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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한용국/일어서는 그림자를 위한 오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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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집중조명/한용국/일어서는 그림자를 위한 오독
일어서는 그림자를 위한 오독
한용국
빛이 지나가는 경로 위에 물체가 있을 때, 물체 뒤쪽으로 빛이 통과하지 못해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그림자라고 부른다. 빛과 그림자는 마치 샴쌍둥이와 같은 것이어서, 한 쪽 없이는 다른 쪽이 가능하지 않다. 빛을 전제조건으로 할 때, 그것은 물체와 그림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렇다면 ‘빛’이다. 어떤 가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 빛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이다. 그 가정 속에서는 이 세계는 통째로 그림자가 된다. ‘물체’와 ‘그림자’의 구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은 통째로 그림자의 삶이 되어 버린다. 김종옥의 연작시 “그림자에 눕다”는 이런 가정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림자에 눕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소멸의지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다른 욕망 또한 드러난다. 생성의 욕망이 그것이다. 그림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자아의 거부인 동시에 새로운 자아 생성의 욕망인 것이다. 김종옥의 시들 “그림자에 눕다” 연작은 소멸의 욕망과 생성의 욕망이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알랭 바디우는 “시는 그 자체가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장소이자 사유의 통로”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시적 사유가 일종의 ‘작용’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김종옥의 시들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고 그것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눕다’라는 동사에 주목해 본다. 행위로서 이 단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진행 중이거나 완료된 상태가 그것이다. 김종옥의 시들에서 ‘눕다’는 진행 중인 사태인 동시에 완료된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통합의 시도인 동시에 분열을 확인하면서 지연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김종옥의 시들이 번호가 매겨진 연작시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작시의 형식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형식으로서의 ‘연작’은 대상 또는 상황을 향한 반복적인 다가감과 물러섬 사이에서 부유하는 기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우선 한 편 한 편의 시들 속에서 김종옥 시인의 시적 주체가 어떻게 ‘눕고’ 있는가 혹은 어떻게 ‘누워’ 있는가를 읽어나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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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에 눕다·14」는 “끈끈이 쥐덫”을 놓는 일로 시작된다. 쥐는 보통 밤이거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움직여, 쉽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집의 쥐는 다르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 집을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닌다. 그것은 일종의 사태다. 쥐로 인해 나의 공간이 주는 평화와 안정은 파괴되어버렸다.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는 “대놓고 맞장뜨자”는 마음으로 함정을 설치했다. 함정으로서의 “덫”은 “닿기만 하면 걷잡을 수 없는 깊은 수렁”이고, “살아있어도 손끝하나 맘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꼼짝없이 무덤이 되는” 곳이다. 예상대로라면 그 수렁과 무덤에 쥐는 갇혀야 하고, 나는 평화와 안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덫”은 실패한다. 이유는 “맑은 물 한 접시”의 형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나’는 ‘쥐’에게 “날곡식 훔쳐 먹다 목이 마르면” 찾게 되거나, “깜깜한 밤길에 발을 헛디뎌 주”길 바라고 있다. ‘나’에게는 함정이지만 쥐에게는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쥐가 그 욕망을 성취하는 순간 그대로 “무덤”이 되고 마는 장소가 바로 덫이다. 여기서 일종의 ‘겹침’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나의 욕망이 오히려 역전되는 것이다. 그 덫에 걸린 것은 결국 나의 삶이다.
내가 튤립을 묻어놓고 꽃을 기다리는 마당, 바싹 마른 메주를 띄우는 큼큼한 시렁 위, 가랑잎이 쌓인 밤나무 밑, 혹은 아들과 피자를 먹는 저녁들조차 풍경이 된다
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덫의 표면에 겹치며 붙들리는 현상이 일어나 버렸다. 겹침이 일어나자마자 나와 쥐의 상황은 역전된다. 내가 덫을 놓은 것이 아니라, 쥐가 나에게 덫을 놓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맑은 물 한 잔 같은 덫에 비친 나의 삶은, 물에 비친 그림자의 삶일 뿐이다.
