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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조대환/고요한 나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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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조대환/고요한 나무 외 1편
고요한 나무 외 1편
조대환
목탄 화가 TV의 화면을 가득 메운다
클로즈업 시킨 화면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한 편의 수묵화가 뭉쳐졌다 풀어진다
검정빛의 나무와 회색 바닥 속의
타다 남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흰 연기를 뚫고 하얗게 표백되었다
벌건 얼굴을 한 방송기자가 나타난 순간
컬러 TV라는 구체적 개념이 확인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멀고 긴 날로부터 푸르고 울창했을 솔잎은 사라졌다
화마의 열기가 묻어나는 채 사라지지 않은 나무들이
의식 밖으로 사라져갔다. 흉측하기만 했다
오목하게 생긴 숯덩이로 변한 소나무들
각자의 방향으로 쓰러져 있다
참화를 받아들이기엔 꿈을 꾼 것만 같다
사시사철 푸르던 그때의 꿈이 무너져 간다
살아남은 나무의 뿌리에서 싹은 떠오른다
소나무는 잿빛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온 산이 눈물바다다
소녀상의 사진을 보며
신문에 실린 소녀상의 사진을 바라본다
소녀여 굵은 눈물방울 같은 아침이슬을 털고
낯선 산과 들과 바다를 건너와 그곳에 앉아 있는가!
쓰러질 지경이겠지만 의연하게 번져온다
얼레빗으로 말끔하게 빗어 넘긴 단발머리와
우뚝 솟아오른 너른 이마와 촉촉하게 젖은 두 눈과
동그란 콧잔등과 야무진 입술과 양 볼에
무엇을 말하려는지 언어들이 도톰하다
옷매무시 하나 흩트리지 않고 단정하게
무명 저고리와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채
소매 끝에 꼭 쥐고 있는 두 주먹은
백두대간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들을 원망하라 욕도 하라 침도 맘껏 뱉어라
그럴 값어치가 넘치고 넘치도다
아직도 천리만리를 걸을 수 있는 힘이 느껴지는
맨발을 바라보는 이 오라버니
피눈물 모두를 밝힐 순 없지만
이 땅의 오라버니들이여, 다시는 우리의 누이가
꽁꽁 언 땅을 맨발로 걸어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기르며 살 일이다
오라버니를 용서해다오.
이 몸이 부서지도록 지켜 줄 테니
조대환 2016년 《시에》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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