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9호/특집·편견과 차별에 맞서다/임지훈/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의 무지와 존재론적 한계에 대하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402회 작성일 23-01-04 15:22

본문

79호/특집·편견과 차별에 맞서다/임지훈/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의 무지와 존재론적 한계에 대하여 


임지훈 평론가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의 무지와 존재론적 한계에 대하여 



1. 

픽션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미스트>에서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에 둘러싸인다. 안개 속에서 괴생물체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찢어 죽이는 가운데, 주인공 가족은 가까스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트로 피신한다. 이제 주인공 가족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저 창 밖의 정체불명의 괴생물체들에 맞서 공동체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 아니면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Darkest Dungeon>에서 주인공은 몰락한 영지의 후속 영주로써, 영지에 출몰하는 악마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용병들을 모으고, 영지를 발전시켜 나간다. 주인공은 게임의 끝에서 영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사린 악마를 봉인하고, 영지가 평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왕 게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게임의 예를 들어보자. 게임 <This War of Mine>에서 주인공은 내전으로 인해 고립된 시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물자는 점차 떨어져가고 있지만, 저 바깥에는 주인공과 같이 고립된 사람들도 있으며 병원이나 마트와 같이 물자를 구할 수 있는 곳들도 도처에 존재한다. 주인공은 물자를 구하기 위해 전선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서로에게 필요한 물자를 거래하기도 하면서 살아남고자 최선을 다한다. 

위의 세 작품의 공통점은 한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강대한 공포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협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공포에 맞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때로는 괴물과, 때로는 반군세력과, 때로는 산적들에 맞서 ‘우리’를 지키고자 용기를 내야만 한다. 그렇다. 이 작품들은 모두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작품들은 매 순간 체험자에게 어떤 선택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강요하며, 그것이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를 목격하게 만든다. 물론, 세 작품의 공통점은 매우 상식적인 판단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의로운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세 작품은 모두 해피엔딩으로, 주인공을 비롯한 공동체가 생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마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 

세 작품은 인간이 가진 미지에 대한 공포를 건드린다. <미스트>에서 안개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생물체들이 그러하고, <Darkest Dungeon>에서 마주치게 되는 정체불명의 악마들이 그러하다. 이것들은 모두 한 개인의 힘으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며, 그 끔찍한 몰골로 인해 우리의 공포를 자극한다. 그것들이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될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것들에 대한 소문이 우리의 공포를 더욱 자극한다. 다소 다른 양상이기는 하나 <This War of Mine>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 게임에서는 내전으로 인해 고립된 도시라는 설정은 존재하지만 내전의 이유에서부터 어느 쪽이 정의로운 것인지,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따위의 정보들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 제한된 정보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나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타자들을 최대한의 물리력을 동원해 배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스트>의 주인공은 도끼를 손에 쥐고 괴물들을 공격하고, <Darkest Dungeon>에서는 용병들을 고용해 어두운 미로에 도사린 괴물들을 습격하며, <This War of Mine>에서는 타인들이 고립된 도시의 물자들을 모두 소비해버리기 전에 먼저 습격을 해 죽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될 테니까. 오직 생존이 최고의 가치인 이 세계들에서 체험자는 한편으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고양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내가 나의 손으로 타자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나의 생존이 나의 강함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는 고양감 말이다. 내가 살아남아있다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의 판단이 정답이었다는 가장 큰 증거이므로 내가 살아있는 한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속에서 편견과 혐오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편견은 사유의 모자람이 아니라 내가 최대한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근거이며, 혐오는 나를 위협하는 타자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 해주는 육감과 등치된다.

그러나 세 작품에서 체험자는 그 결말에 이르러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며 미쳐버리게 된다. 왜? 당신의 모든 선택들은 실패한 것이므로.


3.

