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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장편연재1/김현숙/흐린 강 저편 제1회/ 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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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장편연재1/김현숙/흐린 강 저편 제1회/ 설야
흐린 강 저편
제1회/ 설야
김현숙
서김제 IC. 고속도로 사인 보드의 지명을 보자 선뜩한 낯섦에 희연의 멀미기는 더욱 심해졌다. 귀성의 설렘을 대신하는 멀미기. 구정 전야의 교통 체증으로 목적지 도착은 근 너덧 시간이나 지연되었고 말이 고속도로였지 전날 종일토록 내려 퍼부은 폭설과 끝없이 이어지는 귀성 차량의 행렬로 인해, 도로는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희연을 실은 임시 운행의 관광버스는 엉금엉금 거의 기다시피 위험천만의 빙판길을 미끄러져 겨우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녀의 심신은 짠물에서 건져 올린 해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서울을 출발하면서부터 지녀온 심란스러움이 더욱 심한 멀미를 가져다준 것일까. 그녀는 몹시도 속이 메슥거림을 느꼈다. 따끈한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어 때와 장소에 도무지 맞지 않는 자신의 그러한 한가로운 생각을 지워버렸다. 시가媤家가 있는 이곳에 오면 늘 계절과는 관계없이 그녀가 느껴야만 하는 추위. 그것은 극도의 긴장과 불편함에서 오는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발생되는 한기인지도 몰랐다.
너무 늦은 시각인 탓일까. 구정 전야임에도 소도시의 겨울밤은 놀라우리만큼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깨에 둘러멘 제법 묵직한 가방의 무게를 느끼며 그녀는 새삼 자신의 행색을 점검해보았다. 허름한 갈색 앵클 부츠 속으로 그 끝을 쑤셔넣은 회색 울 바지, 그리고 약간 색이 바랜 듯한 큼직한 청색 방한 점퍼. 그 정도의 차림새면 이 도시 어디에서건 결코 두드러지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곳을 방문할 때면 그녀에겐 유별스레 돌출되고 싶지 않은 일종의 미묘한 위장심리가 작용하곤 했다. 그건 어쩌면 은연중에 남편, 경석의 검소한 취향을 따르고자 하는 그녀 나름의 배려일지도, 아니면 이 도시 곳곳에서 묻어나는 가난과 낙후의 피폐함 속에 재빨리 그녀 자신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피상적인 노력의 일환일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 두 가지가 다 혼합된 보다 복잡한 것일 수도 있었다.
차가운 눈바람이 이는 컴컴한 거리를 서성거리며 그녀는 뜨문뜨문 오가는 몇 사람의 행인을 통해 이미 마을로 가는 막차가 끊겼음을 알았다. 순간 그녀의 가슴이 이름할 수 없는 불안으로 마구 뛰놀기 시작했다. 몇 차례이던가. 이곳에 올 적마다 그녀가 부딪쳐야만 하는 심한 낯가림. 그러나 전엔 늘 경석이 곁에 있어 주었다.
“희연, 요번 설은 당신 혼자만의 호젓한 귀향이 되겠지. 식구 모두에게 내 대신 안부 전해주오.”
해외 연수차 서독에 머물고 있는 경석이 보낸 엽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내겐 결코 귀향이 아님을. 단지 서글픈 여정일 뿐. 희연은 자신의 내부에서 이는 그러한 사념에 으스스 한차례 몸을 떨었다.
경석은 늘 이곳에 오면 더욱 더 우울한 얼굴이 되곤 했다.
“소외와 편증偏憎에 의해 버려진 땅, 삼십 년 전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한치의 발전도 없는 곳이야. 출발점의 그 터미널부터가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아.”
그럴 때만큼은 희연 역시 경석으로부터 팔 하나의 길이만큼이나 거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경석이 자신의 고향에 대해 품고 있는 그 끈끈한 비애를 그녀는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노력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 사람의 진정이 아닐까. 그녀가 이 도시의 모든 빈곤과 결핍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거부감은 그녀로선 참으로 처치 곤란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어머니, 강 여사에게서 느껴지는 지역적 선입감이나 배타심하곤 또 그 성질이 좀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각별한 애정이 없는 낯선 대상에 대한 단순한 이질감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두운 길 저쪽에서 표시등에 불을 밝힌 빈 택시가 달려왔다. 막연히 치솟는 불안감을 누르며 희연은 긴장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우선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볼 일이었다. 구불구불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산길, 휘휘 휘감긴 적막한 어둠 속에서 흠뻑 눈을 뒤집어쓴 하얀 산야, 그리고 잇달아서 확 펼쳐지는 광활한 들판. 그것은 바로 그녀의 신행新行길이기도 했다.
