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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김종옥/그림자에 눕다·14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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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김종옥/그림자에 눕다·14 외 4편
김종옥
그림자에 눕다·14
끈끈이 쥐덫을 놓았다 맑은 물 한 접시 받아 놓은 것처럼
눈을 뜨고 있어도 내 집을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니니 대놓고 맞장 뜨자고 놓은 함정이다
날곡식 훔쳐 먹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지 않겠어? 아니 깜깜한 밤길에 발을 헛디뎌 주어도 좋지 저리 얕은 물이라고 빠진 발 하나쯤 거뜬히 빼낼 것 같이 보여도 닿기만 하면 걷잡을 수 없는 깊은 수렁이다 살아있어도 손끝 하나 맘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꼼짝없이 무덤이 되는 그 곳은
내가 튤립을 묻어 놓고 꽃을 기다리는 마당, 바싹 마른 메주를 띄우는 큼큼한 시렁 위, 가랑잎이 쌓인 밤나무 밑, 혹은 아들과 피자를 먹는 저녁들조차 풍경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를 몰라 속을 알 수 없는 구멍을 드나들며 여간해서 저를 드러내지 않는 놈들 어둠은 깊을수록 투명해져서 뭐든 삼키는 대로 선명하게 토해 놓는 법인데
놈이 보이지 않는다 빠각빠각빠각 폐를 갉아대는 소리가 귓속에 굴러다니는 밤, 산 귀퉁이 헐어내며 뿌옇게 하늘이 열린다 쏜살같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수많은 발자국들
그러나, 맑은 접시 위에 부리를 담그고 박재가 되어가는 박새 한 마리
그림자에 눕다·13
아직도 장미는 맨발이다 장미를 부르면 창밖이 어두워진다 기억을 가둔 비밀처럼 여름이 달궈지면 그날같이 텅 빈 무덤이 되어버리는 장미, 겹겹으로 접힌 어둠이 잠겨가는 시간 나는 덜어내고 덜어내도 고이는 알 수 없는 장미에 사로잡힌다 저 이글거리는 검붉음이 오는 길목에 서서, 척척 걸린 장미 위에 머뭇거리는 바람을 본다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긴 손, 손을 흔들고 오는 저 쪽을 물들이는 해가 언제 뜨는지, 저녁을 적시는 노을은 얼마나 뜨거운지, 컹컹컹 개 짖는 소리가 어디로 새고 있는지,
사브락사브락 꽃잎이 간다. 길을 환하게 열어두고 소리 없이 젖어드는 것들
나는 수십 년 전, 잔디밭을 붉게 물들이던 장미에 갇혀 사는가? 나는 맨발인가? 부고는 소리 소문 없이 조회시간에 도착했다 너덜너덜 찢겨진 하루가 저물도록 잔디밭을 떠나지 못했다 날마다 비릿한 바람이 어스름을 끌어안고 머뭇거렸다 나는 창틀을 놓고 공중에 몸을 누인 장미에 절망하고 절망한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쏟아지는 돗바늘 같은 기록들은 오롯이 남겨진 자의 몫,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을 걷는 노을을 두려워하느니
메사리°언덕에 봉분이 낮아지고 푸른 억새가 뒤덮여도 좀처럼 오늘이 오지 않는다 나는 장미를 남발한다
메사리 인천 서창동
그림자에 눕다·9
아버지가 나무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즈음 나는 밤을 새워가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있었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 발 하고, 소질을 개? 발 하고 타고난 소질을 개발 같은’ 번번이 앞을 막고 서는 ‘계’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흙먼지 바람처럼 불안한 전망, 사라져 가는 봄, 그것은 아버지가 노끈을 총총 감은 칼자루를 단단하게 틀어잡고 다른 손으로는 얇은 껍질을 짚어가며 칼끝을 나무에 찔러 넣는 일이다 자라지 못하는 열매를 위해
그래, 손바닥 가득 적어 놓은 헌장을 슬쩍슬쩍 보며 외우는 흉내를 냈어 끝내 소질을 계발하지 못한 문장을 반복하고 아이들이 키득거리고 그제야 내 커닝이 들켰다는 것을 눈치 챈 순간, 식은땀을 닦는 이마가 검은 잉크로 범벅이 되고 흘러내리는 땀이 깜빡거리지도 못하는 눈으로 흘러들었어