영화 <미스트>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도와달라는 한 여성의 요청을 받게 된다. 자신의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그들을 구할 수 있게 동행해달라는 요청.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여성의 요청을 거절하고 마트에 남는 것을 택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일행은 자신들의 가족을 둘러싼 안개와,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괴생물체들의 소리에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안개를 뚫고 나타난 것은 군인들이었고 그들이 호송하는 트럭에는 구출된 사람들이, 영화 초반부의 그 여성과 아이들이 타고 있다. 죽은 일행들의 시체에 둘러싸인 주인공의 절망적인 비명 속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런가 하면 <Darkest Dungeon>에서는 주인공이 학살해온 괴물들의 정체가 사실은 자신의 아버지가 비원을 이루기 위해 악마에게 바친 영주민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궁극적으로는 주인공 또한 미쳐버리게 된다. 악마들과 싸우며 정신장애와 질병에 시달리게 된 용병들을 남겨둔 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악마가 되는 길을 선택하고 새로운 제물을 바치기 위해 ‘당신’을 영지로 초대한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이 미쳐가는 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어떻게, 어떤 서사적 장치를 통해 전달되는가. 점차 게임이 안정화되고 클리어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플레이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서브리미널에 가까운 속도로 게이머의 인터페이스가 괴물들로 뒤바뀐다. 환각과도 같은 체험을 플레이어에게 강제함으로써, 이 게임의 끝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닐 것이며 당신의 모든 선택들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쳐가는 주체는 게임 속의 세계가 아니다. 미쳐가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This War of Mine>의 결말은 좀 더 충격적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혹은 그들에게서 물건을 약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한정된 물자로 인해, 플레이어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는 없으며 때로는 비정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부상을 입어 죽어가는 나의 동료를 살릴 것이냐, 혹은 저 나약한 일면식도 없는 노부부를 죽이고 그들의 물자를 빼앗을 것이냐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한다. 사실 이 게임은 좀 더 잔인한 선택들을 강요한다. 나의 일행들의 스트레스 수치를 낮추기 위해 필요한 술과 담배를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해야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게임이라는 특수한 매체에 의해 강요되는 잔인한 선택들일까?

게임을 클리어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공격해 더 많은 물자들을 빼앗아 축적하면서, 게임에 등장하는 타자들을 아무도 돕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엔딩에 도달해봤자, 게이머가 보게 되는 것은 생존자들이 경험한 사건들로 인해 PTST를 앓으며 살아가다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결말이며, 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과 인물들, 작은 편지와 메모조차도 실제 보스니아 내전의 경험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살해한 그 노부부조차 사실은 살아있었던 한 인간이라는 진실, 이 모든 것은 단지 게임의 상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현실이다.


4.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면서 위에 거론한 작품들이 어떤 의미에서 잘못된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 왜곡되어 있는지를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세 작품은 모두 극도로 제한된 상황을 강제함으로써 체험자에게 편견과 혐오를, 그로부터 잘못된 판단을 조장한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은 모두 비상식적인 판단과 행동을 감행한다. 그런데 한 발짝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자. 그것은 정말 픽션에 의해 조성된 것들에 불과한가? 생존을 위해 제한된 정보들과 물자 속에서 타자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사고방식이 조정되고, 그에 따른 판단과 행동을 자행하는 것은 정말 게임 속의 풍경에 불과한가? 어느 미친 제작자들의 농간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왜 제작자들은 당신에게 불편한 경험을 강제하는 것일까? 이 작품들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왜곡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서, 잘못된 세계관을 가진 자아들이라서 굳이 이런 작품들을 소비하는 것일까? 그래서 제작자들도 돈에 정신이 나간 나머지 이런 작품들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것일까?

질문을 바꿔서 다시 접근해보자. 과연 나치 치하의 독일인들은 왜곡된 욕망에 사로잡혀서, 광신적인 믿음에 자신을 투사하였기에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찬동했던 것일까? 그들이 모두 유태인에 의한 끔찍한 경험들을 한 바 있기에 이런 행동들을 자행했던 것일까? 아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유태인들이 너희의 향유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만든 선동에 있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정체불명의, 당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방인으로 만듦으로써 독일인의 내면에 있던 미지에 대한 공포를 자극했다. 나치에 의해 극도로 통제된 정보들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정보들을 조합하여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행동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나치에 충성해야만 했고, 그 대가로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얻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개인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미지의 공포는 사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자체였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미친 것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였던 것은 아닌가.

이번에는 소재를 바꿔보자. 난민, 페미니즘, 동성애, 이슬람,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그들은 항상 우리의 향유를 위협하는 괴물 같은 존재들로 조장되고 소비되고 있지 않은가. 난민들이 너의 여성들을 겁탈할 것이다,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여성들이 남성인 너의 쾌락들을 모두 금지할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너의 자식들을 물들여 질병으로 만연하게 될 것이다, 이슬람의 신도들이 너의 종교를 핍박하고 괴롭힐 것이다, 세월호의 유가족들이 네가 낸 세금들로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것이다 등등. 이 무궁무진한 판본들 속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가. 예시한 작품들 속에서 등장한 미지의, 한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괴물들로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존재들을 자신의 삶에서 배제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나. 얼마만큼의 이익을 얻었는가. 정말로 우리의 삶은 ‘안전하게’ 지켜진 것인가. 

