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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고전 읽기/권순긍/“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노라”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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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고전 읽기/권순긍/“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노라”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
권순긍 문학평론가·세명대 교수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노라”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아, 고구려
중국 우한武漢에서 시작된 ‘코로나19’가 지난 1월 20일 국내 첫 확진자를 낸 이후 한반도를 온통 헤집고 다니며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확진자만 벌써 5천명을 돌파했고, 이제 만 명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나아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균 때문에 사람들은 일상을 포기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아직도 이 바이러스를 제거할 백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고난을 극복할 우리 민족의 잠재력이 어디에 있을까? 인해전술人海戰術도 아닌 중국발 바이러스의 무차별 침략을 목도하면서 거대한 중국에 맞섰던, 아니 중국을 넘어 만주를 호령했던 저 위대한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 민족의 강인한 유전자는 결코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2002년~2006년 무렵에 중국의 국가 사회과학원이 주도하여 한반도와 붙어있는 동북 3성, 즉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위원회와 공동으로 고구려와 발해가 자기네 역사의 일부라고 하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명백한 역사왜곡으로 여기에 맞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이 발족되었고, 방송에서도 고구려 붐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방송 3사들은 저마다 고구려를 소재로 역사드라마를 방영하여, SBS의 「연개소문」, KBS의 「대조영」, MBC의 「주몽」등이 안방극장을 장악했다. 그 중 「주몽」은 50%가 넘는 기적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건국영웅 주몽朱蒙(BC 58~BC19)에 대하여 친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드라마의 원천이 되는 「주몽신화」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않은 듯하다. 추격하는 부여의 기마병을 피해 엄수淹水(淹滯水로도 불리며 압록강 동북쪽에 위치한다)를 건널 때 배가 없어 하늘에 호소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한 일을 혹시 들은 적이 있는가? 일반인에게는 홍해를 가른 모세의 기적은 알아도 주몽의 신이한 행적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12세기 금金 나라의 침입을 목격하면서 「동명왕편東明王篇」이라는 서사시를 썼던 이규보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신화들 중에서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수식이 화려한 것이 바로 이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이다. 무려 280여구, 1,400여 자의 시와 430여구 2,200여자의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 의하면 이규보가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보고 주몽의 사적에 감동하여 서사시로 쓸 결심을 했다고 한다.
히 신화와 서사시epic는 같은 내용을 방식을 달리해 표현한 것이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서사시는 무당(혹은 음유시인)에 의해 노래로 불려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사시, 특히 영웅들이 등장하는 ‘건국서사시’의 전형적 형태를 「동명왕편」은 보여준다. 서사시는 국가의 건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국가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영웅의 투쟁과 극복과정, 그리고 승리 혹은 장렬한 죽음이 잘 드러난 문학양식이다. 어쩌면 「동명왕편」은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나 북유럽의 『니벨룽겐의 반지』,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스페인의 『엘 시드』, 게르만족의 『베어울프』 등 세계 문학사의 쟁쟁한 서사시와 어깨를 같이 할 우리 문학사의 유일한 작품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알게 하노라”
그러면 어떻게 해서 고려중기의 문인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쓰게 됐을까?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야말로 전 생애를 온전히 ‘무신정권’과 함께 보낸 인물이다. 그가 2살이 되던 1170년 정중부鄭仲夫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문벌귀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무신정권은 최충헌崔忠獻으로 이어져 이규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난 1258년에야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에겐 태생적으로 무신정권의 피비린내 나는 격랑을 헤쳐가야 할 운명이 주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196년 최충헌에 의해 시작된 최씨 정권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행정실무를 맡길 글을 잘 쓰는 문인지식층들을 적극적으로 등용시켰다. 이들이 바로 장차 조선을 건국하게 될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혹은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들인 것이다. 이규보는 그런 신진사대부의 선도적 인물이었다. 저 유명한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1장을 보면 당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 앞자리에 이규보가 있다.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원순문 인로시 공노사륙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
沖基對策 光鈞經義 良經詩賦
충기대책 광균경의 양경시부
여기서 말하는 이 정언正言이 바로 이규보다. 진한림이라 부르는 진화陳澕와 더불어 두 개의 운을 달아 달리듯이 빨리 글을 썼다고 「한림별곡」은 전한다. 글을 쓰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 무신정권에서 요구하는 ‘능문능리能文能吏(글을 잘 쓰고 업무를 잘 처리하는 관리)’로서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최충헌의 아들이자 무신정권의 실력자였던 최이崔怡에 의해 발탁돼 정계로 진출했다.
