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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단편/윤동수/물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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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289회 작성일 19-06-2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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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단편/윤동수/물 도둑



물 도둑


윤동수



여자가 흥분하면서 그의 머리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닷새째 퍼붓던 초여름비가 한풀 꺾였다지만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양철지붕을 투닥대는 빗소리를 뚫고 뒤꼍에서 여자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고 씨, 기시우? 못 들은 척했다. 폐가에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었다. 뒷길 건넛집 뽕잎 할머니가 빗속에 나들이 했을 리 만무했다. 여든 셋 먹은 남편에게 주먹다짐이라도 당하면 여자 노인은 평상에 걸터앉아 영감태기 욕을 해가며 큰딸네로 내뺄 궁리를 했다. 고물 씨 집에 기셔? 종점슈퍼 주인 여자다. 저 여자가 어인 일일까. 강산마을에서 그가 고 씨로 통하게 된 건 여자 때문이다. 일 톤 트럭에 실린 중고냉장고, 경운기엔진, 양수기 전기모터 따위 고물 몇 점을 보고 고물수집상으로 넘겨짚은 여자는 대뜸 고물 씨로 칭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고 씨로 못을 박았다. 여자가 함부로 성을 갈아치웠어도 그는 화를 내거나 자신의 성 씨를 굳이 밝히려들지 않았다. 팔순 노인이 대부분인 강산마을에서 그를 고 씨로 부를 이들은 젊은 축에 드는 꼽추이장과 그의 불알친구인 자칭 오입쟁이뿐이었다. 폐가에 기어든 처지에 박 씨면 어떻고 고 씨면 어떤가. 모름지기 투명인간 취급해주면 고마울밖에. 고 씨 안에 기시지? 여자 목소리가 커졌다. 앞마당도 아니고, 살구나무가 굽어보는 수도계량기가 있는 뒤꼍에서 들린다. 이상하다. 거긴 어인 걸음인가. 고 씨, 안에 기신 거 다 안다니까. 여자는 기어코 얼굴을 볼 작정인가. 여자가 이따금 폐가에 발걸음을 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여자의 걸음새는 뽕잎 할머니와 확실히 달랐다. 뽕잎 할머니는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손바닥만 한 고추밭에 멋대로 약을 치기 일쑤였다. 볕 좋은 날은 문짝 없는 대문으로 들어와 젊어서 매달렸던 뽕나무와 누에치기를 미주알고주알 속살거렸다. 그에 비해 종점슈퍼 여자는 뒤꼍으로 스며드나 휑하니 뚫린 대문으로 들어오나 좁은 마당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총총히 멀어져갔다. 마치 속치마가 서걱대듯 혼자걸음 소리만 남기고 말이다. 그는 방안에서 낌새를 챘건만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어차피 담도 대문도 없는 폐가였으니 누군가 구르는 낙엽처럼 스윽 스쳐지나갔더라도 그러려니 했다. 여자는 언제나 자작자작 발걸음 소리만 흩뿌리다 사라졌지 오늘처럼 고물 씨하고 부른 적은 없었다.
요, 요상한 거이 무엇인고?
수도계량기 뚜껑을 훌렁 뒤집은 여자가 손으로 잡아챈 건 호스였다. 한손엔 분홍우산을 받쳐 들었다. 여자가 난데없이 가래떡 다루듯 호스를 아래위로 흔들어댔다. 그의 발치에서 뱀처럼 꿈틀대는 그것은 그가 수돗물을 받아먹는 식수 호스였다. 여자는 호스를 채찍으로 착각한 걸까. 여자는 움켜쥔 호스를 후려치기라도 할 기세로 휘두르며 그를 향해 무어라 무어라 지껄여댔다. 그는 노기서린 여자의 손동작을 주목했다. 여자가 호스를 움켜쥐고 흔들어대는 게 아니라 그의 사타구니를 틀어쥐고 용을 쓰는 느낌이 들었다. 한손에 움켜쥔 호스를 채찍을 휘두르듯 불쑥불쑥 앞으로 내지를 때마다 그는 사타구니께가 얼얼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자고 여자는 비 오는 날 호스를 흔들어대는 걸까. 여자가 여봐란 듯이 시위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까지 그는 여자가 내뱉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중충한 날씨에 돌올한 분홍색 우산은 을씨년스러움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호스를 사납게 흔들어대는 여자의 행동은 까닭 모를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랬다, 여자는 온몸을 다 바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고 씨,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으셔?
