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9호/기획/임규찬/우리말의 속살―무늬 1
페이지 정보

본문
79호/기획/임규찬/우리말의 속살―무늬 1
임규찬 문학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우리말의 속살―무늬 1
1.
‘무늬’란 말로 글밭을 한 번 일궈보려 한다. 정연한 글이 아니라 여러 글이 이리저리 겹을 이루기도 하고 조각보가 되기도 하는 그런 사이가 숨쉬는 글밭을 생각한다. 무늬라고 하면 흔히 거죽이나 표면을 떠올리고 거기 그려진 얼룩이나 모양을 떠올린다. 실제 사전의 정의가 그렇다. “1. 물건의 거죽에 어룽져 나타난 어떤 모양. 2. 옷감이나 조각품 따위를 장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모양.” 또 현대 국어 ‘무늬’의 옛말인 ‘문의’는 19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나는데, 한자 ‘문紋’의 한글 표기인 ‘문’과 접미사 ‘-의’가 결합한 것이다. 이 자체로 보면 무늬란 말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편으로 무늬란 말을 방목하련다. 마치 ‘풍경’이란 말이 일상적인 의미와 다르게 말 자체로 담지한 바람 풍風과 볕 경景, 그런 생명력처럼 거죽이나 표면이 아닌 안, 내부의 어떤 생명, 비밀을 무늬란 말로 품고 싶다. ‘무늬뿐인 민주주의’ 등 실제 우리는 무늬란 말을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간혹 지울 수 없는 얼룩, 지워지지 않는 흔적, 기억 등 다르게 연상할 수 있는 용례가 아예 없지는 않다. 그렇게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샘, 원천으로 쓰고 싶다. 그럴 때 무늬는 울타리를 친 고립된 말이 아니라 이리저리 닮은 무수한 말들을 끌어들이는 시내나 강이 될 것이다.
무늬는 그래서 파문, 메아리를 닮았다. 고정된 어떤 고체, 추상적인 것, 개념화된 것, 죽은 것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지남철의 언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쇠귀 신영복 선생이 참 좋아했던 말이다.
사실 무늬란 말은 ‘문학’에서 찾아냈다. 간단히 말해 ‘문학’에서 ‘학’을 떼어내고 만난 말이다. ‘학’이란 말은 특정 영역, 이른바 틀, 제도, 경계, 전문화, 관행 등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문文’만을 생각하자. 인문학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그냥 ‘인문人文’을 생각하자. 무늬는 바로 한자 ‘문文’에서 나온 우리말이다. ‘문文’은 일반적으로 글월 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文의 어원은 자취, 흔적, 결, 무늬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무늬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무늬는 ‘紋’이 아닌 ‘文’이다.
무늬는 니체의 비유를 빌면 낙타의 언어, 사자의 언어가 아니고 어린아이의 언어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출발, 유희,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 최초의 움직임, 성스러운 긍정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는 순진이고 무구이며, 창조적이고 유희적이다. 어린아이는 규정에 얽매이지 않아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과 타인을 경계짓지 않는다. 무엇보다 긍정 속에서 놀이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삶의 기쁨을 누릴 줄 안다. 성경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지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라고 했다. 노자는 “혼과 백을 하나로 엮어 흩어지지 않게 하면 기가 고르고 부드럽게 되어 능히 어린아이와 같아진다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治柔 能如兒乎”(『도덕경』)라고 했다.
가령 이솝우화를 떠올려보자. ‘이솝우화’ 하면 우리는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 정도이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자만심은 화를 부른다’와 같은 지극히 도덕적인 교훈들을 그럴듯하게 감싸안은 교육의 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솝우화에는 이런 류의 교훈은 거의 없다. 강자가 득세하고 약자는 생존에 급급한 가혹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삶의 지혜가 담긴 인간을 위한 순정한 우화집이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인이나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작가가 왜 이솝우화를 즐겨 수집하고 인용했는지 숙고해야 한다. 한 예로 「제우스와 인간」을 보자.
최초의 사람이 제우스 신에게 투덜거렸습니다. 제우스가 최초로 동물들을 만들어 놓고, 몇몇 동물에겐 강한 힘을 주었고, 또 다른 동물에게는 민첨함을, 어떤 동물에겐 날개를 주었는데, 인간에겐 벌거벗은 채로 남아 있다는 불평이었습니다.