하지만 이규보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논도경방論道經邦(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이나 글로써 나라를 빛내는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경지를 바라고 있었으니 ‘능문능리’를 요구하는 무신정권의 현실과 이규보의 이상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러기에 늘 무신정권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물론 그건 그가 벼슬길에 나가고 난 뒤의 일이다. 그의 벼슬이 뒤에는 정승에 해당되는 ‘상국相國’에 이르렀지만 갈등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진사대부 계급이 그렇듯이 이규보 역시 지방인 여주驪州의 향리 출신으로 중소지주의 경제 기반을 토대로 관인으로 진출한 경우다. 이규보가 어릴 때 부친은 수도인 개성의 관리로 있어 개성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아홉 살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아, 시서육경·제자백가·사필의 글로부터 유경벽전·불교경전·도가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을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다.”(『백운소설白雲小說』)고 할 정도로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하였다. 활달하고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자유분방한 성격과 더불어 엄청난 독서량은 글을 쓰는 데 소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되었다. 이를테면 이와 개를 비교하여 생명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간파한 「슬견설蝨犬說」을 보더라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14세 부터는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는데, 과거 시험 양식엔 익숙하지 않아 16세, 18세,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고 만다. 자신의 주장처럼 생각을 자유롭고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신의新意’에 입각해 글을 썼기 때문이리라. 연보에 의하면 “공은 과거의 문장을 따로 배우지 않아 그 글이 격식과 율격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삼수 끝에 22세 되던 해, 사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한다. 꿈을 꾸고 나서 보답이 있었다하여 이름을 인저仁氐에서 규보奎報로 바꾼다. ‘규奎’는 문文을 관장하는 별자리 규성奎星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는 뜻이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무신정권 담당자들의 눈에 들지 않아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답답한 청년시절을 보낸다.
24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여 개성의 천마산天摩山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로 정했다. 혼란한 현실 속에서도 흰 구름처럼 유유자적하며 살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이러한 그의 생각은 “무릇 구름이란 한가로이 떠서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도 않으며 동서로 나부껴 그 형태와 자취가 구애받은 바 없네.” 라고 그가 호를 짓게 된 연유를 쓴 「백운거사어록」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권력쟁탈전으로 어지러웠고, 밖으로는 북방의 패권을 잡기 시작한 금金나라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열혈청년 이규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글재주를 통하여 이런 혼란스런 현실 속에서 민족 구원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었다. 26세 되던 1193년(명종 23년) 4월 『구삼국사』를 보던 이규보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의 사적을 접하고 깜짝 놀란다. 그 정황을 「동명왕편東明王篇」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난 계축년(1193년) 4월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 본기本紀를 보니 그 신이한 자취가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 심했다.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않아 괴상[鬼]하고 황당[幻]한 이야기라 여겼지만 세 번 거듭 읽어 탐미하여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황당한 것이 아니라 성스런[聖]것이며, 괴상한 것이 아니라 신령스런[神]것이었다.
민족적 긍지의 발견이랄까?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이지만 금나라에게 시달리던 당시는 실상 만주벌판을 호령하고 중국을 위협했던 고구려의 기상은 사라진지 오래다. 영토는 한반도로 축소되었고, 옛 고구려의 땅에서는 거란과 여진이 번갈아 요遼나라와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몽고도 부족들을 통합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중국은 남송南宋으로 후퇴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우리 민족이 고구려처럼 웅대한 기상을 떨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국내의 사정은 무신정권의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열혈청년 이규보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고려를 하나로 묶어주는 코드가 필요했고,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의 사적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일들이 황당하고 괴상한 것이 아니라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일이라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쉽게 종교를 생각해보자. 생명의 창조나 예수의 부활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감히 따질 수 없는 신령스러운 사건이 된다. 그래서 『성경』의 「요한복음」에도 의심 많은 제자 도마Tomas를 향하여 부활한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것이다. 동명왕의 신이한 행적이 하나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고려인들에게 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신앙이 되길 원했을 것이고, 그래서 서사시 「동명왕편」을 쓴 것이다. 말하자면 동명왕의 신화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고려를 하나로 묶어주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propaganda’로 기능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서문의 뒷부분을 보면 시인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가 「당현종본기唐玄宗本紀」나 「양귀비전楊貴妃傳」에 없는 황당한 일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노래로 지었다 하며 이어서,
하물며 동명왕의 사적은 변화신이하여 여러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세운 신성한 자취인 것이다. 이러한데도 이 일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세에 장차 무엇을 보겠는가. 이런 까닭에 이 시를 지어 기록해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알게 하노라.