“경석 씨, 아직도 멀었나요? 꼭 시베리아에 온 느낌이에요. 너무나 넓고 황량해요.”
희연의 동공은 낯선 세계에의 두려움과 초조감으로 한밤의 올빼미 눈처럼 크게 떠져 있었다.
“놀랍지. 이곳은 지독한 교통의 오지야. 해안선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도 말이야. 그 야단스럽던 새마을운동도 이곳만은 살짝 비껴가고 말았거든.”
신혼여행을 마치고 희연이 처음으로 경석을 따라 이곳에 오던 날 밤, 택시 안에서 놀라움으로 빳빳해진 희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경석은 그렇게 말했었다. 광막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과 맞닿아 있는 까마득한 지평선. 경석은 바로 그 지평선 너머에 자신의 집이 있노라 얘기했다. 그때 희연이 느꼈었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그러나 그 두려움도 이젠 그 두께가 많이 엷어져 있었다.
“손님, 눈 땜시로 더 이상은 들어가질 못 허것슈. 차가 눈 구뎅이에 처박히는 날엔 끝장이구만요. 여그서 그만 내리셔야 쓰겠으라우.”
끼익, 택시가 급선회를 하는가 싶더니 기사가 그녀를 향해 그렇게 투덜거렸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삼거리의 저수지 다리께였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겹겹이 둘러싸인 어둠과 강추위 그리고 무거운 짐보따리. 그녀는 막막함 속에서 한동안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마을까진 도보로 족히 사십여 분은 걸릴 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멈춰버린 택시 안에서 더 이상 무엇을 어찌해볼 것인가. 그녀는 잠자코 차에서 몸을 내렸다. 미끄덩미끄덩, 눈길을 더듬으며 그녀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저만큼 떨어진 곳의 나지막한 집채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희연은 안간힘으로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작고 초라한 주막이었다. 그녀는 뿌옇게 먼지 낀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목로를 사이에 두고 무어라 큰 소리로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 두엇이 힐끔 그녀를 훔쳐보았다. 들들들, 수동식 전화기의 손잡이를 돌리는 희연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어머님, 저예요. 지금 막 이곳에 도착했어요. 여긴 삼거리 주막인데요, 너무 어두워서요……. 네, 죄송합니다. 그럼 이따 들어가서 뵙겠어요.”
수화기를 놓고 돌아서는 희연을 향해 푼더분한 인상의 주모가 얼굴 가득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뉘 집 큰애기인고 혔드마는 안 마을 뉘 집 며느리던 게비여. 설 쇠러 왔구먼이라우.”
대답 대신 희연은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다지 아늑한 편은 아니었지만 바깥에 비해선 한결 포근하게 감싸 오는 실내의 공기가 얼어붙은 그녀의 심신을 조금씩 녹여주었다. K시에 도착할 때부터 언뜻언뜻 그녀의 뇌리를 스치던 삼년 전 그 신행의 일들이 다시금 흐릿한 영상으로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날 밤도 혹독한 강추위는 매한가지였다. 예외없이 택시는 삼거리에서 더 이상 못 들어간다고 버텼고 경석과 희연은 차에서 내려 어둡고 험한 눈길을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만 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야. 자, 우리 막 뛰어가자구. 내가 업어주지.”
“아, 그만둬요.”
희연은 그때 새색시인 자신의 불편과 짜증은 외면한 채 턱없이 기운이 펄펄 솟는 경석이 한없이 미욱스럽게만 여겨졌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아득히 뻗어나간 너무도 허허로운 광야였다. 한참을 마치 곤두박질치듯 그렇게 뛰어야만 했던 새색시 꼴은 자연히 말이 아니었다. 매서운 추위는 그녀에게 얌전한 색시 걸음을 허용치 않았다. 담홍색 두루마기 밑으로 드러난 한복의 빨간 치맛자락은 엉망으로 펄럭이며 짓이겨졌고 곱게 손질된 올림머리는 풀풀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경석이 자신의 외투 속에 둘렀던 모직 머플러를 꺼내 꽁꽁 언 희연의 얼굴을 감싸주었다. 얼마를 그렇게 더 달렸을까. 그들의 앞 저쪽에서 아른아른 원을 그리며 맴도는 희미한 손전등의 불빛을 따라 저벅저벅 힘찬 발짝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성님이오. 어허! 형수씨께 털장화를 신겨 오시랬잖혀요. 험한 길 오시느라 징그랍게 욕보시네요잉.”
