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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김효선/시론/바닥이 바닥으로 온전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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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김효선/시론/바닥이 바닥으로 온전하기까지
시론/바닥이 바닥으로 온전하기까지
김효선
빨강머리 앤. 그 이름만으로도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기댈 곳이 없었을 때 내가 유일하게 기댄 곳. 불우한 시절에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은 이유였다. 그렇다 누구든 어디든 옆에 있든 없든 환상이든 판타지이든 어깨를 기댈 곳이 있다면 살아갈 이유는 충분했다. 살아보니 가난은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면은 단단하게 붙들어준 정신의 성장통이었다. 결핍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운명의 나침반이 달려 있었다.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바다에서 온전하게 지탱하고 온전하게 남아있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절름발이처럼 늘 한쪽은 어긋나고 비틀리고. 그것이 삶이었다. 균형을 이루다가도 발을 삐끗했을 때 나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세상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다시 돌아가고 싶은 탄성이 생기는 것처럼. 그렇게 세월은 기록되고 기록은 ‘내’가 되어 다시 ‘나’로 환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시’가 아닐까. 아니었을까.
누가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 분이 오셨을 때라고. 영감이 오셨을 때라고. 그 분이 내게 오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날들과 밤들을 지새웠는지 그 분만이 알 것이다.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 역시 그렇다. 잠시 잠깐 나를 스쳐가는 행복은 많았을 것이다. 소소하게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들, 가슴 벅차오르던 기억들, 기뻤던 순간들. 봄이면 순한 연두를 거느린 느티나무를 볼 때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모르는 내적 카타르시스에 비하지 못했다. 시가 나에게 주는 행복은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이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사람에게서 느끼는 행복은 가끔 먹는 비타민 같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은 상대적 고독을 만든다. 사람에게 기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시’는 절대적 고독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다. 고독은 오히려 집중과 몰입을 통해 내면 깊숙이 들어가게 만든다. 내가 만든 세계에 들어가 노는 재미. 그런 재미를 나는 꽤나 늦게 알았다.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시는 도망가지 않았다. 붙잡으려고 할수록 더 달아나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잘 써지지 않는 날도 잘 써지는 날도 시는 그냥 ‘나’였다. 내가 나에 기대어 사는 일. 그래서 나의 종교는 감히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새 나의 뇌 속엔 ‘시’라는 방이 생겨 자꾸만 그곳에 들어간다.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간. 홀로 아름다울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시가 나에게 오는 행복이다.
오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에서 작약을 샀다. 분홍빛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라일락이 웃고 있었지만 이제 막 싹이 올라오는 작약에 마음이 갔다. 아름다운 건 쉽게 시들어버린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나는 아름답지 않으려고 애쓴다. 물론 외모가 아니다. 미의 기준은 누구에게나 다 다르겠지만. 내면이 아름답다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시크해보일지도 모르지만 내면은 외면보다 더 불순할 때가 많으니까. 어떻게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드러내지 않으려고 들키지 않으려고 손톱 발톱을 숨기고 있을 뿐. 시에서는 숨겼던 손톱 발톱들이 스윽 스윽 고개를 밀고 올라올 때가 많다. 손톱 발톱을 또각또각 깎아놓으면 시가 된다. 가끔씩 잊고 잘라주지 않으면 나를 향해 찌른다. 자라는 것들은 이렇게 정직하다. 그렇게 마음의 성장통은 멈추지 않고 계속 자란다. 내 시는 아름답지 못한 곳으로 향한다. 뾰족뾰족한 것을 순하게 바꿔놓기 위해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깎아도 깎아도 손톱과 발톱은 매일 자라니까. 지구는 둥그니까.
늦게 피는 꽃, 만곡晩穀이라는 호를 나에게 지어주신 분이 계셨다. 모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를 할 때였는데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 후반에 가까웠기에 그때도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기다려야 한다니. 대체 언제 꽃이 핀다는 거야 하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었다. 이제와 생각하는 거지만 그 말이 맞았다. 일찍 피우는 꽃일수록 빨리 진다는 말이 아니다. 오래오래 시를 쓰기 위해서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자만이나 오만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라는 걸 늦게야 알았다. 언제나 내 마음에 혹은 독자의 마음에 드는 시를 쓰기는 힘들다. 독자를 의식하면서 시를 쓰지는 않지만. 오래 들여다보면 볼수록 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깊이 들여다본다는 말도 새로운 눈으로 보라는 말도 아직 뼈 속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그러니 내 시는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내 시의 생장점이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가지가 뻗고 뿌리가 단단해지면서 숲을 채우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고독하라 그리고 명랑하라. 오래전부터 나는 이 말을 내 SNS에 걸어놓고 있다. 시를 쓸 때는 고독하게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랑하게. 내면은 치열하게 외면은 밝게 살고 싶은 생각이다. 사람들과 섞여야 하고 또 홀로 고독해지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다. 언젠가 내 마음에 염화미소가 감돌기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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