고 했다.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我國本聖人之都”라고 하는 민족적 긍지가 고려인들을 하나로 묶는 신앙이길 바랬다. 민족 공동체로서의 결집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고구려를 건국한 민족영웅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통해 고려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래서 밖으로는 거란과 여진 등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하고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혼란을 수습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내우외환을 극복할 민족의 영웅을 기다리며
그런데 이규보는 고려 중엽 중국에서 수입된 주자학朱子學으로 무장을 한 신진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런 중세적 윤리도덕이 몸에 밴 이규보가 어떻게 해서 고대 건국영웅인 동명왕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서문에도 나와 있는 바처럼 “선사 공자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했다. 유교적 합리주의의 입장을 지녔던 신진사대부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신화가 그렇듯이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에 동명왕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었다. 「서문」에서도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을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비록 배운 것 없는 미천한 남녀들조차 제법 그에 관한 일들을 얘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미천한 남녀’들이 열렬히 호응하는 이야기 속에 그들을 하나로 결집할 요소를 찾았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주자학적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려인들을 하나로 묶어줄 코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중세는 보편주의 시대라 한다. 중심 제국을 중심으로 말은 각기 다르지만 동일한 문자를 쓰던 시대였으며, 동일한 종교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우리에게 한문이나 유교가 있다면 서구에는 라틴어나 기독교가 있었다. 그러기에 중세의 모든 문화가 중심제국과 변방으로 나누어져 중심제국의 문화에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가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중화中華와 오랑캐가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는 ‘화이론華夷論’이 곧 그것이다. 고려 중기 이후 등장한 지방 중소지주출신의 신진사대부들이 가졌던 가치관도 그렇다. 모든 글을 한문으로 썼으며 한족 정통론에 입각하여 남송의 주희朱熹(1130~1200)가 체계화 시킨 주자학朱子學을 수입하여 자신들의 이념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규보는 미천한 백성들의 구비전승 속에서 답답하고 고루한 중세적 가치관을 타파할 대안을 발견했으니, 그것이 곧 고구려를 건국한 민족 영웅 주몽이다. 서구의 중세를 생각해보라. 신神 중심의 어둡고 음울한 중세적 휘장 속에 인간은 갇혀 있었다. 그런데 르네상스Renaissance가 시작되면서 이런 중세를 극복할 대안으로 고대의 영웅들이 부활했다. 흔히 헬레니즘Hellenism이라 부르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 속 고대 영웅들이 회화와 조각, 문학작품에 인간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 것이다. 종교적 도그마Dogma에 갇혀있는 인간들에게 위대한 영웅들의 모습을 제시하며 인간의 개성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서사시 「동명왕편」도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중화 중심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건강하고 용맹한 민족영웅으로서 동명왕이 그려져 있다. 작품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은 동명왕 탄생 이전 해모수의 이야기이며, 다음은 동명왕의 성장과 투쟁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은 유리왕의 얘기와 작가의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모수解慕漱와 주몽 그리고 유리琉璃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은 것이다.
해모수의 모습은 “해동의 해모수는/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실 적에/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셨고/따라 내려온 백 여인은/고니타고 날개옷을 휘날렸구나.”로 그려져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어디에도 해모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동명왕편」은 해모수의 구체적 모습은 물론이고 유화와 혼인하는 과정도 자세히 전한다. 장차 장인이 될 강의 신 하백河伯과 내기를 하여 유화를 얻는 과정이 흥미롭다. 하백이 잉어로 변하자 해모수는 수달로, 하백이 꿩이 되자 해모수는 매로, 하백이 사슴으로 변하자 해모수는 승냥이가 되어 잡아서 “하백은 왕이 신통력이 있음을 알아/술자리를 베풀고 서로 즐거워했다.”고 한다. 중세적 규격이나 격식에 구애 받지 않는 낭만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서사시의 중심 인물인 주몽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투쟁과정은 더 자세하다. 우선 주몽의 탄생을 보자. “해를 품고 주몽을 낳았으니/이 해가 계해 년이었다./골상이 참으로 기이하고/우는 소리가 또한 심히 컸다”고 하여 ‘영웅의 일생’에 맞게 비정상적인 알로 태어났음을 그렸다. “한 달이 되면서 말하기 시작했는데/스스로 말하되 파리가 눈을 빨아서/누워도 편안히 잘 수 없다 하였다./어미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그 활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한다. 강보에 싸인 아기가 파리를 쏘아 맞췄다는 노래는(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이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의 ‘주몽’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부여 왕의 마구간에서 말이나 키우는 하찮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니 천제의 손자가/천하게 말 기르는 것 참으로 부끄러워/마음을 달래며 항상 탄식하길/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구나.”라고 마음을 삭여야만 했다. 어머니가 궁궐에 계시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장차 남쪽 땅으로 내려가서/나라도 세우고 성시도 세우고자 하지만/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이별이 참으로 쉽지가 않구나.”고 하소연 한다.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는 “장사가 먼 길을 가려면/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고 오히려 아들을 마구간으로 데려가 준마를 알아보게 하는데, 준마를 얻는 과정도 “마구간으로 데려 가서/긴 채찍으로 후려치니/뭇 말이 모두 달리는데/그 중 한 마리 붉은 말은/두 길 난간을 뛰어넘는다.”고 흥미롭게 전한다.