새파랗게 얼어붙은 그들의 몸을 비추며 푸근하게 웃고 서 있는 사람. 그녀의 시동생 한석이었다. 이상하게도 희연은 그때부터 앞장서 길을 밝히며 걷고 있는 한석의 뒤를 따르며 더 이상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시요잉, 뜨끈한 보리물 한 잔 드시지라우.”
끈끈한 주모의 음성이 희연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 여긴 삼거리 주막이었지. 희연은 주모로부터 뜨거운 보리차가 담긴 스테인레스 주발을 건네받으며 그제야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우르르릉, 마을 쪽으로부터 굉렬한 오토바이의 폭음이 들려왔다. 깜빡 잦아들듯 하다간 점점 더 큰 음향으로 희연의 가슴을 향하여 돌진해오는 소리! 갑자기 그녀의 심장 부위에서 심하게 맥박이 뛰놀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그것은 마침내 엄청난 울림으로 완전히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를 덮어버리고 말았다.
“니 참 맘 고생 억수로 할 끼다이. 남의 집 맏이 노릇이 어디 그리 쉬운기가? 그라고 거기 사람들 독하다카는 거사 세상이 다 아는 긴데, 우야꼬, 니 마 버겁어서 우짜겠노.”
어머니 강 여사는 틈만 나면 희연을 바라보며 그렇게 걱정을 하곤 했다. 희연의 거듭되는 반란과 오랜 대립 끝 비로소 강 여사로부터 경석과의 결혼이 승낙된 이후, 그래도 강 여사의 입을 통한 ‘거기 사람’이란 어휘가 던져주는 고약한 뉘앙스는 그 기세가 많이도 숙져 있었다. 애초 경석을 향한 강 여사의 싸늘한 시선에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이유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첫째, 경석이 하필이면 강 여사가 가장 질색하는 거기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매파들간 거래에서도 그 인기 순위가 가장 하위로 처지는 빈농의 장남이라는, 경석이 가진 현실적 배경 때문이었다.
“우째 니는 세상 물정도 그래 모르노. 아이고 이 철부지야. 거기 사람이라카믄 니 아부지도 마 생전에 학을 떼시든 거 니 모르나.”
강 여사의 판단은 그렇듯 전혀 논리적인 근거가 없는 오직 편견에 의존되었을 뿐인 극히 원색적인 감정의 발로였다. 희연은 강 여사의 그 맹목적인 사고에 더없는 분노를 느꼈다.
강 여사의 지역감정은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도저히 희석시킬 수 없을 것 같은 짙은 농도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희연은 그것이 비단 강 여사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이 땅에 만연된 기류. 그 어떤 통계학적인 수치나 사회과학적인 자료에 의한 것이 아닌, 단지 세상의 오랜 통념에 의해 굳어져온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고질적 고정관념이었다.
희연이 경석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왠지 한 그루의 쓸쓸한 미루나무를 생각했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받기 전, 조그만 번역 사무실에서 알바 일을 할 때였다. 경석은 이따금씩 그녀의 사무실에 들러 자신의 회사 업무를 처리해가곤 했다. 늘 조용하고 어딘가 좀 그늘이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검고 마르고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몸피에서는 뭉클 향토적인 체취가 풍겨 나오곤 했다.
그러나 그는 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그 가지를 흔들 줄 모르는, 속살거리는 미풍에도 전혀 그 잎사귀를 흔들지 않는 참으로 이상스러운 한 그루의 미루나무였다. 희연은 어느 날 소리 없이 그의 나무 밑으로 다가가 살며시 가지 하나를 흔들어보았다. 그림인 듯 정지해 있던 녹색의 이파리들이 어느 한순간 바스스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분명히 흔들렸어. 소리를 낸 거야. 희연의 가슴엔 싱그러운 파문이 일렁거렸다. 경이, 그리고 기쁨과 함께 그녀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릉그릉!”
주막 바로 앞에서 오토바이가 멈춰 서고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한 덩어리의 찬바람을 안고 한석이 주막 안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희연이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애매한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순간 한석을 처음 만났던 그 여름날의 일들이 빠른 속도의 필름처럼 그녀의 기억 속을 스쳐갔다.
