같은 꿈’만을 강요하고 자본주의의 승자가 되기만을 꿈꾸라 한다. 모두에게 같은 꿈을 강요하는 공간에서 탈출한「파울볼은 없다」의 화자는 편향적인 기성세대의 시선에도 여유롭게 자기 길로 간다. 이미 빨간 욕망만 남은 그러나 자신이 너무 진한 빨강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 초록의 풋풋함으로 자기 세상을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에게 자기 결정권은 없다. 자기 결정권은 제대로 된 교육 환경 속에서 청소년이 강요와 억압, 생존의 불안에 시달리지 않으며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기회를 가질 때 생긴다. 기성세대는 청소년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가 인정하는 대학에 들어가야만 자기 결정권의 일부를 준다. 기성세대는 청소년기를 준비기라 하지만 많은 청소년은 자신이 ‘잉여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누구도 청소년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누구도 청소년의 삶에 학업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못하는 청소년은 무가치하며 부끄러운 잉여일 뿐이다. 청소년이 무사히(?) 학업으로만 평가되는 시기를 통과한다 해도 도래할 현실은 만만치 않다. 청소년은 서열화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또 한 번 줄서는 자본의 상품이 된다. 언제든 처분되고 폐기될 수 있는 불안한 상품으로 살거나, 상품이 되지 못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박탈당하기도 한다.
2000년대에 들어 청소년문학(청소년 소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성과를 보이며 정체성을 확장하고 있다. 인정투쟁에 성공한 청소년문학은 시간의 무게 속에 정체성을 다져가고 있다. 청소년문학이 자기정체를 묻는 과정은 청소년이 정체성을 찾는 여정과 함께 한다. 청소년이 정체성을 찾는 여정은 스스로를 주체화 하는 과정이다. 주체화 과정은 정체성을 만들고 ‘정체停滯’된 것들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청소년문학은 부단히 정체를 벗어나 주체화 되어야 한다.
청소년시는 놀이 없는 현실에서 심미적 경험을 통해 상상으로 놀이를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의 삶을 구속하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지 않은 채, 모든 질곡을 청소년에게 돌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편으로는 억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를 훈육하는 일은 청소년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하고 있다. ‘촛불혁명’ 기간 청소년의 자발적이고 활기찬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혁명동안 망가진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자 나선 당찬 청소년을 보았고 만났고 함께 혁명을 이루었다. 청소년은 우리의 동료였고 우리는 배려하고 연대했다. 청소년에게는 비판적 사유와 연대의 역량이 있었다. 청소년시가 청소년의 재현 과정을 통해 “아무리 아등바등 해도 넘지 못하던 벽을 어느 순간 훌쩍 뛰어 넘기”를 기대한다.
1)손택수『나의 첫 소년』창비 2017. 9쪽
2)오세란 『청소년문학의 정체성을 묻다』 창비 2015. 21쪽
3)<등단 시인들이 쓴 ‘잔혹’ 청소년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울신문 2015.06.02 “리얼한 언어로 아이들 세계를 재현했는데 파괴적이고 패 륜적인 내용이 아니라 통합 기능을 발휘하는 쪽으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유성호),“청소년 각자가 갖고 있는 욕망, 불안, 상상의 세계를 평면적으로 처리했다’(이광호), ”아이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을 가감 없이 쓴 것 같은데 청소년의 심리를 그런 식으로 보여줘도 되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방민호)
4)오세란 같은 책 21쪽
5)『새로 쓰는 청소년 이야기기1- 아이들이 없다』 또 하나의 문화 2006.
6)『청소년 시선 2』 창비교육 2015. 22쪽
7)『창비청소년 시선 1』 창비교육 2015. 62쪽
8) 이장근 『파올볼은 없다』 창비교육 2016. 10쪽
9) 자크 랑시에르 『불화』도서출판 길 2015. 진태원 옮김. 109쪽
“정치는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을 흐트러뜨리는 공동체의 한 부분의 공허한 자유 속에서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 실현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정치의 비정치적 조건인 평등은 여기서 그 자체로 현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의 모습을 띤 가운데에서만 출현한다. 정치는 항상 자유 속 으로 평등이 굴절되는 것을 통해 비틀어진다. 정치는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결코 공동체 및 법의 고유한 본질 위에 정초되지 않는다. 정치는 평등과 법의 결합에 의해, 전체와 동일한 부분의 출현에 의해 공동체와 법의 지위가 변화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10) 이장근 같은 책 「초보 운전」11쪽.
11)이장근 『파울볼은 없다』 창비교육 2016. 52쪽
12) 조재도 『물쇠가 철컥하고 열리는 순간』 창비교육, 2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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