“제우스 님, 보시오. 나 혼자만 아무런 재주도 받지 못한 채 불쌍하게 남겨져 있다고요.”
그러자 제우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준선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나는 네게최고의 재능을 주었느니라. 그것은 바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말하는 힘은 신과 인간을 모두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거란다. 그것은 어떤 힘센 동물보다 더 강하고, 가장 민첩한 동물보다 더욱 빠르다.”
그제야 신의 선물을 인식한 인간은 제우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느끼면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이솝, 「제우스와 인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도 그렇거니와 이솝우화 역시 의무와 당위와 자유를 품은, ‘낙타와 사자를 품은 어린아이’가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라는 니체의 말로 이 글밭의 표지석을 삼고 싶다. ‘거룩한 긍정’의 시선, ‘창조의 놀이’ 형식, ‘삶의 기쁨’ 표출, 무늬란 말로 ‘소설을 주 대상으로 삼은 문학평론가’란 자천타천 나 자신의 전문성, 울타리를 지우고 삶과 세상의 무늬를 알몸으로 만나고픈 ‘문’과 ‘인문’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것은 문학의 위기니 인문학의 위기니 하는 것이 실은 스스로 정형화하고 테두리짓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꾸만 벽을 만들어 갇혀가면서도 자위하는 나르시시즘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진단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문(학)’은 ‘문학+역사학+철학’이 아니라, 그냥 ‘문사철文史哲’, 그 자체가 문장이고 역사이고 지혜라는 눈으로 세상과 사람과 글을 만나고자 한다.
2.
첫 글밭을 일구려다 보니 서두가 길어졌다. 이제 본격적인 첫 삽을 뜨고자 한다. ‘무늬’란 말로 시작했으니, 제우스가 사람에게 선물한 ‘말(문자)’로 몇 가지 첫 무늬를 새겨볼까 한다. 우리는 바늘의 위쪽에 뚫은 구멍, 즉 바늘구멍[針孔]을 ‘바늘귀’라 하는데 영어로는 ‘a needle eye’나 ‘the eye of a needle’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영어에서는 ‘눈’으로 표현된다. 성서의 유명한 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그 원문을 찾아보면 “It is easier for a camel to pass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이라고 하여 ‘눈’으로 표기되어 있다. 바늘구멍을 ‘눈’으로 보느냐 ‘귀’로 보느냐가 뭐 그리 대수냐 할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보기에 따라 시각 중심이냐 청각 중심이냐 하는 문화적 차이까지 연상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규태 같은 이는 과거 우리 선조들이 최고로 치는 문화적 행위가 시각문화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청각문화의 멋으로까지 고양시킨 데 있다고 했다. “이른 새벽이면 돈의문敦義門 밖 서지西池에 모여 배를 띄우고 연꽃이 필 때 내는 소리를 듣는 청련계聽蓮契, 여름이면 나귀 타고 박석고개 마루의 노송老松 아래 모여 솔바람 소리 들으며 시부詩賦를 짓고 논하는 풍입송계風入松契의 풍류는 압권이다.” 연못에 작은 배를 띄워 연꽃 사이에 갖다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는 밤새 조용히 기다린다. 연꽃은 땅거미가 걷히면서 일시에 피어난다. 피어날 때 둔탁하면서도 청량한 미성微聲을 내는데, 이 꽃피는 소리가 ‘청련화성聽蓮花聲’이란다. 또 노송老松 밑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솔잎 사이를 가르는 솔바람 소리를 기다리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장중莊重한 소리라고 두보杜甫가 말했다던 솔바람 소리, 12음계법이라는 넓은 음역을 구사하여 이전의 작곡가들이 내지 못했던 갖은 소리를 다 낸 것으로 유명한 작곡가 쇤베르크가 이 소리만은 끝내 낼 수 없었다고 고백한 ‘풍입송風入松’이 그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소리를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 생활화했던 풍류가 우리에게 있었다. 흔히 문화론에서 시각문화=농경문화, 청각문화=유목문화로 대별하는데, 이렇게 보면 우리는 농경문화에 기반하면서도 유목문화를 접목시키는 종합적 면모의 열린 시각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반도적 기질의 바람직한 특질을 바로 그런 점에서 연상해볼 수 있다. 즉 농경문화의 기반 위에 북방의 유목, 남방의 해양 문화를 적절히 수용하여 우리 식으로 내재화하는 지혜의 슬기가 한반도의 육체에 새겨져 있지 않는가.