여자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제야 그는 호스와 더불어 활개 치던 여자와 눈을 맞추었다. 머릿속에 무언가 출렁인다고 느꼈다. 물이었다. 물결 따라 춤추는 여자의 몸부림…무당이 굿하듯…단순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비를 맞으며 여자가 호스를 채찍처럼 휘둘러대는 까닭을 알아야했다.
이거 분명히 물 도둑질이야. 여자는 수도계량기 뚜껑을 발로 걷어차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고 씨, 내가 부녀회장으로 있는 한 물 도둑질은 용납 못해.
아, 물 도둑질….
그는 중얼거렸다. 물 도둑은 귀에 설었다. 인삼밭을 털거나 수확한 고추를 훔친 도둑이 잡혔다는 소식은 종종 귀동냥 한 적 있었다. 물을 먹는 게 도둑질인 줄은 몰랐다. 남한강이 코앞인데 폐가엔 먹을 물이 마땅치 않았다. 옛 주인이 사용한 부엌수도는 폐쇄된 지 오래였다. 다행이 마을에는 지하수를 끌어 올린 공동수도가 있었고, 폐가에도 수도계량기가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계량기에서 부엌을 잇는 수도관 공사를 하지 않았기에 수도계량기는 있으나 마나였다. 그렇다고 물을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그는 일종의 편법을 썼다.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인 계량기 수도미터 앵글밸브를 따고 호스를 연결함으로써, 수도관속으로만 흐르던 물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마을 사람들과 같은 물을 먹게 된 걸 기뻐했지 물을 도둑질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여자가 밝힌 부녀회장이란 감투. 도무지 실감이 안 났다. 뽕잎 할머니처럼 여든 안팎 할머니들 틈에서 부녀회장이라니. 종점슈퍼 주인이라면 모를까, 여자에게 부녀회장이란 감투는 암퇘지에 들꽃 화관을 씌워준 꼴이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클클클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여자는 부녀회장 본분을 다 하기로 작심한 듯 그의 상념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이건 엄연한 물 도둑질이야. 정식으로 이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중간에 물을 빼 먹은 거라구.
몰 도둑질이라. 그는 물 도둑질이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을 무슨 수로 훔칠 수 있다는 건지 뚜렷한 그림이 안 잡혔다. 하늘에서 떨어진 비가 땅으로 스며든 지하수를 먹었을 따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 물이 찰랑거리는 것도 그래서일 거였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먹었다 치자. 그게 도둑질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온 세상 사람들은 물 도둑이 틀림없었다. 여자는 세상사람 모두를 도둑으로 만들 셈이거나, 날도 구질구질하니 한바탕 웃자는 걸까. 종점슈퍼 여자는 혼자 살았다. 꼽추이장은 과부 강짜가 심하다고 한 잘 술에 놀렸다. 뽕잎 할머니는 남편이 죽었다고 했고 오입쟁이는 다방레지하고 눈 맞아 내뺐다고 쑥덕거렸다. 어느 결에 여자에게 밉보인 걸까. 그래서 여자는 물 도둑으로 몰아세웠나. 폐가에 이삿짐을 푸는 데 꼽추이장과 오입쟁이와 여자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먼저 그의 인생에 딴죽을 걸고 나선 건 꼽추이장이었다. 꼽추이장은 그에게 여자가 없음을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혼자 몸인가 보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꼽추이장은 단박에 아, 홀아빈가? 하고 반색을 했다. 