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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경교/노을진 잠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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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경교/노을진 잠 외 1편
노을진 잠 외 1편
이경교
잠이 밀려온다 내 몸이 노을의 일부가 될 때, 잠도 바다 쪽으로 쏠린다 절뚝거리는 바다의 눈꺼풀이 한꺼번에 풀린다 진통은 잠을 자며 온순해지는지 노을 속에 몸을 뉘일 때, 노곤한 꿈도 저런 빛깔로 풀어지는지
노을이 세상의 낯빛을 바꾸는 동안, 꿈이 낯선 새처럼 날아와 나를 덮는다 내가 노을의 몸 빌어 붉어지는 동안, 바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섬들은 안부를 묻고, 바다는 그걸 받아 적는다 시퍼렇게 기록되는 문안편지들
기억도 출렁이며 잠을 자는지 꿈이 부풀어 무거워진다 파도가 이불처럼 풋잠을 덮어줄 때, 저 따스한 냉기로 내 몸은 덥혀지고, 초저녁 몸살이 노을에 붉게 물든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우목1925-1998 해방 직전 징용에서 탈출한 사내, 그가 거푸 인민군에 차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번엔 돌아오기 어려울 거라고 혀를 찼다 인민군에서 그가 어떻게 도망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던 걸까 하지만 그가 브레히트의 시를 읽었으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다 브레히트 대신 그는 부러진 쟁깃날을 갈아 끼우거나 물고기의 부레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물론 칠십 평생 작물을 키워 크게 히트한 적도 없다
그가 세상을 떴을 때, 두 번째 탈출의 비밀이 밝혀졌다 옻나무 줄기로 밑을 닦고 목숨과 내기를 했노라 그는 썼다 옻독이 오장육부를 적시고 혀와 눈동자까지 점령한 뒤 그는 옻독에 취해 죽었다고, 그것이 부활이었다고! 낡은 공책에 그는 적었다 그 눈으로 세상을 읽고 그 혀로 음식을 맛보며 끝내 부끄러웠던 걸까 그는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생의 마지막 몇 해, 그가 언어마저 잃고 음식을 거부한 이유였다
누구든 자기 분량의 비밀을 안고 산다, 산다는 건 그 비밀을 슬픔으로 닦아내는 일이다
*이경교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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