무녀리 같은 열매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날을 세운 햇빛이 온몸에 꽂힌다 나무에 혈관을 끊어낼 때는 칼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어서도, 힘을 빼서도 안 돼, ‘아버지! 오늘도 밥을 먹을 수 없었어요, 배가 고프지 않아요’ 자칫 칼을 쥔 손을 잘못 놀려 날이 빗나가면 상처가 덧나 돌이킬 수 없다 함부로 떨어져 뒹구는 꿈은 얼마나 지리멸렬한가 지린내가 켜켜이 쌓인다 나무둥치를 돌려 깎은 껍질을 벗겨낸다*붉은 속살에 맑은 수액이 고인다 날마다 짐승의 비명처럼 나무 터지는 소리들 이유도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아버지는 어둠이 차오르는 나무 앞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른 계절이 성큼성큼 지나간다
* 환상박피-가뭄이나 병충해로 열매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 될 때 나무의 체관을 잘라 영양이 뿌리로 가는 것을 막는 극단적인 처방.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으나 나무가 박피된 곳을 덮어가며 스스로 살아내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림자에 눕다·16
‘무슨 꽃이야? 포장마차 앞에 둘러서서 밥을 먹는 청년들, 구부정한 등에 전등 빛이 쏟아지는 사진이 도착한다 꽃이란 튤립이 처음 봉오리를 열었거나 감청색 슈트에 넥타이를 맨 젊은이가 대문을 나서는 풍경이라야 어울리는 말 느닷없이 불안이 들이친다
꽃은 안전한가?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내가 청년에 등을 쓸어내리자 화면이 지나간다 짙은 안개에 몰린 산이 내려온다 먹물을 뿌려 놓은 듯 검물이 들어있다 꽃을 찾는다 헐렁한 점퍼에 가방을 멘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만가만 조여 드는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듯 사라진다
‘밥은 먹고 다니니?’
째깍째깍째깍 시간을 모아 둘 수 있다면? 꽃으로 가둬 둘 수 있다면?
어깨가 들썩인다 돌아본다 늘어진 가방을 추켜올리는 거친 손이, 퀭한 눈이, 옷자락에 뚝뚝 떨어지는 쓸쓸함 들이 닮은
그가 그이고 그가 그 인 꽃 한 아름
‘간 쓸개 빼놓고 사는 아들을 낳고 밥이 넘어 가니?’
꽃이 피지 않는 낯선 시간들이 나지막한 길 안에 걸린다
‘내일을 어디에 내려놓았을까?
서둘러 쌀을 씻어 안친다
그림자에 눕다·17
그 부두에서 나는 네게 익숙했을 것들을 담아 택배로 보낼 것을 획책한다 부두는 너의 고향 우체국 시계가 멈추기 전에 포장을 끝낼 수 있을까? 바다와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노을들 부두는 어느 하나 온전한 것들을 담고 있지 않아 온통 어룽거리는 것들 뿐인데 망둥이가 낚이는 포구와 파인애풀과 여객선을 싣고 떠나는 파도까지 접어 넣을 수 있다면 저기 물이 빠진 갯골에 선명한 물새 발자국들 화석이 되어 가는 외로움이란 얼마나 사뿐사뿐한 것일까 그러나 네가 소중한 것을 저당 잡힌 물에 끝내 닿을 수 없어 잡히지 않는 네게 매달려 쩔쩔매고 나는 소외 된다 소외의 앞자락은 구겨지고 구정물 쓴 얼굴처럼 허전해 서둘러 생선 한 마리 물고 방파제 아래 몸을 숨기는 고양이를 쫓는다 어둠이 오고 철저하게 만져지지 않는 너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지금 나는 너무 바빠 고래 힘줄보다 질기다는 인연에 수 천 수 만 가지 이유로 휘감기고 끌려 다니고 그렇게 이 부두까지 오랫동안 격리 시켰어 이 물컹거리는 부두 어디든 있는 네게, 뚝 떼어 보낼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고 우체국 문이 닫힐 시간까지도 나는 젓국 통에 국물 한 국자 더 퍼 담는 두툼한 손등에 자꾸 눈이 가 어둠이 뭉근하게 젖어드는 섬이라도 꾹꾹 눌러 담을까? 하다가 나는 애호박 찌개가 골콤달짝 끓는 부두를 떠낼 수 없어 헛걸음질만하고 반짝인다는 것은 파도에 평범한 해석 그 조차 넣을 수 없는 상자는 어제처럼 작고 얇아서 네게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손에 쩍쩍 묻은 꼬리꼬리한 냄새만 부두같이 남을 터인데 고것이라도 진공포장기에 넣고 눌러 줄까? 그리하여 내가 상자에 뚜껑을 닫고 청테이프로 칭칭 감는 사이 젓배가 몰려오고 이런! 나는 네 주소를 몰라
*김종옥 2005년 계간 《애지》로 등단. 시집 『잠에 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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