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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최휘웅/어둡고 질긴 낭떠러지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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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최휘웅/어둡고 질긴 낭떠러지 외 1편
어둡고 질긴 낭떠러지
최휘웅
그녀 앞에만 서면 높은 산 바위 꼭대기에서 아찔한 곡예를 하는 기분이야. 왜 이렇게 민망해지는지 모르지. 아무리 파고들어도 봉긋한 봉우리를 더듬고 더듬어도 이 세상의 원망이란 원망은 다 끌어다 모은 그녀의 표정 앞에서 나는 벼랑에서 미끄러지는 낭패의 질감을 씹지. 아, 캄캄한 그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숨소리.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갱년기를 지나 겨울을 가고 있는 마른 낙엽. 금방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동공은 질긴 어둠을 헤매고 있어. 깊은 물속 알 수 없는 어느 지점에 닻을 내리고 있지.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격랑의 한가운데에서도 요지부동인 그녀. 꺾어진 등을 안고 나는 지금 벼랑을 오르고 있어. 마른 감정은 다독거릴 수가 없지. 손이 닿으면 금방 내려앉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세월을 탓하며 멍청한 안락만을 꿈꾸는 사이 그녀는 굽은 등만 남겨 놓고 사라지고 있어. 어둡고 질긴 낭떠러지 같은 등. 나는 오늘도 기어오르다 미끄러진 기분이야.
치매
오늘도 해가 뜨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림자도 없어졌네요
늘 따라다니던 한 부분이
아, 없어요. 내가 없어요.
이 세상 어딘가에
그림자만이라도 남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군요.
여보세요, 내 그림자 좀 찾아주세요
화산재에 묻혀버린 고대문명처럼
의식은 자꾸 화석이 되어가네요.
금화처럼 화려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완고한 골동품이 되었네요
이걸 깨진 쪽박이라고 하나요
잊혀진 과거는
지워진 미래와 같습니다.
그건 암흑인가요?
나는 지금 어둠 속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기억의 터널 속으로
나를 찾아 가고 있는데
별들이 깜박깜박 손짓하네요.
아직 막이 내리지 않아
무대를 떠날 수 없는 배우처럼
나는 시간의 벽에 갇혀 있습니다.
*최휘웅 1982년 월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간 《시와사상》 편집인. 계간 《부산시인》 주간. 시집 『카인의 의심』 외 다수. 평론집 『억압. 꿈. 해방. 자유.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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