그 준마의 혀에 바늘을 꽂아 제대로 먹지 못하게 하여 야위어지자 부여 왕이 그 말을 주몽에게 주었고, 주몽은 바늘을 뽑고 다시 잘 먹여 다시 훌륭한 말로 만들어 놓았다 한다. 이제 부여를 탈출할 일만 남았다. 모든 거사에는 반드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법. 주몽은 세 명의 어진 벗을 얻어 이들과 거사를 같이 거행한다. 『삼국유사』에는 이들이 오이烏伊 등의 무리였다고 전한다. 대소 등 부여의 왕자들은 이미 주몽이 예사 사람이 아닌 것을 눈치 채고 주몽을 죽이려 별렀다.
드디어 벗들과 함께 부여의 왕궁을 탈출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주몽의 탈출을 알고 부여의 추격병이 뒤를 따라 오는 것이 아닌가. 앞에는 검푸른 압록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찌할 것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몽은 자신이 온 곳, 하늘을 향해 간절한 절규를 토한다. 「동명왕편」의 압권인 그 장면을 보자.
남으로 떠나 엄체수[압록강 동북쪽]에 이르렀는데
강을 건너려니 배가 없거늘
채찍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크게 한숨짓고 탄식하였다.
“하느님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
난을 피하여 지금 여기 왔소.
가엾고 외로운 이 몸을
천지신명께서는 차마 버리시려나요.“
활을 들어 강물을 후려치니
물고기와 자라들 꼬리를 맞물고
덩그렇게 다리를 놓아 주어서
비로소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쫓아오는 부여의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강을 건너는 과정이 매우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거니와, 결코 중세적 덕목으로 그릴 수 없는 고대 영웅의 용맹함과 기상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대목은 추격하는 이집트의 기마병을 피하기 위해 하늘에 기도해 홍해를 갈랐던 모세의 기적과 너무도 닮았다. 국가를 세우려고 왕궁을 탈출한 영웅의 앞에 가로 놓인 바다 혹은 강물과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하늘에 기도하여 기적을 일으켜 무사히 건너게 됐다는 이야기. 물론 추격병들은 모두 바다나 강물에 휩쓸렸음이다. 구조적으로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왜 그럴까? 신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하늘의 아들 혹은 손자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천손하강天孫下降’이라고 하겠는데, 그래서 지상에서 위기를 맞지만 결코 죽지는 않는다. 이를 ‘신화적 질서’라고 일컫는다. 만약 이들이 위기를 맞아 죽었다면 신화가 어떻게 전승됐겠는가?
하얀 사슴을 잡아 거꾸로 매달아 울게 하여 비를 퍼부어 비류국의 송양에게 항복을 받은 사실도 그런 고대영웅의 체취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드디어 고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세우자 어머니가 보낸 비둘기가 곡식을 물고 온 것이다. 이 부분을 “한 쌍의 비둘기 보리 물고 날아와/신모神母의 사자가 되어 왔구나.”고 감격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고구려 건국과정의 시련과 투쟁을 어느 신화보다도 자세히 전하고 여기에 화려한 문식을 가해서 아름다운 한 편의 서사시로 만들었던 것이다.
작품의 끝에 이규보는 “알겠노라 수성의 임금은/부지런하고 작은 일도 조심항며/관대함과 인자함으로 왕위를 지키고/예의로 백성을 교화해야/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하여/오래도록 나라를 통치하리라.”는 경계의 대목을 집어넣었다. 내우외환의 혼란스런 현실 속에서 정말로 위대한 임금이나 영웅을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마치 그의 글 「경설鏡說」에서 “때가 끼어 어두운 것은, 비록 그 겉은 침식당할지언정 그 맑음은 없어지지 않았으니, 만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서 갈고 닦더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과 일치한다. 이로 본다면 청년 이규보는 분명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영웅의 출현을 바라는 마음에서 「동명왕편」을 썼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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