빠각빠각빠각 폐를 갉아대는 소리가 귓속에 굴러다니는 밤, 산귀퉁이 헐어내며 뿌옇게 하늘이 열린다 쏜살같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수많은 발자국들
“뿌옇게 열린 하늘”은 어디로 향하는 통로일까. 이 구절은 독일의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떠오르게 한다. 독일의 마을에 쥐떼가 창궐해 쥐떼 퇴치를 위해 금화 천 냥을 걸었다.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피리를 불어 쥐떼를 강으로 유인하여 해결했다. 그러나 약속된 돈을 주지 않자 사나이는 다시 피리를 분다. 그러자 피리소리에 매혹된 아이들이 사나이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이 모티프의 차용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그림자가 꿈꾸는 어떤 ‘장소’에 대한 일종의 암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서만 가능한,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상상적 공간, 빛의 공간은 아닐까.
쥐들이 떠나버린 자리에는 덫만 남았다. 아니 덫뿐만 아니라 그 덫에 갇힌 채 박제가 되어가는 박새 한 마리만 남아있다. 알랭 바디우는 말한다. “시는 그 자체가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장소, 사유의 통로다”(알랭 바디우, 비미학) 그 통로에서 일종의 역전의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결국 “내가 보이지 않는다”의 확인일 뿐이다. ‘나’의 삶은 ‘덫’에 갇힌 삶이다. 여기서 살아가는 것은 다만 그림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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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그림자에 눕다·13」은 어렴풋하게나마 ‘그림자’의 삶이 시작되는 원체험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만든다. 이 시는 온통 장미에 대한 묘사와 변용 그리고 진술로 끓어오른다. 마치 눈앞에서 활활타고 있는 한 송이의 장미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일차적으로 그 장미의 정체는 노을이겠지만, 단순한 비유적 장치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단순함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려는 어떤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그 의지는 알 수 없는 원체험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거의 들림에 가까워, 시의 몽환적 주술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그 원체험은 시 초반부에 “그날”이라는 시간으로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시간으로 인해 “장미”는 “텅 빈 무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다. 그러나 “텅 빈 무덤”일 때 의미는 달라진다. 죽음에 삶이 겹쳐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덜어내도 고이는 알 수 없는 장미”는 누군가의 죽음인 동시에 나의 삶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장미는 “아직도 맨발이다”.
어떤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맨발의 어린 소녀가 있다. 그 맨발의 소녀는 노을이 물드는 창밖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는 공포를 느끼고 있는데, “겹겹으로 접힌 어둠”이라는 표현이나, 바람을 이미지화한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긴 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녀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공포 앞에 서 있다. 하지만 마냥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상하게도 소녀는 바로 그 공포에 매혹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쪽”에 대한 생각 때문은 아닐까. 앞의 시에서 말했던 ‘그곳’과도 같은 공간 말이다. 그 “저쪽”으로 향한 길은 무서우면서도 아름답다. “사브락 사브락 꽃잎이 가는 길”이고, 그 “길” 위에서 “꽃잎”들은 “소리 없이 젖어”든다. 무서우면서도 자꾸 바라보게 되는 풍경, 그것이 바로 어린 소녀가 노을 지는 잔디밭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이유다.
시에 따르면 그 소녀가 “수십 년 전 잔디밭을 붉게 물들이던 장미”에 사로잡힌 이유는 바로 “부고” 때문이다. 어린 시절 “조회시간”에 도착한 누군가의 부고는 소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너덜너덜 찢겨진 하루”라는 표현에서 그 절망을 확인할 수 있다. 행간을 읽어보면 그 날 부고를 받은 후 소녀는 하루 종일 잔디밭을 떠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노을이 질 무렵에야 소녀는 정신을 차린다. 어제까지 아름답던 노을은 이제 절망의 장미가 되어 있다. 그 이후 소녀의 삶은 “날마다 비릿한 바람이 어스름을 끌어안고 머뭇거리는” 날들이었다. 이후 소녀의 삶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쏟아지는 돗바늘 같은 기록들”과 함께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부고 이후에도 노을은 계속된다. 그것은 삶도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과 삶 사이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나는 수십년 전, 잔디밭을 붉게 물들이던 장미에 갇혀 사는가? 나는 맨발인가?”
