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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정찬일/어긋난 경계에 떠도는 불온한 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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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정찬일/어긋난 경계에 떠도는 불온한 화법
어긋난 경계에 떠도는 불온한 화법
정찬일
김효선 시인의 시에 나타난 시어들의 관계는 감추어져 있다. 인과나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환유적 독법으로는 그의 시가 잘 읽히지 않는다. 시어와 시어가 만나는 경계가 빛의 굴절처럼 서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경계는 서로 다른 세상들이 만나는 구분 선이다. 그가 구사하는 경계의 이쪽과 저쪽이 거느린 시어들은 서로 거리가 멀어 쉽게 어울리지 않고 서로 비껴가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김효선 시의 시적 상황과 표현이 현실의 재현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여자 47호」 외 4편의 시에 내재된 사고의 내재율을 살펴보기로 하자.
세상에 던지는 시인의 질문 몇
「여자 47호」 외 4편의 시에는 공통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구절들이 나온다.
사람들은 왜 봄을 기다리지?(「여자 47호」에서)
당신은 키스랑 헤어질 겁니까? 다음날/…/너는 어떤 인간이니(「숨은물 뱅듸」에서)
우리도 작약 한 번 할래요?(「우리 작약할래요?」에서)
시시콜콜 알아야 해?(「멜랑콜리아」에서)
민낯을 보여주면 우린 헤어질까/…/지금 뭐해?(「개기월식」에서)
시적 대상과 상황, 그리고 시적 맥락 등 차포車包를 모두 떼어내고 살펴보더라도 김효선 시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위 구절들로 알 수 있다. 이 민낯의 짧은 시구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에 따른 저만의 대답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읊조리게 만든다.
왜, 비껴가는 어법인가
김효선의 시는 일상에서 비일상의 낯섦으로, 비일상에서 본연의 일상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이 끌어당김의 한 방법으로, 그는 인과나 서사, 그리고 역설이나 반어적인 시적 표현보다는 시어와 시어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시구와 시구가 서로 어긋나 비껴가는 시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우주가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의 시간 속에 새로운 영역과 그물망 같은 관계가 연이어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영역과 관계의 출현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수많은 지층 속에 우리가 놓여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모든 것을 서사적이고 인과적으로 바라보기로는 가려져 있거나 익숙함에 묻혀 있는 시적 대상의 의미를 표면으로 끄집어 올리거나 의미를 확장하기가 더욱 어렵다. 김효선 시인이 시어와 시어의 거리가 멀고, 시구와 시구가 서로 비껴가는 어법을 사용하는 것은 수많은 지층 속에 갇혀 있거나 익숙함에 묻혀 있는 시적 대상의 의미와 이미지를 새롭게 환기하려는 방법인 것이다.
그럼 시 「여자 47호」부터 살펴보자. 이 시에 나타나는 시적 표현들은 모두 낯설다. 여자가 한밤중에 일어나 “피아노를 먹어치운다”. 또한 자기 조상이 늑대라고 믿는 부족들이 그 조상인 “늑대를 사냥한다”, “할퀸 손톱이 지나간 허공은 비어있지 않다” 등. 이러한 시적 표현들이 시 「여자 47호」의 전반에 걸쳐 가득 차 넘친다.
시 「숨은물 뱅듸」에서도 “겨울에 핀 장미는 더 가식적이고/겨울에 내리는 눈은 비가시적”, 「우리 작약할래요?」에서도 시인은 불특정 다수에게 “우리도 작약 한 번 할래요?”라고 말을 건넨다. 이 시에서 ‘작약’은 ‘약’의 변주다. 이 ‘약’은 마약 성분의 약이고, 베트남 참전 용사인 아버지가 류마티스성 관절염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복용하는 약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약이 “환상통 젖몸살을 앓는 딸을 구하기도 했지요”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작약할래요?”라는 시인의 권유는 우리에게 던지는 불온한 권유이다.
“창은 몇 개의 얼굴로도 만족하지 못한다//꽃이 많아서 듣지 못하는 귀/한 고막이 찢기면 다른 고막이/오래된 쇠구슬을 굴리며/동그라미 안으로 어서 어서 들어와”(「멜랑콜리아」 중에서), “너무 기뻐하지 않으려고 슬픔의 볼륨을 올리는 중이야”(「개기월식」에서). 이러한 표현들이 그의 시 전편을 통해 발견된다. 이러한 김효선 시인의 시적 표현들은 단순한 언어유희로 시적 재미를 드러내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
이쯤에서 왜 시인이 이러한 시어와 시어, 그리고 시구와 시구가 어긋나는 낯선 표현을 쓰는지가 궁금해진다.
