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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미니서사/박금산/암호 하는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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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156회 작성일 19-06-2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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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미니서사/박금산/암호 하는 연인



암호 하는 연인


박금산



이 대화를 당신의 연애 상황에 맞추어 대입하기 바란다. 상대를 기호 A로 표기한다. 자신을 B로 표기한다. B는 A를 사랑하고 질투한다. B는 사랑에 의심이 많다. A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까 봐 불안하다. B가 말한다.

B: 어제 뭐 했어? 점심 때?
A: 똑같았어.
B: 똑같다는 건 뭐야?
A: 점심 먹었어. 산책했고.
B: 영화관에 들어가는 걸 봤는데.
A: 그랬어? 따라오지. 혼자 봤는데.

B는 A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둘이 봤으면서 혼자 봤다고 말하는 A가 가증스럽다. B에게는 A를 추궁할 단서가 있다. B는 A가 흘린 영수증을 내민다. 두 좌석을 구입한 흔적이다. A는 스위트 박스 연인석에서 영화를 보았다. A는 영수증의 내용을 읽는다. B가 말한다.

B: 설명해 봐.
A: 어제 본 영화를?
B: 두 좌석을 끊었잖아. 스위트 박스. 누구랑 봤는지 얘기할 수 없다는 거야? 왜 나를 바보 취급 하는 거야?
A: 혼자 봤어.
B: 혼자?
A: 그래.
B: 점심은?
A: 혼자 먹었어.
B: 그런데 2인분 값을 결제했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바람난 거지?

결혼 전의 연인은 상대가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영수증과 신용카드 결제 내역을 어떤 식으로 몰래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부부로 살면 우연히 사생활 정보를 맞이한다. 나 역시 아내의 사생활을 존중하며, 의도적으로 영수증을 훔쳐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아내가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달라고 하기에 부탁을 들어주다가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그 발견에 이어서 아내가 내 곁에 앉아 전화기로 수신 메시지를 확인할 때 우연히 아내의 신용카드 결제 내역을 읽었다. 2인분 값을 낸 식당 영수증이었다. 두 명의 밥값과 두 명의 영화 티켓. 그렇다. 이건 나의 경험이다. 추궁할 단서를 제시하려고 보니 세부로 들어가야 하고, 세부를 이야기하자니 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아내는 밤에 일을 한다. 나는 낮에 일을 한다. 아내가 낮에 무엇을 하는지 나는 몰랐다. 나는 B, 아내는 A. 대화를 재개한다. A가 말한다.

A: (화난 목소리로) 훔쳐봤어?
B: (화난 목소리로) 우연히 봤어.
A: (화난 목소리로) 왜 훔쳐봐?
B: (화난 목소리로) 우연히 본 거야, 병신아. 왜, 누굴 만났는지 말하기가 구려? 나한테 죄 짓는 것 같아서 말 못하겠어?
A: (화난 목소리로) 말조심 해.
B: (화난 목소리로) 밥 먹고, 영화 보고, 또 뭐했어? 그 X랑!
A: (화난 목소리로) 입조심 해.
B: (화난 목소리로) 이혼하고 싶어? 원하는 게 그거야?
A: (화난 목소리로) 혼자 봤어! 혼자 먹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커피 마시고! 나도 그러고 싶었어.
B: (화난 목소리로) 말이 돼?
A: (화난 목소리로) 왜 말이 안 되니, 병신아, 쪼다 같은 놈아.

다행히 우리는 주먹질 같은 것을 교환하지 않았다. 나는 화를 냈다. 아내도 화를 냈다. 우리는 ‘화’를 주고받았다. 그 후 한 달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결혼생활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거금을 들여 아내의 사생활을 사찰했다.

아내가 영화관에 간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회사 일을 내팽개쳤다. 영화관으로 뛰었다.
아내가 보였다. 나는 아내를 관찰했다. 아내는 스위트 박스에 들어갔다. 스위트 박스는 두 좌석 사이에 팔걸이가 없는 연인석이었다. 아내는 연인이 앉을 자리에 가방을 툭 던졌다. 외투를 벗어서 휙 던졌다. 목도리를 풀어서 그 위에 던졌다. 부츠마저 벗어서 던질 기세였다. 아내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영화 볼 준비를 마쳤다. 아내는 졸리다는 듯 눈을 감았다. 광고가 지나간 후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가 끝난 후 아내를 미행했다. 아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밥을 2인분 주문했다. 밥이 나왔다. 아내는 빈자리를 마주한 채 밥을 먹었다. 1인분의 밥은 혼자 식어갔다. 왜 저러나? 돈이 안 아깝나……. 나는 아내 앞으로 가서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아내는 누구를 앉혀놓고 밥을 먹는 것일까. 밥을 먹은 후 아내는 맥줏집으로 갔다. 생맥주를 두 잔 시켰다. 한 잔을 빈자리에 두고 한 잔은 자기가 마셨다. 잔이 비었다. 아내는 빈 잔을 앞 사람의 술잔과 바꾸었다. 아내는 거품이 표면에 달라붙은 빈 잔을 상대하며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집에서 만났다. 나는 회사 일에 지친 사람 흉내를 내며 소파에 널브러졌다. 아내는 출근하려고 몸을 씻었다. 나는 B, 아내는 A. B가 묻고 A가 답한다.

B: 낮에 뭐 했어?
A: 영화 봤어.
B: 누구랑?
A: 혼자.
B: 밥은?
A: 혼자.
B: 맥주는?
A: 혼자.

B는 암호를 하는 것처럼 ‘혼자’를 되풀이한다. ‘혼자’란 무엇일까. A는 혼자 웃는다. 너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이다. B는 A로부터 받은 암호를 마음속에 넣는다. 깊이.



박금산 소설가. 여수 출생. 《문예중앙》으로 등단.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소설집 『생일선물』, 『바디페인팅』,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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