이 물음 앞에서 ‘장미’와 ‘나’는 겹치는 동시에 분리된다. “장미는 맨발이다”에서 짐작해 볼 수 있는 어린 소녀와 그 어린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일종의 그림자 분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나’는 여전히 “어린 소녀”와 “나”를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과연 “누가” 살아온 것일까. “어린 소녀”인가 그 어린 소녀를 바라보는 “나”인가. 누가 ‘나’이고 누가 ‘그림자’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수십 년을 살아 온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봉분이 낮아지고 푸른 억새가 뒤덮”이도록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오늘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말한다. “나는 장미를 남발한다”. 장미로 표상되는 원체험이 '나'를 붙들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그 현재는 끝없이 반복되는 과거의 한 순간에 붙들려 있다. 그 순간이 가져 온 공포와 아름다움의 매혹에 들린 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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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그림자에 눕다·9」에는 단편적인 성장기가 등장한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있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에서 ‘나’는 자꾸 멈추게 된다. “계”와 “개”가 헛갈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개발독재 시대의 산물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구절의 앞부분은 이렇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그러나 과연 가능한 일이었던가.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는 일은.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열심히 일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했다. 아마 이 시에 나오는 아버지의 삶이 그랬을 것이다. 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아버지의 자세는 일종의 종교적 엄숙함마저 느껴진다. “아버지가 나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더구나 아버지의 나무관리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적이기까지 하다. “노끈을 총총 감은 칼자루를 단단하게 틀어잡고 다른 손으로는 얇은 껍질을 짚어가며 칼끝을 나무에 찔러넣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가 여전히 “흙먼지 바람처럼 불안한 전망, 사라져 가는 봄”, 가난이 눈 앞에 있을 뿐이다. 가난한 집의 아이는 자신의 소질을 계발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 버렸다. 그러므로 국민교육헌장은 아이에게 허구일 뿐이다. 더구나 그것을 외운다고 해서 소질을 계발할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커닝을 선택한 것일까. “손바닥 가득 적어 놓은 헌장을 슬쩍슬적 보며 외우는 흉내”를 낸다. 결과는 실패다. 끝내 아이는 “소질을 계발하지 못한 문장을 반복”하다가 들키고 만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닦다가 손바닥 가득 적어놓은 헌장으로 이마는 검게 변해 버렸고, 그 검은 땀은 눈으로 흘러들고 만다. 시 속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카인의 표지를 연상하게 한다. 가난의 표지라고 바꾸어 말해도 될 것이다.
아버지의 삶은 묵묵하고 성실하다. 그 삶에는 일종의 지혜라고 할 만한 것들이 들어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삶의 지혜는 가난을 해결하지 못한다. 가난으로 인해 꿈은 “함부로 떨어져 뒹굴” 뿐이고, 삶을 지리멸렬하게 하고 지린내까지 나도록 만든다. “아버지 오늘도 밥을 먹을 수 없었어요. 배가 고프지 않아요.” 아마도 배가 고프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은 여전히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붉은 속살에 고이는 맑은 수액”은 아이가 느낀 아버지의 삶이겠지만, 전망은 어둡고, 삶은 불안하다. 아이가 “이유도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것은 그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차오르는 나무 앞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아버지에게는 엄숙함과 무기력함이 공존하고 있다. 환상박피는 “나무가 박피된 곳을 덮어가며 스스로 살아내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극단적인 처방이다. 가족이란 그렇다. 어느 소설가가 말했듯,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살아가는 뱀의 형상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끔찍한 그림자가 될 수도 있다. 때로 ‘나’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족이라는 그림자 속에 눕는다. 그 그림자 속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겹쳐 있다. 여전히 “자라지 못하는 열매”인 채로.
자라지 못하는 열매들은 그자라서 어떻게 되는가. 「그림자에 눕다 16」에는 불안한 청춘들이 등장한다. “포장마차 앞에 둘러서서 밥을 먹는 청년들, 구부정한 등에 전등 빛이 쏟아지는 사진”을 보며, 시의 화자는 묻는다. “무슨 꽃이야?” 그러나 그것은 꽃이 아니다. 화자에게 꽃은 “튤립이 처음 봉오리를 열었거나 감청색 슈트에 넥타이를 맨 젊은이가 대문을 나서는 풍경”이라야 어울리는 말이다. 희망과 기대로 가득찬 젊음이라야 어울린다는 말일텐데, 사진 속의 젊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화자에게는 “불안이 들이친다” 그리고 묻는다. “꽃은 안전한가?” 그러자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안전을 염려하는 “꽃”은 아마도 자신의 아이일 것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다시 화면을 넘기면 새로운 장면이 나타난다. “헐렁한 점퍼에 가방을 멘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다가 가만가만 조여드는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듯 사라지는” 장면이다. 아이에게 화자는 묻는다. “밥은 먹고 다니니?”
