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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신작시/최영랑/분장법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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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신작시/최영랑/분장법 외 1편
최영랑
분장법 외 1편
타인의 세계를 수식하는 것, 변신은 그렇게 은폐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의 얼굴을 잠깐 빌리자 빙 둘러치고 있던 울타리가 사라진다 무대가 넓어진다 가면 속 그는 환상통을 앓고 있는 자신의 체취를 밀어낸다 매번 자신을 버릴 기회를 놓치고서야 많은 민낯이 그를 붙들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익숙한 얼굴이 낯선 시간 속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한통속이 된다 그는 매일 낯선 곳으로 출근한다 그가 불쑥 그를 열고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해독이 쉽지 않은 세계, 그는 여러 개의 얼굴을 수시로 갈아 끼운다 오늘은 어떤 얼굴이 맘에 듭니까? 질문의 발신자는 있는데 수신자는 없다
그는 매일 밤 분리된다 무대는 매일 새로워져야 하니까 자아와 자아 사이 비굴하게 웃는 가면을 마지막인 양 끼워 넣는다
사람들은 그를 카멜레온이라 부른다 그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타인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던 걸까 고여 드는 것들은 어디엔가 침잔한다 아무리 비누칠을 하고 아무리 빡빡 문질러도 민낯이 돌아오지 않는 날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최초의 가면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발코니 유령
어느 작은 행성에 와 있는 느낌이야 우주를 떠돌다 잠시 501호의 외벽에 불시착한 듯, 허공은 아직 어지러워 허공을 딛고 있는 내 몸이 아슬아슬해 목소리를 자꾸 1층으로 떨어뜨리고 있어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저기 내 눈동자 좀 봐 비둘기 떼가 쪼아대더니 물고 날아오르고 있어 그럴 때마다 얼굴 없는 나는 잠깐 지상을 착각해서 걸어 다니게 되지 이곳은 늘 흐르는 곳이야 사라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의 무수한 자리바꿈, 잔향들로 항상 북적거리지 난 이곳에서 사계의 햇빛과 바람을 채록해 그건 제라늄과 산세비에리아, 치자꽃향기로 피어나기도 하지 항아리 속 미생물들을 깨우는 일이기도 해 발목이 없는 몸은 우주로 통하는 길이야 사색의 파장이 무한히 확장되는 길이기도 해 무한대의 길들을 따라가다 보면 멀어지면서도 가까워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지 그러니까 이곳에서 나도 흐르고 있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야 지독하게 고독과 적막을 감각하지 않아도 되는 계절 속에 있는 거야 허공으로 떠오르던 노아의 방주가 생각나는 지금, 순간 나는 우주 바깥으로 멀어지는 상상을 하고 있지 산 자들이 자꾸 나의 대한 기억을 매 순간 밀어내고 있으니까, 희미해지거나 흩어지는 일은 결코 무모한 일이 아니야
*최영랑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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