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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미니서사/김혜정/밤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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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미니서사/김혜정/밤의 이방인
김혜정 소설가
밤의 이방인
태풍이 온다더니 오후 들면서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아침에 집을 나간 개 유노가 돌아오지 않아서 불안했지만 이모와 나는 식탁에 앉았다. 저녁나절 내내 둘이서 해안가를 돌며 유노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1년 전 해안가를 어슬렁거리던 개가 이모를 따라 집으로 왔고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모는 그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며 유노가 무슨 사고를 당했을 거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나는 원주인을 찾아갔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저 위로 차원에서 한 말일 뿐이었다. 내가 다시 유노를 찾으러 나가자고 했을 때 이모는 태풍이 온다고 일축했다.
나는 이모가 TV를 보고 있는 틈을 타서 다시 해안가로 나갔다. 꼭 유노를 찾아 나섰다기보다는 그저 해안가를 걷고 싶었다. 바람 소리만으로도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나는 이런 날의 바다가 좋았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멀리 희끗희끗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유노! 그런데 유노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노 옆에 남자가 서 있었다. 둘은 뭔가 심각한 대화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열중해 있었다. 이 밤중에, 더구나 태풍이 올 거라는데 해안가를 어슬렁거리는 남자라면 일단 경계하고 볼 일이었다. 하지만 유노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이상하게 그가 유노의 원 주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유노를 향해 갔다.
“유노!”
유노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유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남자를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흰 피부와 말쑥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외지에서 왔으며 퍽 괜찮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작가 혹은 학자 부류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에게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유노가 가족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남자의 목소리에 기품이 배어 있었다. 나는 왠지 그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와 해안가를 거닐고 싶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기는 나도 처음이었다.
“갓바위는 어디쯤인가요?”
오늘 같은 날은 그 바위에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해야 하는데 다른 말이 나왔다. 저를 따라오세요.
갓바위로 가는 길이 가팔라서 평상시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모는 혼자서는 절대 거기에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갓바위에는 왜 가려고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람이 거세지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가는 게 좋겠어요. 태풍이 오고 있으니까요.”
남자의 눈에 섬광이 스쳤다. 섬 사람이 아니라도 태풍이 부는 바다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을 거였다. 자연의 광포함에 대해. 그럼에도 굳이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태풍이 올까요?”
잠시 멈춰 섰던 그가 다시 발을 떼는 순간, 나는 가슴이 서늘했다. 유노도 뭔가를 느꼈는지 얼른 그의 바짓자락을 물었다. 유노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순했다. 아니, 유노와 그 사이에 각별한 무언가가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쫓기는 심정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지금은 육지로 나가는 차도 끊겼으니 묵을 곳이 필요하면 오라고 하면서 이모 집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가 고맙다고 말했다. 그가 작별인사인 듯 유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순간, 나는 그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유노는 그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그를 뒤따라갔다. 나는 유노를 부르지 않았다.
이모에게는 유노를 봤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비바람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유노 착하기도 하지, 이모가 유노에게 밥을 줄 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유노는 언제 돌아온 걸까. 나는 방문을 열었다.
“어젯밤에 갓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서 죽었대. 도시에서 온 사람 같다는데. 유노가 그 사람 옆에 있더래……”
이모의 말을 들으며 나는 유노를 쳐다봤다. 유노는 나를 보고도 꼬리를 흔들지 않았다.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 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송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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