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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제8회 김구용시문학상/수상자 허은실/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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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제8회 김구용시문학상/수상자 허은실/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외 4편
입안 가득 손톱이 차올라
뱉어내도 비워지지 않네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
더러는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네
숲은 수런수런 소문을 기르네
바람은 뼈마디를 건너
몸속에 신전을 짓고
바람에선 쇠맛이 나
어찌 오셨는지요 아흐레 아침
손금이 아파요
누가 여기다 슬픔을 슬어놓고 갔나요
내 혀가 말을 꾸미고 있어요
괜찮다 아가, 다시는
태어나지 말거라
서 있는 것들은 그림자를 기르네
사이를 껴안은 벽들이 우네
울음을 건너온 몸은
서늘하여 평안하네
바람이 부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네
몸을 벗었으니 옷을 지어야지
저녁의 호명
제 식구를 부르는 새들
부리가 숲을 들어올린다
저녁빛 속을 떠도는 허밍
다녀왔니
뒷목에 와 닿는 숨결
돌아보면
다시 너는 없고
주저앉아 뼈를 추리는 사람처럼
나는 획을 모은다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되는가
속으로만 부르는 것들은
네 이름이 내 심장을 죄어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 와 있다
도요라든가 저어라든가
새들도 떠난 물가에서
나는 부른다
검은 물 어둠에다 대고
이름을 부른다
돌멩이처럼 날아오는
내 이름을 내가 맞고서
엎드려 간다 가마
묻는다
묻지 못한다
쭈그리고 앉아
마른세수를 하는 사람아
지난 계절 조그맣게 울던
풀벌레들은 어디로 갔는가
거미줄에 빛나던 물방울들
물방울에 맺혔던 얼굴들은
바다는 다시 저물어
저녁에는
이름을 부른다
목 없는 나날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어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의 말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서로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입덧
익숙하던 것들이 먼저 배반하지
그러므로 어느 날
밥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너의 멜로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
검은 행에 변종의 언어가 파종될 때
냉동실에는 수상한 냄새들
친밀한 너를 혐오한다
다른 살을 맛보고 싶어
맹목적으로 아밀라아제
가자 하니 어디로
석유를 마신 듯 이글거리는 내부여
종일 배를 탔으니 어디로 갈까
별을 낳기 위해
중력을 거부해야 하므로
소화되지 않는 말이
밑구녕이 거꾸로
치밀어 올라오고
벚나무 수억의 유방 부풀어
가렵다
접신한 듯
미열에 들뜬 나무들
제 몸을 게워놓는다
들썩이는 치열
나는 나로부터 멀다
헝클어지는 지문
불화로부터 별의 머리카락은 자란다
습성은 문득 낯선 얼굴
이후는 다시 이전이 될 수 없다
킁킁, 이 냄새는 뭔가
심사평
역설을 원융圓融으로 육화肉化한 감각적 성취
예선을 거쳐 나에게 온 시집은 3권이었다. 매년 나는 이 상의 심사자라기보다 한 해 동안 젊은시인들의 낸 시집 중에서 가려 뽑아 올라온 시집들을 통해 젊은시인들의 시적 수준과 경향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심사에 올라온 3권의 시집은 시적 감각이나 표현능력들도 모두 한결같이 시를 잘 쓴 시인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심사자가 저들 나이의 수준에 비해 볼 때 도저히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시적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어쩌면 저리 시들을 잘 쓸까 부러워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예년에 수상한 시인들에 비해 어딘가 이 작품이다 하고 손이 가기에는 좀 망설여지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젊은 세대의 시인들의 작품이 완전히 도토리 키 재기가 아닌가 라는 느낌이 읽을 때마다 들어서이다. 나는 일전에 제법 유명한 시창작교실을 나온 대부분의 시인들의 시쓰기 전개방식이 거의가 천편일률적인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런 편향은 혹시 젊은시인들의 시쓰기가 자생적인 힘에 의지하기 보다는 대학의 시강의나 같은 세대의 시인들끼리 알게 모르게 비슷한 패턴으로 닮아가거나 어디서 배운 것들에 많이 기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닌가 의심해 본다. 좀 모자라고 거칠지만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시를 보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다. 나는 이럴 때마다 가끔 구용의 시적 자세와 시 경향을 떠올린다. 심사자의 시사詩師였던 구용은 자주 자신의 시를 당대에 놓고 싶지 않다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현세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 시인의 마음이고 시일 텐데 스승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실까 의아해 왔다. 그것은 남의 흉내를 내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시세계를 가지려는 구용의 시인정신이었다. 