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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소시집/최정란/장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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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소시집/최정란/장미 외 4편
장미 외4편
최정란
무성한 당신, 푸르다 못해 검은 당신
내가 덩굴에서 떨어져 내릴 때,
두껍고 단단한 어깨 잠시 빌릴 수 있을까
미처 다 마르지 않은 꽃잎들
마를 동안 머무를 수 있을까
나는 아주 가벼워서
당신의 어깨를 아주 조금만 차지할 거야
나는 아주 얇아서
아주 빨리 시들 거야
아마 당신 무심한 당신
아침마다 전쟁터로 달려나가는 당신
흠집 하나 없는 투구 위에
패배한 적 없는 청동의 방패 위에
온 힘을 다해 내가 뛰어내린다 해도
아마 모를 거야
몰라도 좋아 몰라야 해
모르게 할 거야
아주 오랜 후에
지상의 영광이 모두 지고 나서도
빛나는 금빛 이마는
자랑스런 목 위에서 여전히 빛나겠지만
홀로 우뚝 빛날수록
한숨 쉬며 당신 말하게 될 거야
문득, 언제인가
흐린 꿈속에
빛나는 줄 모르고 빛나던 한때를
가볍게 스쳐간
가시갑옷의 꽃 한 송이가 있었다고
너무 가벼운 장밋빛이어서
그 꽃이 당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찌르고 간 줄
그때는 몰랐다고
상추도둑
1.
겁이 많은 나는 웃기만 하네 잉크를 쏟은 듯 길가에 지천으로 핀 수레국화 한 송이 훔칠 용기도 없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 자꾸 웃음 속으로, 숨네 이 밭은 예상에 없던 풍경, 예상에 없던 장물을 에코백에 받아 담으며 예상에 없던 웃음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어, 웃네 준비된 장물애비처럼, 웃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배를 잡고, 웃네
2.
해바라기 핀 묘지로 가는 길, 여자들이 상추를 훔치네 걸리면 국제사법재판소 행일 거야 상추 몇 포기에 법정에 선다면 레미제라블의 기나긴 시간이 시작될까 여자들은 묘지로 가는 길 여자들이 손잡고 가는 길 무서울 것 없어야 하네 그 날의 태양을 오롯이 기억하는 해바라기는 어디에 피어 있을까
3.
몇 번이고 거듭해서 웃음소리를, 찍네 상추밭을 배경으로, 묘지의 담을 넘는 덩굴장미를 배경으로, 찬란한 죽음을 배경으로. 무모하게 클로즈업되는 웃음소리, 찍히네 아무 것도 훔치지 못하는 죽음이 고요히 누워,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가난한 오후 머나먼 묘지에서 해바라기 대신 상추를 만나듯, 무언가 만나, 사건이 되고 농담이 되네
4.
수확이 끝난 상추밭을 가득 채운 소리만 요란한 웃음, 들키고 들켜서 더 들킬 것도 없는 웃음은 어느 묘지의 장물일까 마지막 훔칠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일 듯 마음의 일만 평 푸른 상추밭, 통째로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 마음의 겉잎 한 장 훔치지 못해 안달하던 날이 아득하네 생의 농담도 무용담도 에피소드도 모두 묻힌 무덤으로 걸어가네 상추를 훔치는 천 년 전 여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덤으로 걸어가네
5.