그날은 모처럼의 연휴를 맞아 경석과 함께 근교의 야산을 찾기로 한 날이었다. 한껏 경쾌한 차림새로 경석을 만나러 나간 희연은 거기서 처음으로 한석을 보았다. 선이 굵고 거무스름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이, 경석의 차분하고 유순해 보이는 인상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작은 키에 탄탄한 체격 그리고 의지로 똘똘 뭉쳐진 듯한 다부진 인상의 청년이었다. 희연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탁 튕겨져 나올 듯 무섭던 눈빛. 그것은 강한 반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그 즈음 오랜 시간을 통한 단식으로 몹시도 말라 있었다.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그는 체중 감소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경석과 함께 자신의 입대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그는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한석인 우리 집의 희생양이죠. 하지만 그애의 하는 짓이 너무도 기특하고 대견해서 늘 고마울 뿐입니다. 녀석은 내 인생의 과제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한 경석의 말을 들으며 희연은 섬뜩하리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한석의 영상을 되새겼다. 마을의 청년회장에다 군에서 단 한 명 뽑힌 영농후계자라는 한석. 그의 철벽 같은 의지와 강한 눈빛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끈끈한 잔영으로 남아 있었다.
“타쇼!”
흡사 빼앗다시피 희연의 짐을 자신의 오토바이에 옮겨 실은 한석이 추위 속에서 아드득 몸을 떠는 희연을 향해 그렇듯 퉁명스러운 한 마디의 말을 내뱉았다. 부르르릉, 희연이 올라타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오토바이는 달려갔다. 희연의 몸이 기우뚱, 한쪽으로 쏠리며 자칫 굴러떨어질 듯 균형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한석의 안장 밑으로 대롱처럼 동그랗게 튀어나온 작은 철제 손잡이를 꽉 움켜잡으며 한석의 등을 노려보았다. 차가운 가죽 점퍼에서 뿜어나오는 섬뜩한 냉기가 그녀의 코앞을 가로막았다. 꽤나 고약한 밤이었다. 그녀는 그만 푹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오토바이는 전속력을 다해 바람처럼 윙윙 마을 고샅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사시사철 그 색채와 풍광이 바뀌는 변화무쌍한 길. 그 길의 양편으론 끝없이 넓은 들판이 널려 있었다. 오월이면 보리밭의 푸르름이 하냥 싱그러운, 칠월이면 나락 냄새에 정신이 다 몽롱해지는, 그리고 시월이면 온 누리에 부신 황금 물결이 탐스러이 일렁이는 들녘. 그러나 희연은 늘 그 길 앞에 서면 천 근 무게로 짓눌러오는 중압감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것은 시커먼 공포와 험난함으로 다가왔던 신행의 그날 밤 이후 생겨난 기이한 증세일는지도 몰랐다. 경석은 아무리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도, 그리고 아무리 강한 한파 속에서도 결코 차를 타고 마을 고샅길을 통과하는 법이 없었다.
“이건 우리 마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야.”
경석은 자신의 그 외곬적 행동에 대해 그렇게 해명하곤 했지만 그의 자기 고향에 대한 잠재적 고착심리는 때때로 아주 고질적인 성향을 나타내기도 했다. 경석은 현대의 첨단기술에 의존한 모든 문화적인 것에 적응함에 좀처럼 가속성이 붙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결혼 전 희연은 그러한 그의 면모를 검약이란 이름으로 꽤 높이 사기도 했지만 때론 지나치리만큼 고답적이라고 여겨질 때도 많았다.
덜커덩, 오토바이가 한바탕 요동을 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휘익 눈에 익은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경석이 유년기에 심었다는 한아름 두께의 수양버들이었다. 사립문을 지키는 수굿한 자태가 언제 봐도 듬직한 집지기였다.
“아가, 왔냐? 추워서 어쩐다냐?”
시모와 이웃에 사는 큰시누이, 순옥의 가족들이 왁자하니 마중을 나오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이젠 낯익은 그러나 여전히 타인 같은 느낌으로 그 거리가 좀체 좁혀지질 않는 서먹한 얼굴들.
“갸는 뭔 공부를 고렇큼 오래 헌다냐? 싸게 돈이나 벌어 지 동상들 뒷바라지헐 생각이나 히얄틴디. 그려, 몸은 건강하디야? 대체 언지나 올 것이랑가?”
시모가 치마 꼬리를 잡아당겨 눈가를 닦아내며 경석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네, 아마 빠르면 내년 봄쯤엔 귀국할 수가 있대요.”
그르르릉, 희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당으로부터 또 한차례의 요란스런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못한 듯 희연을 털썩 마당가에 내려놓고 더 이상 소리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한석이 또 어디론가 마실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또 술 마시러 간당가? 에그, 속 창시를 다 녹일려는 게비여.”
