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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 이세영/줄탁똥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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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 이세영/줄탁똥시 외 1편
줄탁똥시 외 1편
이세영
보내준 통에 똥을 받아
우편함에 넣어두면 수거하겠다는
친절한 보건소 씨에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순순히 대답하고는
변비가 심해 일주일 기다릴 수도 있다고
성공하면 전화할 테니 기다리라고
힘주어 한마디 내놓지 못한 걸 후회했다
대체 내 대장은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똥 하나 제대로 조물거리지 못할까 궁금했는데
시기도 적절하게
우선 똥부터 한 번 살펴보자 하니
그걸로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야 할 판
변기에 앉아 대책 없이 배를 문지르다가
배설의 기억만 한 줄 떠올리고
실없이 배를 탁 쳐보기도 하는데
도무지 줄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아
계절에 맞는 시 한 편 보내라는 잡지사 압박에
온몸 땀으로 흥건한 채
품지도 않은 시를 낳으려고 끙끙대던 날
딱딱하게 굳은 시 몇 토막 보낸 굴욕만 생각나고
동강동강 시간은 잘도 잘린다
이렇게 살다가는 똥도 시도
기한에 맞춰 우편함에 넣어둘 일 없으니
얼른 가져가라고 큰소리칠 일도 없으니
마지막 소풍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시집이라고 했다
늙은 시인은 봄날 제자들과
꽃구경 하다가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아주고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봄 햇살이 쏟아졌다
떨어진 벚꽃이 바람에 쓸려갔다
그날 나는 먼발치에서
슬금슬금 책장을 넘기다가
멀어진 젊은 날의 혁명이
미련처럼 매달린 것을 보았다
빼앗긴 시간은
오려 붙일 수도 없고
옮겨 심을 수도 없다
다만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촉촉이 젖은 눈으로
걸어온 몇 발자국 적어보는 일
제자들 꽃 수다에 묻힌 표정이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서서
시집 첫 장에 써주는
마지막 소풍을 읽고
저녁놀이 잠깐 머뭇거리다 갔다
이세영 2015년 《문예연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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