상추이파리 같은 표정으로 푸릇푸릇 고백하건데 이번 삶은 웃음으로 얼버무린 날들이 많다네 겁이 많다는 것 들키고 싶지 않아 늘 웃음이 먼저 들킨다네 이번 생에 훔치고 싶은 유일한 것이 그대 마음이라는 것을, 상추밭을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을, 더 늦기 전에 들켜야 하네
슬픔의 지층들
꽃을 좋아하는 남자와 살았던 여자는 일이 많았다 아름다움이 자기 몫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허드레한 일을 여자에게 맡기고 집 밖을 나돌았다 아름다운 것은 대체로 집 밖에 있다는 듯이, 세월은 빨리 흘렀다
그 사이 넓은 미나리꽝은 돋우어져 집터가 되었다 밖의 아름다움을 향해 손 내미는 일에도 지쳤을까 집으로 돌아온 남자가 처음 한 일은 땅 주위에 수천 포기 해바라기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도 여자는 일이 많았다 아름다움을 뒷바라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 많았던 여자는 자주 아팠다
태양이 찬란한 금빛 성을 주겠노라 뒤늦게 남자는 여자에게 약속했다 그의 영역은 해바라기 울타리를 가진 성 안에서 굳건했고 여름 한 철 반짝 촘촘했다 가을이 오자 해바라기성은 빛나는 황금의 꽃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해바라기는 가을까지 화사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미나리꽝이 한 필지씩 팔려나갔다
이듬해 남자는 소국을 심었다 여름 한 철만 무성한 꽃이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을까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노란 꽃들이 듬성듬성 그의 남은 영지를 에워쌌다 꽃들은 키가 작아서 남자의 구멍 많은 성을 성답게 만들지 못했으나 띄엄띄엄 향기로웠다 뭐니뭐니 해도 아름다움은 향기를 가져야 해
아름답구나 꽃 위에 내리는 눈, 남자는 언젠가부터 혼잣말이 많아졌다 일이 많았던 여자는 자주 아팠던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미나리꽝을 돋운 땅도 모두 사라졌다 꽃을 좋아하던 남자는 그 후에도 오래 혼자 살았다 꽃과 일과 병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는 자주 서러웠다
삶을 해약할 수는 없어
보험을 해약해요
해약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약해요
파란 하늘도 해약하고
아직 봉오리인 꽃도 해약해요
변치 않고 기다리겠다는 밀약도 해약해요
손 내밀어 아쉬운 소리 할 관계들은 파기 된지 오래
다들 어찌 사나 몰라, 궁금해도
궁금해 할 수도 없어
보험을 해약해요
오늘 닥친 위험 앞에서 내일 닥칠 위험은
뒤로 물러서야 해요
오늘을 담보로 내일을 준비하라는 말은 잊어요
한 번 해약하시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보험회사 직원의 만류는 낮고 단호하지만,
한 번 해약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보험 뿐만은 아니어서
혹시 마음 바뀌면 어떻게 안 될까요,
능청스런 농담은 이럴 때 하라고 있지만
알아요, 마음 바뀔 일 없다는 것
보험회사 직원도 나도, 알아요
한 번 해약한 보험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인생을 해약하는 것보다는
보험을 해약하는 것이 손쉬워요
전화 한 통화면 되거든요
지나간 오 년의 불입을 파기하는데
다가올 오십 년의 보장을 파기하는데
오 분이면 되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단순하고 깔끔한 해약이라니
이 절차는 미학적으로 아름답기까지 해요
가슴을 쓸어내려요 정말 어쩔 뻔 했어요
해약 절차가 복잡했으면 정말 어쩔 뻔 했어요
삶을 담보로
남은 시간을 간편하게 불입하라는
유혹이 수시로 날아오는데
내일 대신 오늘을 선택하는 나를 용서하기로 해요
삶을 해약할 수는 없어
보험을 해약해요
슬퍼하는 이들의 수고를 짐작한다
아버지 상을 치르고 돌아와 아우와
칼을 들고 싸운다
내가 먼저 싸움을 걸었다
아우는 맞받아 우리는
전화기를 통해서 한껏 날카롭게 벼린 칼로
서로를 찌른다
서로의 급소와 약점을 알고 있는 우리는
치명상을 입는다
피투성이가 된 우리는
왜 싸웠는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유도 모르고 한동안 남처럼 소원하다
오래 묵은 서운함을 꺼내고
없는 험담을 지어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인데
세상에 나를 보낸 육친이 더 이상 없는 것 뿐인데
형제자매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우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동생 잘 돌보렴, 누나와 의논하렴,
늘 신신당부 하셨는데
우리는 슬펐다
부모 잃은 고아답게 깊이 슬펐다
많이 아주 많이, 심장이 터지도록 슬펐다
가장 만만한 사이끼리
말로라도 피를 보지 않을 수 없이 슬펐다
얇은 베니어판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작은 방처럼
분노와 슬픔은 이웃해 있다
분노와 슬픔을 켜는 스위치는 한 개
두 방 사이 벽에 뚫은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형광등처럼
슬픔이 켜지면 분노도 깨어나고
분노의 스위치를 누르면 슬픔의 식구들이 눈을 뜬다
<시작메모>
1.
성공을 향해 가는 행진에 작고 여린 꽃들은 보이지 않는다. 훈장과 투구와 완장과 갑옷과 창의 행진곡은 가느다란 자장가나 사랑의 세레나데를 짓밟고 지나간다. 시는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기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시는 달리는 어깨 위에 무수히 많은 작은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라서 이곳이 아니었다고 돌아설 때, 세상의 영광이 다 끝난 뒤에, 보일 듯 말 듯 흔적조차 없는 흔적으로 남기도 하는 시. 그제서야 삶이 시든 꽃잎만큼도 남지 않은 것을 알고 크게 슬퍼할 것을. 그대, 지금이라도 속도를 조금만 늦추면 어깨 위에 등 뒤에 뒤통수에 싱싱하고 향기로운 시들과 만날 것을. 아니 시가 되기 이전의 날 것의 삶, 장미의 꽃잎과 향기를 만날 것을.