가령 ‘숟가락’이란 말도 한번 생각해 보자. 숟가락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짝 말이 젓가락일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서로 짝을 이루는 말이면서 왜 하나는 ‘숟’이고 다른 하나는 ‘젓’일까. 발음은 똑같이 ‘숟’‘젇’, ㄷ받침으로 나는데 말이다. 물론 사전을 보면 문법적으로 ‘술+ㅅ+가락’과 ‘저+ㅅ+가락’으로 풀이한다. “‘젓가락’'의 받침을 ‘ㅅ’으로 적는 것은 ‘젓가락’이 사이시옷이 들어간 말이어서이다. ‘젓가락’은 ‘저著+ㅅ+가락’과 같이 분석된다. 사이시옷이 들어 있는 말이므로 ‘젓가락’으로 적는다. ‘ㄷ’ 소리가 나더라도 ‘ㅅ’으로 적는 경우로는 ‘ㄷ’으로 적을 특별한 근거가 없는 ‘덧저고리, 돗자리, 엇셈, 웃어른, 핫옷, 무릇’과 같은 경우가 있다. 이와는 달리 끝소리가 ‘ㄹ’인 말에서 온 ‘반짇고리(바느질+고리), 사흗날(사흘+날), 이튿날(이틀+날)’ 등은 ‘ㄷ’으로 적는다. ‘숟가락’ 또한 ‘술’(밥 한 술)과 ‘가락’의 결합으로 볼 수 있으므로 ‘숟가락’으로 적는다.”(국립국어원 설명자료) 사실 이런 설명에 특별히 덧붙일 말은 없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속이 안 찬다. 우리 음식문화의 중추가 숟가락이라는 상상의 날개가 펄럭인다. 우리는 수저라는 말도 많이 쓴다. 그런데 수저 하면 숟가락과 젓가락을 뜻하면서도, 또 숟가락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순한 문법 차원을 넘어서는 문화와 풍속의 역사가 적층되어 있다. 숟가락이 젓가락에 선행한다는 것이고, 숟가락이 더 중심적이라는 것. 숟가락이란 말이 먼저 있었고, 여기에 짝을 맞추어 젓가락이란 말이 생겨났다. 유물의 측면에서도 숟가락이 청동기시대로 훨씬 앞선다. 숟가락에 해당하는 한자어는 없지만, 젓가락은 위에 인용한 설명에서 보듯 한자어가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숟가락은 그 자체가 고유한 우리 색채이다. ‘쇠, 솥, 숟’으로 묶여지는 계열어를 생각하면 숟가락은 ‘쇠로 만든 손(가락)’이란 멋진 말 무늬로 다가온다. 얼마나 멋진 미학이자 풍류인가? 더구나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를 견줘봐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 숟가락이다. 중국과 일본만 해도 젓가락이 중심이다. 우리는 단연 숟가락이다. ‘밥’과 ‘탕’을 생각해보라. 국물뿐만 아니라 밥도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정식이다. 숟가락을 손에 쥐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밥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게 옛날 식사예절이었다.
그런데 청련계나 풍입송계에서 이렇게 문화적 차이를 추론하는 날갯짓도 재미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단면적이고 평면적인 미감을 넘어서는, 중층적이고 융합적인 깊이를 추구했던 옛사람들의 멋진 미학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정약용의 국화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루는 남고南皐 윤이서尹彝敍(이서는 윤규범尹奎範의 자)에게 들러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 그대가 나에게 와서 자면서 나와 함께 국화를 구경하세.” 하였더니, 윤이서는, “국화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어찌 밤에 구경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몸이 아프다 핑계하고 사양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구경만 한 번 해 보게.” 하고 굳이 청하여 함께 돌아왔다.
저녁이 되어, 일부러 동자童子를 시켜 촛불을 국화 한 송이에 바싹 갖다 대게 하고는, 남고南皐를 인도하여 보이면서, “기이하지 않은가?” 하였더니, 남고가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자네의 말이 이상하군. 나는 이것이 기이한 줄을 모르겠네.” 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렇다고 하였다.