시름에 찬 시모의 끌탕은 어수선하던 방 안의 분위기를 일시에 가라앉히고 말았다. 시모의 가슴 저 깊은 곳엔 둘째 아들 한석에 대한 저승에 가서도 못 잊을 뼈아픈 한이 굽이굽이 서려 있으리. 근자에 와서야 희연은 시집의 내력과 함께 그러한 시모의 마음까지도 어느 정도는 가늠해낼 수가 있었다. 경석 또한 오랜 객지 생활을 통해 거의 독학이다시피 어렵게 학업을 마쳤건만 그래도 배운 자식과 못 배운 자식에 대한 시모의 마음이란 애초에 비교조차 할 것이 못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석에 대한 시모의 애정은 유독 더 짙은 빛깔로 나타나곤 했다.
지난해 봄 오랜 지병 끝에 세상을 뜬 시부는 칠대 독자의 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다 신체마저 더없이 병약했던 까닭에 자식들의 교육엔 일체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기를 쓰고 대학을 졸업한 경석과는 달리 한석은 계속 기울어만 가는 가세 속에서 고교 진학을 향한 그의 꿈마저 포기한 채 자신을 그만 논두렁 속으로 내던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형 경석을 생각하는 한석의 마음은 워낙 각별한 데가 있었다. 늘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던 형, 경석의 모든 성적표와 일기, 상장 등을 먼지 낀 상자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기특한 동생이었다.
어슴푸레한 박명을 헤치며 첫닭이 울고 있었다. 음력 설의 아침이었다. 꼬끼오, 새벽의 고요를 여지없이 뒤흔들고 마는 청승맞고도 생급스러운 주파수! 희연은 전신에 돋는 닭살 같은 소름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고달픈 인생살이의 기상나팔과도 같은 비장감과 처절함이 배어나는 닭 울음소리. 그건 이미 그녀에겐 생경한 음향이 아니었다. 얼깃설깃 서까래가 그대로 윤곽을 드러낸 낡은 천장벽지에 누렇게 쥐 오줌이 번져 있는 신방에서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들었던 바로 그 소리! 희연은 후두둑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매서운 한파였다. 희연은 내장까지 덜덜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삐그덕, 부엌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침한 부엌 한구석에서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꼿꼿한 자세로 키질을 하던 시모가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한치의 가식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자연인의 미소. 삶 그 자체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엄숙함, 경건함으로 일생 행해왔을 신성한 부엌의 의식. 그것은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눈물겨운 성실성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리라.
“언니, 뭐더러 이렇큼 일찍 일어났디야”
새언니와의 상견을 위해 친정에 온, 희연과 동갑인 둘째 시누이 인옥이 땔감용 볏짚을 한아름 안고 씽씽 바람을 날리며 부엌으로 들어서다 그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어서 헛간 쪽으로부터 전이 가득 담긴 커다란 채반을 받쳐들고 막내 시누이, 혜옥이 또 그 모습을 드러내자 부엌은 일시에 생기로 가득 찼다.
거칠고 고된 삶의 그늘마저 그들의 강인한 생활력 속으로 모조리 용해시켜 오직 밝음 쪽으로만 가꾸어가는, 가을철 배추 줄거리처럼 대차고 싱싱한 시누이들의 모습에서 희연은 새삼스런 경이감을 느꼈다. 대체 쇳가루를 먹고 사는 것일까. 때때로 그녀는 시집 식구들의 무쇠 같은 강인함에 내심 너무도 놀라곤 했다. 그럴수록 자신에 대해 느껴지는 상대적인 무력감은 더욱 더 커져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마치 움직이는 마네킹처럼 부자연스럽게 삐그덕거림을 깨닫는 것이었다.
“아가, 지푸락을 거꾸로 때면 못 쓰는 벱이여. 후제 애 낳을 때 고상헌디야.”
치솟을 듯 아궁이 밖으로 마구 넘실거리는 성난 불길 앞에서 그녀는 그만 쩔쩔매며 정신없이 부지깽이만을 휘저을 뿐이었다. 시모의 자상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우선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만이 급선무였다. 매운 연기 탓일까. 급기야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연기를 핑계로 조금쯤 후련하게 울어버리는 일이란 모든 것에 설고 설어 괜스레 서럽기만 하던 새색시 때부터의 습관성 생리 현상 같은 증세였다.
“아구메, 이게가 뭔 냄새여? 밥 타는 냄새 아니여? 형수씨, 불 좀 에지간치 때시요잉. 설날 아침부터 누룽지 잔치를 혀야 쓰겄소.”
세수를 하려는지 수건을 목에 걸고 막 부엌으로 들어서던 한석이 마구 소리를 지르며 과장된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아가, 욕봤다. 이제 쪼깨 쉬도록 혀.”