2.
고흐의 무덤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를 지나면서부터 해바라기꽃과 밀밭과 까마귀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왼쪽 밀밭을 지날 무렵 오른쪽에서 일행 중 눈 밝은 하나가 발견한 로메인 밭. 수확이 끝난 뒤 듬성듬성 남았지만 먹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채소밭. 그는 망설임 없이 밭으로 들어가서 상추서리를 시작했고, 나는 어이없이 서 있다가 에코백을 벌려줄 수 밖에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싱싱한 상추쌈을 맛있게 먹었지만, 그 순간 작은 일탈의 재미보다는 판단상실의 아노미 현상이 커서 당황스러웠던가. 따지고 보면 당황스러울 것도 없다. 화가의 무덤을 향해 가는 우리는 실은 우리의 무덤을 향해가는 것 아닌가. 생의 시간은 그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옳았고 나는 틀렸다. 그는 삶을 알았고 나는 삶을 몰랐다. 삶은 그것을 맛보는 자의 것이었다. 사랑아, 너도 그렇다.
3.
꽃과 채소의 차이는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의 차이다. 근본적으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채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는 대신 먹을 것을 의탁한다. 꽃이 몇 단계 유통되면 먹을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인간의 생존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눈과 귀, 입 모두가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눈으로 귀로 즐기는 아름다움은 폄하되기 일쑤이던 시절이 있었다. 눈으로 귀로 먹는 아름다움을 위해 입을 만족시키는 생활을 소홀히 하는 동안 다른 사람의 손과 발이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누군가 꽃을 즐기는 동안 밥을 위해 수고하는 다른 누군가의 손과 발은 여전히 옳다. 그렇다고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르다는 것은 아니다. 꽃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역시 옳다. 눈과 귀가 즐기는 아름다움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꽃의 사람도 꽃을 함께 볼 사람이 필요하고, 밥의 사람도 밥을 함께 먹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은 없다. 어느 한쪽이 상대를 기다리지 않을 만큼 야박해서가 아니다.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4.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 광고 카피는 유명 연예인의 입을 통해서 티비 밖으로 무한 송출되었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험광고다. 여러 형태의 보험상품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보험은 내일의 리스크를 대비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위험을 오늘 조금씩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리스크가 미래의 리스크보다 더 클 때 보험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내일의 위험을 대비할 잉여 에너지가 없을 때 보험은 해약된다. 미래의 위기를 해결할 보험조차 없이 내일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오늘을 살아야 하므로. 그러나 노인들이 보험으로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컬하다. 늙은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어디 있다고. 이 광고는 티비 앞에 앉은 노인에게 불안감을 퍼부으며 그들의 푼돈까지 달라고 요구하고 세뇌한다. 그래서 볼 때마다 마음이 찜찜하다. 그리고 폭력적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니? 입 다물라는 것? 이건 독재 아닌가?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 중요하다. 현재가 하나하나 누적되어 미래가 된다. 카르페 디엠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5.
애도의 첫 단계는 거부, 다음 단계는 분노라고 한다. 오래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플까. 아픔을 견디는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들이 아주 많이 슬프기 때문이다. 오래 슬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얼마나…끝나지 않는 슬픔들이 있다. 영원히 아픈 사람도 있다. 그들을 지켜보고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몫이다. 상실에서 발생하는 슬픔과 분노는 사랑의 파생상품이다. 슬픔과 분노는 인접해서 발생한다. 때로는 교집합처럼 겹치기도 하고, 서로 구별하기 어려울 때도 많아 화나는 일은 슬프고, 슬픈 일은 화가 난다. 하나의 감정도 깊이 들여다 보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감정이 합해진 것이다. 색의 혼합처럼 감정도 혼합되어 다른 색이 되기도 한다. 아주 강한 감정 속으로 흡수되어 자기의 빛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분노는 어둠과 비슷해서 다른 감정들을 흡수하는 검정이 되기도 한다. 감정은 색의 혼합이어서 합해지면 혼돈과 분노의 색이 되는 경우가 많다. 원래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반면 시는 빛의 혼합이어서 모두 합해지면 흰색에서 무색이다. 모든 색을 낱낱이 디테일하게 구별하는 힘이 된다. 슬픔과 분노가 시가 될 때, 나는 감히 그것을 승화라고 입속에서 나지막히 우물거린다.
*최정란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애인』.
시산맥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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