그러다 이내 아니, 여자도 없이 사내 혼자 산다는 거야? 하고 인상을 구겼다. 그는 꼽추이장의 안색을 살폈다. 그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엇갈리고 있음을 그는 간파했다. 여자 없이 혼자 산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동병상련 감정을 드러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 싶게 여자도 없이 혼자 사는 한심한 놈이라고 업신여기고 있음을 표정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장단을 맞추듯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혀를 찼다. 쪽박인생이 따로 없네. 남들은 못 떠나서 안달하는 종점마을에 기어들게. 그는 유장히 흐르는 남한강을 흘낏 보는 것으로 여자 말을 한쪽 귀로 흘렸다. 강산마을이 버스 종점이긴 했다. 국도변 온천 휴양지에서 하루 다섯 차례 버스가 강산마을에 드나들었다. 종점슈퍼 앞마당이 버스 정류장이고. 그는 버스가 더는 갈 수 없는 강변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이동판매 트럭도 여자에겐 눈엣가시일 터였다. 강산마을엔 하루걸러 부식을 파는 일 톤 트럭이 지나갔다. 그는, 멀리서 국수, 라면, 두부, 맛좋은 콩비지 있어요, 하는 마이크소리가 들리면 뒷길에 나가 트럭을 기다렸다. 트럭을 모는 여자는 그에게 언제나 친절했다. 막걸리와 과자, 양파를 사느라 트럭여자와 말을 주고받는 데 종점슈퍼 여자가 마을회관 앞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딱 걸렸군,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여자의 눈길이 매서웠다. 종점슈퍼가 뻔히 영업 중인데 이동판매 트럭에서 물건을 산다고 저리 도끼눈을 뜨는 걸까. 그는 여자의 앙심이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종점슈퍼에는 쓸 만한 물건이 턱없이 부족했다. 화장지와 과자부스러기, 꽁치통조림, 모기향, 양초, 먼지를 뒤집어쓴 라면이 고작이었다. 여자는 그 알량한 물건이 떨어지면 가게 문을 닫을 거라고 걸핏하면 으름장을 놓았다. ‘동네 것들’이 국도변에 있는 온천휴양지 농협마트를 이용하면서 자신을 저버렸다고, 서운함을 토로하다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치면, 동네 것들이 오랜 세월 생필품을 제공한 은공을 모른다고, 동네 것들을 싸잡아 욕했다. 종점슈퍼에서 떨어지지 않는 상품이란 막걸리와 맥주 소주뿐이었다.
물 도둑은 듣느니 처음인데….
그가 입을 열기 무섭게 여자가 퍼부었다.
잔소리 말고 물 값 이십만 원 내셔. 이거 엄연한 물 도둑질이야. 동네 사람들한테 다 알려야하는데 내가 참는거라구. 이장한테 얘기할 테니까, 그런 줄 아셔.
이십만 원?
그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폐가 집세가 일 년에 십만 원이었다. 그런데 물 값이 이십만 원? 그것도 석 달 남짓 먹었나? 그로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여자의 처분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부녀회장과 마찰을 빚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물 값을 깎아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여자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정말로 깎아주지 못하겠다는 거요?
그는 정면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심각한 사태였다. 여자가 씨근덕대면서 그의 머리에 흥건했던 물은 벌써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경찰에 고발하려다 참았다니까. 그 만큼 많이 봐줬으면 됐지. 물 값을 깎자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도 마셔.