그 결말에서, 우리가 미치지 않았으리라고 당신은 확신할 수 있겠는가?


5.

물론 나는 그들이 오롯한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타자에 대한 모든 판단과 행동들이 편견과 혐오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난민들에 의한 소요사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등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완전한 옹호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플레이어에 불과하다는 것. 제작자가 짜놓은 제한되고 폐쇄된 세계 속에서 정해진 목적을 향해 강요된 선택을 반복하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고, 사실은 타자들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플레이어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다. 현실은 작품보다도 잔혹하다. 우리가 작품의 불쾌한 경험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면 quit 버튼을 누르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는 quit 버튼도, skip 버튼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코스미시즘Cosmicism은 현실 그 자체이다.

꽤나 긴 분량에 걸쳐 영화와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것이다. 어쩌면 이 판 자체가 우리에게 강요된 선택을 요구하고 있지 않느냐는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편견과 혐오를 멈추라는 말은 너무나도 쉽지만, 무엇이 편견과 혐오인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정보가 사방에서 넘쳐날수록, 우리는 오히려 제한된 정보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 그 모든 정보들을 판단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자신의 판단능력을 유튜브 따위에 일임한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는 모두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갈하고 싶다. 더불어 이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공정한 경쟁이 하나의 근본적인 토대가 된 세계에서 우리에게 어느 누가 어떻게 감히 타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환대를 감행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무책임한 태도를 윤리라고 부른다면, 그건 악마를 위해 나의 모든 걸 내어주라는 광신적인 태도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아니, 사실은 우린 모두 광신도들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악마에게 우리 스스로를 내어준 작은 괴물들이 우리의 정체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떤 혁명을 주창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 이데올로기들을 가로질러 자유를 찾자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 어디에도 대안은 없다. 완전한 평화의 세계는 한계를 마주한 우리가 상상해낸 허구에 불과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는 모두 제한된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한계를 직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단 한 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으며, 단 한 번도 정의로웠던 적도 없었다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전부이다. 우리가 한 모든 행동은 사후에 판단되어야 할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윤리적 우위에 있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타인을 평가할 자격 따위 갖추고 있지 않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저들이 우리에게 괴물일 수 있듯이,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괴물일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정말 이성적인 인간인가? 안개에 둘러싸여 판단능력을 상실한 플레이어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여기에서 하고자하는 궁극적인 이야기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나에게도 대안은 없다. 단지 대안을 제시하는 그 누군가를, 대상을 정의 내리려는 누군가를 항상 의심하라는 것이 나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나의 신도, 타자의 신도, 모두 의심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선 판단의 토대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 이야기는 한계가 저 앞에 있으니, 우리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계속해서 마주하게 될 한계들 속에서,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사유를 멈추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당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는, 당신이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오직 당신의 후회와 슬픔뿐이다. 에밀 시오랑의 방식으로 표현해보자면, 자기 자신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 모든 철학은 그저 습관적인 빈말에 불과한 것이므로, 오직 후회와 슬픔만이 당신의 이성을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후회하고 슬퍼하면서도 계속해서 이 세계를 더듬더듬 걸어가 보기를.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려하면서도 계속 걸어 나가보기를. 그리하여 당신이 혐오하던 그들 또한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려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를 바란다. 슬픔과 후회로부터, 비참하고 무기력한 모습들로부터 우리라는 것을 다시금 상상해내야 하는 시간이다.






1)이 부분에서 주인공이 미쳐가는 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어떻게, 어떤 서사적 장치를 통해 전달되는가. 점차 게임이 안정화되고 클리어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플레이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서브리미널에 가까운 속도로 게이머의 인터페이스가 괴물들로 뒤바뀐다. 환각과도 같은 체험을 플레이어에게 강제함으로써, 이 게임의 끝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닐 것이며 당신의 모든 선택들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쳐가는 주체는 게임 속의 세계가 아니다. 미쳐가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2)사실 이 게임은 좀 더 잔인한 선택들을 강요한다. 나의 일행들의 스트레스 수치를 낮추기 위해 필요한 술과 담배를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해야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게임이라는 특수한 매체에 의해 강요되는 잔인한 선택들일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