한참 뒤에 다시 동자를 시켜 법식대로 하였다. 이에 옷걸이ㆍ책상 등 모든 산만하고 들쭉날쭉한 물건을 제거하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다음, 촛불이 비추기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서 밝히게 하였다.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 이상한 형태가 홀연히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에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정연하여 마치 묵화墨畫를 펼쳐놓은 것과 같고, 그 다음의 것은 너울너울하고 어른어른하며 춤을 추듯이 하늘거려서 마치 달이 동녘에서 떠오를 제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과 같았다. 그 중 멀리 있는 것은 산만하고 흐릿하여 마치 가늘고 엷은 구름이나 놀과 같고, 사라져 없어지거나 소용돌이치는 것은 마치 질펀하게 나뒤치는 파도와 같아, 번쩍번쩍 서로 엇비슷해서 그것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서彝敍가 큰 소리를 지르며 뛸 듯이 기뻐하면서 손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를, “기이하구나.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빼어난 경치일세.” 하였다. 감탄의 흥분이 가라앉자 술을 먹게 하고, 술이 취하자 서로 시를 읊으며 즐겼다.(정약용, 「국화 그림자를 읊은 시의 서[菊影詩序] 」)
가히 최상의 풍류가 아닌가. 다산의 풍류에는 소박함 속에 창의적인 정감이 아롱이는 미학의 한 극치가 만져진다. 또 윤선도의 풍류는 어떠한가? 고산이 보길도 세연정 마루에 앉아 세연지를 굽어본다. 동서 양쪽 축대와 넓은 바위에서는 악사들이 풍악을 울린다. 음악에 맞춰 무희들의 춤사위가 나비처럼 하늘거린다. 남동쪽 산봉우리에 만든 옥소대에서도 무희들이 춤을 춘다. 춤을 추는 무희의 모습이 연못에 비추면 마침내 화려한 수묵화가 완성된다. 낙서재를 짓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재현하려 했던 고산 윤선도. 자신의 이상향을 인공적으로 구축한 보길도에는 이처럼 화려한 예술향과 풍류미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
다음으로 ‘천사’와 ‘선녀’란 말을 떠올려 보자. 천사하면 영어로 Angel, 즉 유태교와 이슬람교에 나타나는 천사의 자태가 연상되며, 그 가운데에서도 대개 날개를 달고 있는 아기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서양에서 천사의 형상은 매우 다양한 바, 때로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대개 날개 여섯을 가지고 두 날개로는 얼굴을,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아다니거나, 각각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등 그 형상이 매우 기괴하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에 날개가 달린 ‘괴물’ 형상이다. 그런데 그런 ‘천사’를 우리는 지금 ‘가장 선한 자’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정작 사라진 우리의 아름다운 말이 ‘선녀’다. 동화 ‘나무꾼과 선녀’를 떠올려 보라. 서양의 날개에 견줘 하늘하늘 너울거리는 날개옷이 아릿하지 않는가. 이어령은 일찍이 그 점에 착안, “서양의 천사는 날개를 달고 있지만, 동양의 선녀들은 펄럭이며 나부끼는 옷자락의 리듬으로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역시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이한 문화적 차이를 여러 각도에서 추론해볼 만하다.
그렇다, 상상적인 형상물에서 동서양의 차이는 확연하다. 서양의 경우는 대개 인간과 동물을 직접 이종교배하여 태어난 듯한 ‘제3의 괴물’로 형상화하는 반면, 우리의 경우는 형상 자체가 변하지 않은 채 옷 등으로 감싸거나, 혹은 천년 먹은 여우처럼 변신의 방식을 취한다. 아마도 불교 등의 전생담이나 업보 등 우리네의 오랜 순환적 연기적 사유관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요즘 천사라는 말만 횡행하지 선녀라는 말은 아예 보기 힘들어졌다. 그것도 고작 점집으로 남겨지는 형국이니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악행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아 귀신이나 벌레로 태어날 수 있다는 윤회사상이나 업 사상에서 멀어진, 그리하여 옛것은 사라지고 새것은 아직 자리 잡지 못하는 도덕적·윤리적 타락과 혼돈의 한 상징이기도 할 터이다.