차례 절차가 끝난 후 아침 나절부터 줄이어 들이닥친 세배꾼들의 치다꺼리로 하루 종일 부엌에서 헤어나질 못하던 희연이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서야 겨우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시모가 딱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희연을 도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열심히 부엌일을 거들어주던 시누이들도 잠시 어디 이웃엘 갔는지 집안은 매우 조용했다.
“나는야~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걸걸한 톤으로 구성지게 뽑아올리는 한석의 음성이 토담을 넘어 울려왔다. 아침에 한 패의 세배꾼들에 묻혀 집을 나간 한석은 밤이 이슥해진 그제서야 돌아오고 있었다. 우당탕, 어느 결에 콩 튀듯 토방을 뛰어넘어 한석의 몸이 방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아랫목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온기로 나른하게 풀어져가던 희연의 몸이 순식간에 다시 굳어져 갔다.
“에그, 그놈의 술 좀 엔간치 마셔라잉. 시상에 참말로 폭폭혀서 못 살겠당께.”
방 한구석에 머리를 박고 비스듬히 쓰러지는 한석의 어깨를 들어올리며 시모가 애절한 탄식을 쏟아내었다.
“엄니, 지가 술도 안 마셔불면 뭔 재미로 산다요? 암시렁 안 혀요. 너무 속끓이지 마시랑께요.”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한석이 자조 섞인 푸념을 토했다.
“엄니 전 절대 장개는 안 갈 것이요잉. 엄니 큰아들을 좀 보시요잉. 이 마을에서 젤로 떠르르한 수재에다가 더읎이 착헌 아들이었지라우. 헌디, 장개를 든 담부텀 그거시 다 엄니를 위혀서 뭔 소용이 있읍디여. 다 소용읎는 것이랑께요. 아, 그라고 그 뭐시냐, 아파트를 사줄 돈도 인저 우리 집이는 더 이상 읎잖어요. 또 우리 형수씨 맹키로 아파트 사달라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어찐다요. 안 그려요, 엄니?”
한석의 말은 주정이라기엔 너무도 그 논리가 정연하고 앞뒤가 분명한 것이었다. 애꿎은 사과 껍질만 작살나도록 짓이기던 희연이 반짝 고개를 들며 한석의 얼굴을 정시했다. 진작부터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해온 팽팽한 위기감 속에서도 그녀는 되도록이면 한석과의 정면충돌만은 피해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이미 한석 쪽에서 먼저 시작을 해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자신의 마음이 밑으로만 착 가라앉음을 느꼈다.
“도련님, 말씀 좀 삼가주세요.”
“그려요. 지는 원캉 무식헌 놈인께요. 헌디, 지 말들이 틀렸으라우?”
한석이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벽에 기대며 희연을 쏘아보았다.
“야가 참말 워째 이래쌓는다냐? 그만 혀, 지발. 아가 넌 후딱 저 방으로 건너가 자도록 혀라. 어여!”
희연의 등을 밀어내며 시모가 안타까운 얼굴로 한석을 나무랐다.
“엄니, 전 형헌티 참말로 섭섭한 점이 많당께요. 외국에 가서도 집에는 편지 한 장이 읎어요. 사람이 완전히 변해부렸는 게비여. 혼사 때 아파트를 사야 헌다고 아부지를 조를 때부텀 다 알아봤지라우. 꼭 뭣에 홀린드키 쌩판 딴 사람이 되얏드라니께요. 뭣에 홀렸는가 홀려도 단단히 홀렸드만요.”
“야가 참, 매칼없는 소리 좀 작작 혀라잉. 술 퍼먹고 매급시 이게 뭔 짓이다냐?”
계속되는 한석의 공박에 하얗게 질린 희연의 귀에 끈적하게 젖은 시모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한석의 울분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형은 말이요잉, 서울서 대학을 댕기던 그 어려운 시절에도 말이요잉, 절대 집에다가 손을 내미는 벱이 없었지라우. 아, 그라던 형이 오죽허면 저럴까 싶은 맴이 들어 지가 아부질 빡빡 졸라 삼동네 돈 다 끌어다가 아파트 값을 구했지라우. 그 해 우리 집 농사는 완전히 거덜이 났응께요.”
“인자 좀 지발 그만 혀라잉. 취혀도 쪼깨 분수 있겠코롬 취혔어야지, 위아래도 읎이 이게 뭔 일이다냐.”
시모가 드디어 한석의 등을 쾅쾅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엄니, 죄송혀요. 지가 취혀긴 쪼깨 취혔나봐요.”