얼마나 간절한 질문인가. 가난한 형편임이 분명해 보이는 아이는 그 질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그리고 그 아이와 사진 속의 젊음들은 “그가 그이고 그가 그린 꽃 한 아름”으로 진술된다. 시 속의 등장하는 아이의 장면은 ‘나’의 어린 시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자라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청춘들은 “간 쓸개를 빼놓고” 살아가도 여전히 “꽃이 피지 않는 낯선 시간”의 길 위에 있을 뿐이다. 그 젊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에 따르면 그것은 ‘밥’이다. “내일을 어디에 내려놓았을까?/서둘러 쌀을 씻어 안친다” “자라지 못하는 열매”(「그림자에 눕다·9」)로 가득한 세상을 한 그릇의 밥은 “내일”이 될 수 있을까. 앞의 시들에서 언뜻 보았던 것처럼 그 ‘내일’의 세계는 ‘저쪽’에만 존재한다. 여기는 그림자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림자가 그림자를 위로하는 일은 이 세계에서 과연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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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림자에게 온전한 사랑마저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림자에 눕다·17」에 나타나는 사랑은 부재중이다. 시 속의 화자는 부재중인 사랑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메다니고 있다. ‘너’와 ‘나’는 한 때 부두에서 어떤 삶을 공유했다. 그 삶이 사라져 버린 지금 나는 “네게 익숙했을 것들을 담아 택배로 보낼 것을 획책”하고 있다. 그런데 왜 획책인 것일까. “획책”은 주로 부정적인 행위와 관련되어 쓰이는 단어다. 어쩌면 그것은 ‘너’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택배로 보내는 행위”가 ‘너’에게 들키는 순간, “우체국 시계가 멈추”는 순간 그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그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는 말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부두라는 공간에서 일단의 암시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시에 따르면 부두는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들을 담고 있지 않아 온통 어룽거리는 것들 뿐”인 장소다. 부두라는 장소 자체가 그림자의 속성을 닮아 있는 것이다. 부두라는 장소가 가진 경계로서의 성격은 차치하고서도 그 곳에서 일어난 두 사람의 만남 또한 그림자적 속성을 가진 것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추상적 감정 또는 행위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사랑을 상실한 자의 외로움이 가뿐해지려면 “포구와 파인애풀과 파도까지 택배에 집어넣을 수 있어야” 가능해지는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화자는 “소외”되어 버리고 만다. 그 속에서 화자가 할 수 있는 행위는 그저 “고양이를 쫒”거나, “너를 슬그머니 내려놓”으려는 시도뿐이다. 그 행위들은 결국 “나는 지금 너무 바빠 고래힘줄보다 질기다는 인연에 수천수만 가지 이유로 끌려 다니고 그렇게 이 부두까지 오랫동안 격리시켰”다는 변명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진정한 성찰이라기보다는 소외감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기만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여전히 “물컹거리는 부두 어디든 있는 네게 뚝 떼어 보낼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 “부두”는 “나”인 동시에 “너”인 일종의 그림자 장소다. ‘너’ 없이는 이 ‘부두’도 없다. 그러니 당연하다 “애호박찌개가 달짝 끓는 부두를 떠낼 수 없는” 것은.
결국 이 택배는 ‘나’의 ‘마음의 상자’는 아닐까. 그것을 온전히 보내지 않고서는 ‘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운명을 가졌다. 나의 모든 노력은 “헛걸음질”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애당초 그것을 보낼 마음조차도 없다. 화자가 청테이프로 칭칭 감은 상자에는 그러므로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주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자에는 주소가 할당되지 않는다. 주소는 ‘그곳’ 혹은 ‘저쪽’의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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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옥 시인의 그림자 되기는 어쩌면 아직도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어쩌면 통째로 ‘저쪽’의 그림자로 존재하는 세계니까. 그림자에 누워 그림자로 살아가고자 욕망하는 삶은 불행하고 절망적이다. 어둠을 바닥까지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을 통해 김종옥 시인은 그림자의 세계가 단순한 이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확장된 차원의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점, 선, 면의 삼차원에 그치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운동을 포함하는 사차원의 세계까지 확장되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종옥 시인의 연작시의 제목 “그림자에 눕다”는 단순히 ‘눕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눕는’ 동시에 ‘일어서는’ 작용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김종옥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다. 삶은 그늘과 어둠의 세계에서 꾸는 꿈이 아닐까. 그 꿈에서 깨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철저하게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김종옥 시인이 건축해 내는 그림자의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결국 나의 김종옥 시인 읽기는 어떻게 ‘눕고’ 있는가, 어떻게 ‘누워’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어서고’ 있는가에 대한 오독일 뿐이다.
*한용국 200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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