여자는 계좌번호 불러줄 테니 바로 입금하라고 으르딱딱거렸다. 그는 여자에게 사정해봤자 통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어제까지 데면데면하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그의 삶에 침범한 거였다. 여자가 무슨 권한으로 이십만 원을 선고했는지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의 사정은 모르쇄한 채 무작정 이십만 원을 내라는 여자의 닦달은 폐가를 외면하는 처사였다. 폐가에 이사 온 날 여자가 했던 말을 그는 똑똑히 기억해냈다. 여자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했다. 폐가 인생을 단죄했으면 그에 걸맞은 사람대접을 해야 옳았다. 그는, 쪽박인생 어쩌고 했던 여자의 희떠운 소리를 자신의 입으로는 차마 토해낼 수 없었다. 여자는 고발 운운해가며 한 치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자에게 마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야했다. 탈출구는 하나였다. 그는 여자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좋소, 몸으로 갚읍시다.
뭐요? 그게 무슨 말이셔?
말 그대로요, 돈 대신 몸으로 때우겠다는 거요.
그는 진심이었다. 이제껏 먹은 물을 다 토해낼 거요. 그는 손가락을 입에 쑤셔 넣고 억지로 토했다. 우웩! 우웩! 눈물이 질금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고 씨 미쳤어? 지금 뭐하는 짓이야!
화들짝 놀란 여자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토악질을 하던 손가락을 입에 문 그의 얼굴이 벌겠다. 머릿속에 물이 출렁거렸다. 그는 머릿속을 채운 물이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혼신을 다해서 여자에게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셔츠를 벗었다.
고 씨, 당신 미쳤어?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여자가 우산을 휘저으며 날뛸수록 그의 머릿속엔 물살이 거세졌다.
이장한테 이를 거야! 동네 양반들! 미친놈이 사람 잡네!
여자가 비명을 질러도 그는 묵묵히 웃통을 벗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말했다.
몸으로 갚겠다니까.
그는 여자에게 한 발 다가갔다.

꼽추이장은 작은 거인이었다. 작달막한 데다 손발도 작은 그는 못하는 일이 없었다. 몸집 작은 꼽추이장이 트랙터에 올라타면 머리통만 보였다. 하지만 꼽추이장은 트랙터를 몰면서 작은 거인의 위용을 뽐냈다. 꼽추이장은 집채만 한 트랙터를 수족처럼 놀리며 논밭을 가리지 않고 강산마을 농사를 도맡아했다. 이장입니다. 후곡마을 김길동 씨가 오늘 아침 일곱 시 반에 충주 시립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장은 오늘 아침나절에도 음울한 목소리로 부음 방송을 했다. 밥상머리에서 방송을 듣던 그는 그쯤에서 실망했다. 늙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꼽추이장에게 그가 듣고 싶은 방송은 따로 있었다. 강산마을에 짐을 푼 지 보름이 지난 봄날이었다. 트럭을 처박아 놓고 모처럼 쉬는 참인데, 난데없이 방송을 탄 꼽추이장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아, 아 이멜따, 그리운 이멜따야, 지금 어느 하늘에 있느냐, 란아, 날 버리고 떠나니 좋더냐, 이 나쁜 년들아! 귓구멍을 쑤시고 들어도 이장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누구냐구? 나는 니들 남편이다. 나는 네년들을 미치게 좋아했다아아…씨발, 죽도록 싸랑 싸랑했건만 내가 그렇게 싫었어? 응? 응? 시렀냐구우우? 꼽추이장은 취해 있었다. 