살충제의 분무기처럼 집중적인 위력으로 마구 희연을 향해 뿜어내던 한석의 울화가 갑자기 뚝 멈추었다. 상체를 벽에 의지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잠자코 침묵만을 고수하던 희연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의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불현듯 그녀의 눈앞에 결혼을 앞둔 초가을의 어느 날 현찰이 가득 담긴 커다란 가방을 들고 몹시도 초췌한 얼굴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경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 집값을 좀 마련해왔습니다. 저희를 위해 이 돈에 합당한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구해주십시오.”
어머니, 강 여사를 향해 그렇게 말하던 경석의 웃음기 없던 메마른 얼굴! 그날 경석을 배웅하고 돌아오며 희연은 기운없이 축 늘어진 그의 어깨가 마음에 걸려 집 담벼락에 이마를 대고 얼마나 혼자서 아픔을 삼켰던가. 그녀는 그때처럼 어머니를 혐오한 적은 없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는 희연에게 결국 백기를 들어야만 했던 강 여사는 최종적인 결혼 승낙에 앞서 또 한 가지의 강력한 요구조건을 내세웠었다. 그것은 어쩌면 끝내 그들의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 쪽을 희망했던 강 여사의 마지막 히든 카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파트도 하나 없이 우째 새살림을 시작한단 말이고? 내사 마 절대 그래는 몬 시킨다.”
펄펄 뛰는 희연의 반대 의사는 제쳐두고 강 여사는 자신이 직접 경석과의 비밀 접촉을 시도했다. 그 당시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협상이 오간 것인지 희연으로선 도저히 다 알 길이 없었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강 여사의 제안은 별 무리 없이 통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15평짜리의 작은 서민 아파트였지만 그것은 강 여사로 하여금 더 이상 그들의 결혼에 이의를 달 수 없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버팀목이란 바로 다름 아닌 피와 땀으로 얼룩진 한석의 노동의 대가로 이뤄진 것이라니! 이 잘못 뿌려진 오류의 씨앗을 어찌해야만 옳단 말인가. 모든 것은 자신에 대한 강 여사의 철저한 과보호가 빚어낸 결과였다. 희연의 얼굴이 짙은 납빛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비록 다리 밑에서 거적을 깔고 살아간다 해도 그녀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새로이 시작하고만 싶었다. 일순 그녀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스쳐갔다.
“어머님, 전 아파트 문제가 이토록 집안에 큰 파문을 일으켰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서울에 가면 빠른 시일 안에 아파트를 내놓겠어요. 그리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희연의 나직한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무섭게 부릅뜬 한석의 두 눈이 돌연 희연을 향해 불을 뿜었다.
“형수씨, 참말로 고렇큼 나오시기요잉? 아, 시방 누가 돈 갖고 따지는 것이간디요? 지가 말혀고 싶은 것은 바로 사람 사는 도리와 경우에 관한 문제요잉. 아시겄어요? 사람을 고렇큼 너무 무시허면 못 쓴당께요. 워째 사람 맴을 고렇큼 모른다요? 참말로 환장해 죽겠구만이라우. 참말로 너무 허요, 너무 혀.”
한석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펑펑 내리치더니 꺽꺽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건 울음이라기보다 차라리 절규에 가까운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에그, 이 딱한 것아. 에미 애비 잘못 만나 에러서부텀 빽따구 아프게 일만 했응께 니 속인들 오죽혔겄냐? 안다, 알아. 에민 니 속 다 알어.”
풀썩, 한석의 등 위로 몸을 던지며 시모마저 절절한 울음판을 장만하고 있었다. 아, 이 일을 어쩔 것인가. 희연은 질식할 듯 막혀 오는 가슴을 붙안고 소리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대문을 벗어나 꽝꽝 얼어붙은 채 희뿌옇게 그 형체를 드러낸 도랑가의 짚가리 뒤에 몸을 숨겼다. 내가 왜 이곳에 혼자 있는 것일까? 웅크리고 주저앉은 그녀의 가슴이 감당키 어려운 통증으로 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픔이 아직도 방에서 울고 있을 시모와 한석, 두 사람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오직 남편 경석을 생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찌하여 경석이 도시의 화려한 거리에서 환하게 웃음지을 수 없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저마다의 크기와 빛깔로 명멸하는 수많은 별들. 그 별만큼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일이 이토록 쉽지 않은 일인가. 결혼식 전날 밤 강 여사는 희연을 향해 마지막 다짐의 말을 잊지 않았었다.