두 개의 색으로 모든 음을 가둔 벽
아무도 그 벽을 허물지 않는다 딴딴딴
나무가 걸어가지 못한 길은 빗방울이 대신 걷는대
돌아가지 못한 빗방울이 숲의 소리를 갖는다
조금만 더 살아보자 살아보자
축축한 공기 속으로 쏠리는 질문들 의심들 나무들
―「여자 47호」에서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은 그냥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다음날
아름답게 잊으라는 말보다
겨울에 핀 장미는 더 가식적이고
겨울에 내리는 눈은 비가시적
커튼을 내리면 가까운 미래는
우리가 숨어든 무스비 무스비
질척거리는 애인을 남겨두고 영원히
그래 다음날을 꺼내 주자
―「숨은물 뱅듸」에서
대낮 길거리에서 약을 판대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린대요 얼마나 맛있는지 문을 열기 전부터 돗자리를 깐대요 지루함도 견디게 만드는 저 합법적 손길은
―「우리 작약할래요?」에서
민낯을 보여주면 우린 헤어질까
그래 내 뺨은 너무 파리하거나 하얘
꼭 아픈 사람 같잖아
엷은 보랏빛 섀도를 눈 위에 칠하고
볼 터치는 분홍빛 도는 복사꽃으로 할까
황홀해서 벌써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좀 봐
―「개기월식」에서
시 한 편 한 편을 두고 보면 김효선 시인의 시는 잘 읽히지 않고 난해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 몇 편을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면 시인이 서 있는 세상, 혹은 화자의 시적 상황이 선명하게 보인다.
물론 위에서 인용한 시적 상황들같이 맥을 함께하는 시적 상황이 「멜랑콜리아」의 “콜과 콜은 머리카락 한 타래 권운처럼 비행운처럼 상투적으로 흘러가고”라는 구절에서도 보인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두 개의 색으로 모든 음을 가둔 벽”의 세계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벽을 허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계는 “나무가 걸어가지 못한 길은 빗방울이 대신 걷”고, “돌아가지 못한 빗방울이 숲의 소리를 갖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은 그냥 다음날”이고 “자고 일어나니 다음날”과 여전히 다르지 않은 날이 이어지는, ‘무스비(운명)’에 갇힌 세계이다. 이런 운명에 갇힌 세계는 ‘질척거리는 애인’에게나 던져줘야 할 세계인 것이다.
비현실적인 일상이 작약을 먹어 견뎌야 하는 일상이 되어버린 세계에 시인은 존재한다. 이러한 세계는 ‘지루하며’(「우리 작약할래요?」), ‘민낯’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엷은 보랏빛 섀도를 눈 위에 칠하고” 볼 터치를 “분홍빛 도는 복사꽃으로 할” 때에야 “황홀해서 벌써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손목시계’가 멈춘 세계이다. ‘몇 개의 얼굴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창’은 이런 세계와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김효선 시인의 시들은 이러한 세상, 이러한 시적 상황에 출발한다.
극지의 세상을 찾아가는 시인의 화법
사회가 진화할수록 그에 따라 언어도 그 경계를 넓히고 진화한다. 숨김이 많아질수록 그 숨김을 드러내는 언어도 복잡해진다. 지루하고 민낯을 오독하며 셔터를 누르는 세계에서 잡히지 않는 궁극을 이루기보다는 궁극을 방해하는 벽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기 위해 김효선 시인은 어긋난 경계에 떠도는 불온한 화법을 구사하는 것 같다. 그는 이러한 화법으로 일상으로 덧칠해져 있거나 덧씌워진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 눈앞에 펼쳐진 현상적인 것들을 더 ‘가식적’이라고 말하고 ‘비가시적’이라고 말한다. 김효선 시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글쓰기는 일상에 물든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동시에 세상을 확장하려는 모색이다. 이것도 궁극의 극지를 향해 가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시인은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은 그냥 다음날’을 간신히 존재하며, ‘상투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우리에게 불온한 화법으로 다시 묻는다.
지금 뭐해?
오늘 길에서 죽은 고양이를 봤어
우리도 작약 한 번 할래요?
꽉 조인 코르셋이 악어가 될 때까지
궁극의 극지에 닿으려는 시인의 애절한 화법이다.
정찬일 199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죽음은 가볍다』, 『가시의 사회학社會學』. 제주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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