봄날, 대낮에 막걸리에 취해, 마을회관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사랑의 상처를 방송으로 내 보내고 있음을 알아챈 그는 가슴이 벌렁거려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방송을 듣는 즉시 그는 여자 없이 산다고 빈정거렸던 꼽추이장을 용서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멜다와 란이, 눈앞에서 사지를 활짝 펴고 요정처럼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다고, 그는 느꼈다. 봄볕에 피어오른 백일몽이라도 좋았다. 꼽추이장의 목소리에 실린 그들의 자유로운 비행은 시시한 세상살이에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눈앞에서 솜사탕이 풍선처럼 날아오르듯 심장이 쿵쿵대는 알싸한 설렘을 안겨주었고, 삼십초쯤 허공에 붕 뜬 느낌에 녹작지근해진 그는, 오랜 시간 거미줄에 친친 감아두었던 비루한 현실에 먼지가 풀풀 나도록 처박아두었던, 그 행복감이란 놈이, 모처럼 전기로 지지듯 등줄기부터 온몸으로 찌르르 퍼져나가자, 문득, 목이 메었다. 그는, 봄날에 마른벼락처럼 닥친 행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는 울컥했고, 눈물을 뿌려서는 안 되겠기에 사랑의 상처를 저런 식으로 풀어내는 꼽추이장의 무모한 행동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로서는 혼자 감상하기에는 꼽추이장의 취중 방송은 너무 아까웠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행여나 꼽추이장의 목소리를 놓칠 새라 뒤뜰 살구나무 언덕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싸랑했다, 싸랑했다 이거야, 아아, 나 진짜 진짜 이 한목숨 바쳐 싸랑했거덩, 나쁜 년들아아아! 나는 싸랑도 못하냐아아아… 다시는 싸랑하지 않으리… 씨발… 아, 배신자여어, 배시인자아여어, 싸랑으으 배에에시이인자아여어어… 우당탕 거리는 잡음이 이어지더니 배신자를 목 놓아 부르는 꼽추이장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봄 하늘을 갈랐다.
한때 꼽추이장은 강산마을의 희망이었다. 팔순 노인들은 마을에서 사라졌던 애 울음소리를 꼽추이장이 들려주리라 학수고대했다. 그날 꼽추이장이 떠나간 사랑을 피눈물로 아파했음에도, 마을이 떠나가도록 공개방송을 했음에도, 강산마을은 고요했다. 노인들 누구 하나 내다보는 이 없었다. 인적 없는 마을에 나른한 봄볕만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꼽추이장의 눈물범벅 목소리에 넋을 놓고 움직일 줄 몰랐다.

비에 젖은 막차 버스가 떠났다. 버스 안에는 승객이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막차 버스가 강변길로 아스라이 멀어지자 종점슈퍼 문을 열고 들어섰다.
먹은 물을 다 토해내기로 했다구?
막걸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던 꼽추이장과 오입쟁이가 단박에 알은 체를 하며 반겼다. 반면에 반쯤 열어놓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문짝이 떨어져나도록 부리나케 방문을 닫았다. 꼽추이장과 오입쟁이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건만 매대 선반이며 음료수 냉장고가 텅 빈 가게 안은 썰렁했다. 그는 막상 여자와 담판을 짓자고 왔건만 꼽추이장과 오입쟁이가 사정을 안 이상 두 사람에게도 전후사정을 설명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베트남 여자, 필리핀 여자와 두 번이나 결혼했다 이거야. 오입쟁이가 잔을 털어 넣고 주절거렸다. 그거 다 내가 주선했잖아. 근데 시방은 혼자야. 한 여자도 아니고 두 여자가 다 도망갔잖아. 이게 말이나 되냐구! 한 년은 육 개월을 살았는데 애가 없었어. 도망간 년들은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년들이라니까. 지들이 우리 이장의 외로움을 눈꼽만치라도 헤아렸다면 그럴 수는 없는 거거든. 고개를 숙인 꼽추이장은 잔만 기울였다. 그년들하고 계속 살았으면 애를 낳았을 거다 이거야. 어느 년이든 삼년만, 더도 말고 삼년만 딱 살아줬으면 애를 가질 수 있었을 거라 이거야.