“니 좋아 택한 길 아이가. 우짜든지 찍소리 말고 탈없이 살아야 한데이.”
그렇게 말하며 강 여사는 희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었다. 지난 겨울, 온 나라가 용광로처럼 들끓어대던 거국적인 대통령 선거 때 강 여사는 우정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내사 마, 니캉 우리 사위 생각해서 무조건 거기 사람 찍을란다. 그래 알고 있그래이.”
강 여사의 전화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논리성 없고 단순하기가 마치 어린아이 같던 강 여사의 맹목적인 자식애 앞에서 희연은 그만 할 말을 잃었었다. 지역감정이란 그렇듯 아무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경우처럼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그리고 그다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 가변적인 것, 다만 자신들의 실리와 유익을 위해 그것을 적극 필요로 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고 감염되어 마침내 전염병처럼 급속도로 번져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역감정의 실체일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희연은 끝없는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곧 새벽이 올 시간이었다. 첫닭이 울기 전에 눈이라도 좀 붙여야만 할 것이다. 아침이면 그녀는 또 서울을 향해 출발해야 할 사람이었다.
다음 날 아침 희연이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짐보따리에 더 넣고 덜어내고 하는 시모와의 실랑이 속에서 희연이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한석은 또 어디론가 훌쩍 나가버리고 없었다. 끝내 이렇게 헤어져야만 하다니! 희연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겨울답지 않게 확 풀어진 날씨는 왠지 그녀의 기분을 더욱 맥풀리게 하고 있었다. 시집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끝낸 그녀가 막 마을 고샅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위윙, 나는 듯한 속력으로 한 대의 오토바이가 그녀를 향해 질주해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 한석이었다. 애써 희연과 눈길이 마주침을 피하며 그는 심히 무렴한 낯빛으로 말없이 희연의 짐을 자신의 오토바이에 옮겨 실었다.
“타시죠.”
그는 희연을 향해 전에 없이 깍듯한 표준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를 태운 오토바이는 살같이 빠른 속도로 기차역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더없이 든든하고 믿음직한 한석의 등. 신행의 그날 밤 힘찬 걸음으로 마중 나와 어두운 길을 밝혀주던 시아제가 아니던가. 헤어질 때면 늘 삼거리에서 만나지던 그의 물기 어린 눈동자와 외로운 모습, 그러나 서울만 가면 희연은 그를 잊었다. 안간힘으로 움켜쥐며 아성의 높은 벽을 쌓아온 이기의 세월. 그것을 감히 부인할 수는 없으리. 희연의 가슴속 어느 귀퉁이로부터 한 덩어리의 자책감이 거품처럼 부글부글 괴어올랐다. 저만큼에서 삐익, 기적을 울리며 서울행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말없이 플랫폼까지 따라나온 한석이 그녀에게 한 장의 차표를 건네주었다. 얼굴 가득 쓸쓸함이 깃든 한석을 향해 그녀가 따뜻한 웃음을 보이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자, 악수 한번 해요. 우리에겐 살아온 세월보다 앞으로 함께 살아야 할 더 많은 시간들이 있을 거예요. 도련님에게 진 많은 빚, 언젠가는 꼭 갚게 될 날이 오리라 믿어요.”
“빚은 뭔 빚이다요. 넘넘찌리도 아닌디…….”
꽤나 머쓱한 얼굴로 한석이 마지못한 듯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주춤주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창 밖의 한석이 무르춤한 자태로 플랫폼에 가만히 서서 열차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바로 저 얼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러나 서울만 가면 다시 또 금방 잊고 말지도 모를 얼굴! 그러나 어인 일일까.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이제껏 전혀 느껴보지 못한 아주 색다른 통증으로 미어질 듯 아파오기 시작한 것은. 그녀는 이제서야 겨우 자신이 막 골고다의 길 초입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다음호로 계속)
김현숙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단편: 골고다의 길). 1989년 《현대문학》 신인상 추천완료(단편: 어둠, 그 통로). 작품 「출모」, 「삼베 팬티」, 「어두워지지 않는 밤」, 「가지 않은 길」 ,「꽃비 내리다」, 「홋카이도 3월의 눈」, 「와디」, 「히스의 언덕」등 다수. 2002년 소설집 『하얀시계』 출간 (휴먼 앤 북스), 2010년 소설집 『노을 진 카페에는 그가 산다』 출간 (도서 출판, 개미), 2013년 장편 『먼 산이 운다』출간 (문학나무). 2010년 제 14회 이화문학상 수상, 2012년 제 1회 아시아황금사자 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3년 제 10회 한국문협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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