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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김효선/여자 47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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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김효선/여자 47호 외 4편
여자 47호 외 4편
김효선
여자는 한밤중에 일어나 피아노를 먹어치운다
무섭다고 말하는 작은 깃털과 떨어진 머리카락
늑대가 조상이라고 믿는 부족들은 늑대를 사냥한다
받쳐야 할 오늘과 죽어야 사는 내일
할퀸 손톱이 지나간 허공은 비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왜 봄을 기다리지?
나비가 누르는 건반 꽃잎에서 떨어지는 비늘
기다릴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나무로 태어난대
가문비나무에서 불어오는 미파솔 라미레
두 개의 색으로 모든 음을 가둔 벽
아무도 그 벽을 허물지 않는다 딴딴딴
나무가 걸어가지 못한 길은 빗방울이 대신 걷는대
돌아가지 못한 빗방울이 숲의 소리를 갖는다
조금만 더 살아보자 살아보자
축축한 공기 속으로 쏠리는 질문들 의심들 나무들
태어나 제일 먼저 본 것이 수초 속 캄캄함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자꾸 불러오는 저 달이라면
선잠을 자다 붉게 핀 꽃꿈을 너에게 줄게
꽉 조인 코르셋이 악어가 될 때까지 피아노는 돌아오지 않는다
숨은물 뱅듸*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은 그냥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다음날
아름답게 잊으라는 말보다
겨울에 핀 장미는 더 가식적이고
겨울에 내리는 눈은 비가시적
커튼을 내리면 가까운 미래는
우리가 숨어든 무스비 무스비
질척거리는 애인을 남겨두고 영원히
그래 다음날을 꺼내 주자
하나의 색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네바다의 불의 계곡으로 떠나자
분명한 건 가질 수 없으니까
티끌만큼 눈곱만큼이나
가장 징그러운 건 마음이라는 장기
꺼내서 보여줄 수 없는 다음날
다음날은 해가 뜨고 비가 올 수도 있어
당신은 키스랑 헤어질 겁니까? 다음날
추억은 앞으로도 뒤로도 우선 멈춤
사랑할수록 주저앉는
너는 어떤 인간이니
*숨은물 뱅듸: 너른 들판에 숨어있는 물을 뜻함.
우리 작약할래요?
대낮 길거리에서 약을 판대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린대요 얼마나 맛있는지 문을 열기 전부터 돗자리를 깐대요 지루함도 견디게 만드는 저 합법적 손길은
작약김밥작약토스트작약옥수수작약호떡작약떡볶이작약차돌박이작약문어작약순대작약짬뽕작약핫도그작약치약까지먹을판이에요
사라진 숲에서 평생을 기다리는 사랑 우린 서로에게 상처 주는 형살 라일락을 사려다 작약을 사는 저녁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어요 사랑보다 달콤한 글리코겐 혓바닥으로 쏟아지는 감칠맛 남은 밤 버스에는 우르르 등 푸른 고등어들이 올라타고 봄에는 둘째가 태어난대요 호기심이 사라지면 혀끝도 쓸쓸해질까요
아빠는 매일매일 약을 먹어요 머리만 대면 잠에 빠진다는 마약베개는 아무 효과도 없었어요 잠에 저당 잡힌 무덤까지 얼마나 더 자야 갈 수 있냐고 성화에요 베트남 참전 용사로 얻은 것은 류마티스성 관절염 앓는 것이 저인지 어둠인지 모를 환상통 젖몸살을 앓는 딸을 구하기도 했지요
아빠는 환갑이 넘어서 국가유공자가 되었지요 총알택시를 타고 날아가 겨우 턱걸이를 하면서요 이제 병원도 약도 공짜래요 공짜로 아플 수 있대요
우리도 작약 한 번 할래요?
개기월식
민낯을 보여주면 우린 헤어질까
그래 내 뺨은 너무 파리하거나 하얘
꼭 아픈 사람 같잖아
엷은 보랏빛 섀도를 눈 위에 칠하고
볼 터치는 분홍빛 도는 복사꽃으로 할까
황홀해서 벌써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좀 봐
아직 붉은 립스틱은 바르지도 않았는데
아무도 모르는 나는 자학하는 힘으로 견디지
마음을 훔친 사람보다 잠을 훔쳐 달아난 도둑이 되어
아무도 모르게 모르는 주름이 늘어
지금 뭐해?
달에게 던지는 부메랑
너무 기뻐하지 않으려고 슬픔의 볼륨을 올리는 중이야
소음으로 가득 찬 내 생각을 읽어 줘
노래가 필요해 보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모로 눕는 버릇은 여전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벼랑에서 절벽으로
반쯤은 엎질러지고 반쯤은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영원히 잠들지 못해 달이라 모르게 부르는
이름으로
멜랑콜리아
창은 몇 개의 얼굴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꽃이 많아서 듣지 못하는 귀
한 고막이 찢기면 다른 고막이
오래된 쇠구슬을 굴리며
동그라미 안으로 어서 어서 들어와
오늘 손목시계가 멈췄어
시시콜콜 서로를 말하던 우리는 어느 날 시시콜콜 알아야 해? 그렇게 시시하고 콜콜스럽게 버려지고 다시 시와 시는 냄비 받침대가 되고 컵라면 뚜껑을 덮고 콜과 콜은 머리카락 한 타래 권운처럼 비행운처럼 상투적으로 흘러가고
120년 만에 화성과 목성이 만난다는 전갈자리
오리온을 가질 수 없다면 고비의 선인장이 되겠어
우연이 겹친다는 말이 우주의 이치라면
지구가 흔들릴 만큼 낭만적인 흙탕물을 튕겨 줘
휘파람 불며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그치만 오늘 길에서 죽은 고양이를 봤어
김효선 2004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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