겨울에 떠났다 농사철에만 마을에 머무는, 돈을 버는 족족 술집 여자에게 바치는 게 인생 목표인 오입쟁이는 꼽추이장의 전처들을 싸잡아 성토했다. 꼽추이장의 상처에 공감한 그는 봄날 이후 꼽추이장이 방송을 할 때마다 은근히 기다렸다. 실연의 상처 속편이 이어지기를. 면민 체육대회 날임을 알리거나 보건소 검진 안내보다도 그는 이장의 취중 방송을 목말라했다. 비료 주문을 독촉하기보다 도망간 여자들에게 겪은 배신감이나 그리움을 마구마구 토해내기를!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하나 둘, 지금부터 내 가슴에 거름더미처럼 쌓인 곪은 상처를 터뜨리겠습니다! 막걸리에 취하든, 밤 열두시든, 언제라도 좋았다. 종점슈퍼에서 훌쩍대지 말고 방송으로 후련하게 털어놓기를 이제나저제나 그는 기다렸다. 그러나 이장은 이제껏 속편을 방송하지 않았다. 오늘도 이장은 그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오입쟁이가 떠벌이지 않았던가. 이장의 외국인 아내들이 도망간 사건은, 강산마을을 뒤흔든, 노인들의 팔십 평생에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노라고. 으이그, 지겨운 화상들! 그때 문간방에서 여자가 다 듣고 있다는 듯, 넌덜머리난다고 투덜거렸다. 그제야 종점슈퍼에 온 목적을 새삼 떠올린 그는 실연의 상처를 달래고 있는 꼽추이장에게 할 소리는 아니라 여겼지만 어렵사리 물 값 이십만 원은 지나치다고 입을 열었다. 몸 값? 이십만 원? 이장이 취기서린 눈을 치떴다. 아니, 몸값이 아니라 물 값. 그게 그거라구, 몸값이나 물 값이나. 고 형은 그게 다르다고 생각하슈? 고 형 몸값이 이십만 원밖에 안 돼? 그게 말이나 되냐구? 우리 부녀회장이 값을 후려쳐도 너무 심했어. 그는 꼽추이장이 취했다고 생각했다. 왜 꼽추이장은 물 값과 몸값을 분간하지 못하는 걸까. 머릿속 물이 출렁출렁했다. 물 값과 몸값이 뒤죽박죽인 탓일까. 이러다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하긴 그로서는 물을 몸과 동일시한다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이날까지 머릿속 물이 흐르는 대로 몸을 실어왔으니까. 그때 또 문간방에서 여자가 불퉁스레 말했다. …버스 떠난 담에 손 흔들어봐야 뭐하냐구. 여자들이 뭔 죄가 있다구. 있을 때 잘해줘야지. 아, 그래서 내가 세탁기, 냉장고, 김치냉장고, 에어콘, 차까지 좍좍 새로 뽑아줬잖아. 근데도 도망가면 어쩌자는 거야. 문간방을 향해 한바탕 퍼부은 꼽추이장이 그에게 등 떠밀며 말했다. 고 형, 어서 들어가보슈. 우린 상관 말고 부녀회장허고 흥정해보슈. 몸값이건 물 값이건 두 사람이 불붙었으니 둘이 알아서들 하슈.
물 값인가? 몸값인가? 여자가 있는 방문 앞에 선 그는 어느 쪽을 선택할지 망설였다. 흐르는 물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야 물이니 알아서 처분하슈. 그는 방문을 두드리며 여자에게 말했다. 머릿속에서 분출하는 물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을 넘친 물이 얼굴을 적시고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얼굴과 목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두둥실 떠오른 몸이 어디론가 실려 가고 있음을 그는 느꼈다. 분수처럼 솟는 물소리에 방문을 연 여자가 자지러질 듯 외쳤다. 이게 웬 물벼락이래? 고 씨 어디로 사라진 거요? 여자의 비명이 드높아질수록 바닥을 적신 물이 가게 안에 차츰차츰 차올랐다.


윤동수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중편 「새벽길」 발표. 장편 「짧은 생애」, 작품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 광주민중항쟁 지도자 윤상원 평전 『오월의 입맞춤』, 『당신은 나의 영혼』 -이현중·이해남 평전, 산문집 『어느 소설가의 바보 같은 연애편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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