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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미니서사/김혜정/불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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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54회 작성일 19-06-2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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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미니서사/김혜정/불안하지 않다



불안하지 않다


김혜정



영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뼈만 앙상한 손가락으로 내 필을 건반 누르듯이 눌렀다. 영을 안았다. 영의 몸에는 풀기가 하나도 없었다. 물에 넣으면 금세 풀어지고 말 것 같은 가루처럼 얼굴도 창백했다. 빈약한 가슴에서 붓꽃냄새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걱정 말고 있어. 곧 연락할 테니까.”
영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도저히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눈으로 서 있는 영을 두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영이 오랫동안 신경안정제를 모아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나고 말면 영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영의 몸에서 나는 붓꽃냄새도 더 이상 의미가 없겠지.
나는 등을 돌려 줄행랑치듯 거리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내 지하 방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만이라도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까지 나는 야산 기슭의 빈 집에 숨어 있었다. 몸은 얼어붙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숲의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소리와 나뭇잎들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이 밝아오는 소리였다.
마침내 밤의 장막이 완전히 걷히고 해가 솟았다. 세상은 마치 이제 막 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느낌, 미풍이 살에 닿았다. 몸의 구석구석이 서서히 깨어났다. 다만, 악몽을 꾼 것일까.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살아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나는 어디로 갈지 생각했다. 아마 햇빛이 있는 동안은 나도 무사할 것이다, 라는 자기암시만이 나를 지켜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치지 않았고 더군다나 죽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곧 체포될 운명이었다. 다만 하루 연기되었을 뿐이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다만 하루가 연기되었다. 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라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나는 다시 나의 지하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라도 할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경찰에 가야만 했다. 가서 사실대로 말해야겠지. 사흘 전 새벽 고속도로에서 누군가를 치었다. 그건 단순히 사고였으며 차에는 나 혼자 타고 있었다. 이미 모든 알리바이는 만들어두었다. 왜 뺑소니를 쳤냐고 물으면 술을 마셨다고 말해야 한다.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차라리 지금 당장 경찰이 찾아와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초인종이 울리고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왜인지 모르게 미적거렸다. *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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