*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우리말이 무지개이다. 영어나 한자어 등에 견줘보면 더 그렇다. 무지개는 물과 지게 호戶의 결합이다. 영어 rainbow는 비rain와 활bow의 결합이다. 영어는 말하자면 비가 만든 활, 비로 만든 활, 즉자적 형상이다. 한자어는 홍虹, 홍예로 쓴다. 虹 자가 핵심으로 거기서 벌레 충(훼, 虫)이 원형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벌레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또 다른 뜻, 살무사, 즉 뱀, 거기서 좀 더 나가면 용의 한 일종으로 이무기에 비유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무지개의 형상에 비추어 이 또한 쉽게 공감을 얻긴 힘들다. 반면 순우리말 무지개는 이것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물+지게’라 해서 우리가 아는 농기구 지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지게 호戶’, 즉 위가 반원형인 문門을 뜻한다. 바로 이상향을 함유하는 물로 만든 문이 무지개이다. 그 문에 들어서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무지개는 이처럼 단순한 형상 묘사가 아닌 우리의 상상력을 한껏 아름답게 채색한 자연의 신비가 아롱댄다.
그런데 요즘 무지개 색깔은 몇 가지 색이냐 하면 어린 초등학생부터 누구나 다 ‘일곱 가지’ 하며 ‘빨주노초파남보’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오색무지개’‘오색영롱한 무지개’라고 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자연 색깔을 좀 더 세분화, 체계화한 거지 뭐 별거냐 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하늘과 바다와 들판의 싱싱함을 형용할 때 뭐라 말하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하늘이 푸르다(파랗다), 바다가 푸르다(파랗다), 들판이 푸르다(파랗다)고 누구나 말할 것이다. 진짜 과학의 잣대로 재면 ‘푸르다’, ‘파랗다’, 청색靑色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왜 신호등 가운데 하나는 ‘녹색’인데, 우리는 여전히 ‘푸른’ 신호등이라고 할까? ‘오색’ 무지개에 담긴 우리네의 어떤 폭넓은 정서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산 감성이 거기 어룽져 있다.
사실 무지개를 오색으로 보는 데는 우리네의 남다른 ‘청색’ 관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곱 가지 색 가운데 ‘초파남’을 ‘파랑(청색)’으로 묶어내는 광역의 색상. 우리네는 백(天)·적(地)·청(生)·흑(地下) 등 사분법을 기본 색상으로 가져왔다. 그리하여 동(靑)·서(白)·남(赤)·북(黑)이며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 등 모든 방위나 계절 감각, 입맛, 사람의 덕목이나 강상網常, 그리고 사람의 이름이나 운명까지도 사색으로 나타내는 철학이 거기에 합세한다. 사색 문화권에서는 물이건 식생植生이건 지상의 모든 생명은 모두 ‘푸르다’로 묶어내는 포괄 관념이 생겨난다. 그래서 굳이 ‘청’과 ‘녹’을 가릴 필요가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청색역靑色域을 끌어안은 한국인의 우주관과 철학색이 거기 깃들어 있다.
또 물빛[靑]과 초목빛[綠]을 분화시키지 않은 것도 ‘푸르다’는 생명력을 ‘물’로 여긴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봄에 신록이 싹틀 무렵 우리는 나무에 ‘물’이 오른다고 한다. 물빛과 초목의 나무 빛이 같다는 발상은 바로 생명사상에 기반한 생태주의의 발로이다. ‘물이 맑다’를 청淸으로 표기하는 것도 물은 깨끗하고 맑을수록 푸른빛을 띤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보면 요즈음의 시대적 표지로 등장한 서양의 ‘녹색green 사상’보다 오히려 우리의 ‘청색사상’이 그 범위나 포괄성에서 훨씬 넓고 깊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풀에서 나온 ‘푸르다’가 곧 세상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청색 사상으로 확산, 응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사자성어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런 만큼 과학의 발달에 따라 색깔에 대한 선명한 분화의 지식은 그대로 또 확대 발전시킬지언정 그 기본바탕에 깔린, 저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어린이날 노래」)과 같은 어린아이다운 문화나 철학은 쉬 버릴 일이 아니다.
문득 몇몇 우리말을 생각하다 그 말이 펼쳐내는 무늬를 따라 우리네 역사와 문화의 속살을 이모저모 자유롭게 생각해 봤다.
- 이전글79호/미니서사/박금산/‘성’과 ‘연봉제’를 오해하는 박 교수 23.01.09
- 다음글79호/고전 읽기/권순긍/“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노라”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 23.01.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