그러므로 구용의 시는 초현실주의 경향의 난해시이면서도 자기만의 동양적 사유나 불교사상이 깃든 독자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금년도 김구용시문학상으로는 허은실의 『나는 잠깐 설웁다』를 뽑는다. 제목의 설웁다는 아무리 시적 아우라를 감안한 표현이라 하더라도 서럽다, 섧다로 표기해야 하지 않을까. 설웁다는 내 눈에 좀 어색하다. 누구의 시집이든 그 속에 깃든 허물이나 못마땅한 부분이 한두 가지 아니듯이 허은실의 시집에도 예를 들자면 「농담」이란 시의 2연 “토요일 오후/꽃 싣고 다니는/꽃집 주인은/돈 벌어 좋은/꽃집 주인.”은 너무 표현이 싱거운 감이 있고 시의 이름을 빙자한 농담 같다. 그 옆 페이지의 시 「검은 개」도 검은 개가 두 마리인 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또 1연의 서사적 서술에 비해 2연, 3연의 비약이 너무 돌발적이다. 1연에서 시의 시간과 공간성을 2연과 3연에 어떻게 연관지어야할지(상상력을 동원해)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고 “-다”의 종결어미가 시의 끝 연에서는 경어체로 된 것이 시인의 의도된 복선이라 하더라도 의해하기 힘든 점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하면서도 나는 허은실의 작품에서 이 시인이 자라온 환경이라든지 가족사적인 관계, 토착적인 언어들을 동원하여 시로 만드는 능력을 높이 샀다. 이 말은 요즘 젊은 시인들이 시가 좀 종족이나 환경 풍토 등과는 너무 거리가 먼 듯이 좀 들떠 있는 느낌이 드는 데 대한 노파심이 작용한 까닭도 있지만 허은실 시인의 시집 속에 좋은시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시 「등긂은」은 모든 사물존재는 둥글거나 둥글려고 하는 응축성을 은연중 지니고 있다는 원환상징성을 띤 작품으로 시적 리듬이 살아 있고 생생력적인 생성하는 몸을 보여주는가 하면 다른 한 편의 시 「Man-hole」에서는 “눈이 날린다/구덩이 위로//얼어붙은 거리 위로/혼비백산 흩어진다//내몰린 먼지들은/ 구석에서 뭉친다” 처럼 사라지고 소외되는 우리들의 일상이나 사물들의 모습, 즉 흩어지고, 사라지고, 얼어붙고, 내몰리고 하는 것들에 대한 페이소스가 있는 것은 이 시인의 편향적으로 시를 쓰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이 대목에서 허은실 시인이 시집 제목을 『나는 잠깐 설웁다』의 ”설웁다“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긍정하게 된다. 이 시인의 시집에서 나타나는 주된 흐름이라 할 ‘일상처럼 소멸되어 가는 것에 대한 슬픔’이 마치 백석의 「여승」에서 보이는 서러움의 양태보다 더 간절한 것이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 않을까 하는 시적 느낌을 가졌었다. 시를 잘 쓰는 좋은 시인이 되시기를 바란다./강우식(글) 허형만 장종권
수상소감
모르겠습니다. 수상소감이란 건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마감을 넘기고 독촉전화를 받고 노트북을 열고도 막막해서, 또 몇 시간을 그냥 보냈습니다. 이전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더욱 모르겠습니다. 주눅만 들어 더 심란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냥, 쓰기로 합니다. 맨마음으로 멋부리지 않고요.
몰랐습니다. 네, 저는 김구용 시인을 몰랐습니다. 시집 두어 권이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었지만 한 편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제서야 시집을 꺼내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그리고,
놀랐습니다. 선생이 살아계셨던 시대를 생각하고 막연히 상상했던 시풍이랄까 감각이랄까 세계랄까 그런 것들을 모두 배반하는 시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것은 크고 깊어 보여 하룻밤의 몇 편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워졌습니다. 김구용 시인을 알아가는 것으로 올해의 시공부를 삼아야겠다 결심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왜 저에게 이 무거운 상을 주셨을까요. 저는 한두 줄로 끝나버리는 약력이 민망한, 첫 시집을 겨우 세상에 내놓은 처지인데요. 그래서 선정기준을 찾아보았습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창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새로운 시에 대한 실험정신이 가득한…’이랬습니다. 더 모르겠어졌습니다. 이 기준에 저는 한참 부족하니까요. 저 문장을 숙제로 받아들고, 그래도 다만 스스로도 선정 기준에 부합하다고 자부하는 한 가지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입니다. 그래서 이 상이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기웃거리지 않고 계속 외롭게 써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어떤 존재가 느껴졌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시라는 건 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 매번 처음 같아 어떤 땐 울 것 같은 마음이 됩니다. 다만 저의 경우에 관해서라면 이 하나는 알겠습니다. 삶에나 시에나, 치열하고 정직할 때만 시는 ‘옛다, 시 받아라!’ 하고 저를 던져주더라는 것을요. 시는 질투가 심한 애인이란 것을요. 다른 즐거움을 탐하고 딴놈을 기웃거리면 가차 없이 떠나버린다는 것. 그것만은 더욱 알겠습니다. 외롭고 막막하게 모르는 시를 더듬어가는 이들과 술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리토피아》와 심사위원들님께 무겁고 더운 인사를 올립니다./허은실
허은실 2010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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