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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소시집/박혜연/벌판 위에 홀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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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18회 작성일 19-06-2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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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소시집/박혜연/벌판 위에 홀로 외 4편



벌판 위에 홀로 외 4편


박혜연


거기
아주 오래 전부터
한 사람 서 있다


머리카락은 노을 속에서 붉고
주먹은 허공을 가볍게 쥐고 있다
나풀거리는 옷자락 위에
얼굴 없는 바람은
제 모습을 끝없이 그려 넣고


타는 노을과
가벼운 허공과
얼굴 없는 바람 사이에서
몸 떨었을지라도


한 생을 같이 한 저 하염없는 것들
다시 태어나도 그리울 거라고




모멘트momuent


순간이었다고 한다
오남매 막내로 7년을 살아온 언니는
어느 날 나에게 막내 자리를 내 주었다고 했다
나는 육남매 막내별이 되었다 순간이었다


모든 것에 순간이 있다
저 먼 먼 바다에서 육지로 막 올라 온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 첫 발자국이라던지
풀잎을 스치는 뱀의 붉은 혓바닥이라던지
영문도 모른 채 울컥울컥 별에 대한 슬픔이라던지
유독 내 귀에 잘 잡히던 당신의 목소리라던지


골목을 걸을 때면 항상 그 길 끝에
하늘로 이어지는 길이 나올 것 같았다
별을 징검다리 삼아 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물병자리에 술을 따라 마신다
별들이 몸 안 여기저기서 돋아나고
온몸이 투명해지는 순간
나를 닮은 별 하나 지상에서 뜨는
별똥별 떨어지는




피어오르는 함성


꽃송이가 터졌어요, 내가 생각하는 거기에서
내가 생각하는 꼭 그쯤에서
일제히 피어올랐죠
나는 환호성을 질렀어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지요


오랫동안 숨죽여 지켜왔는데
거센 바람 부는 날에는
종일 지지대로 쭈그려 앉아 바람을 맞고
굵은 비 내리는 날에는
우산이 되어 온몸으로 비를 맞았어요
물론 이런 정성을 들인다고
꼭 꽃이 핀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지요
그냥, 꽃을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 손으로 꽃을 피워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 햇살 넘실대는 좋은 시절에
꽃 한 송이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그래요
너무 슬픈 일이라 생각했어요


자꾸만 웃음이 나요
오랫동안 꽃을 피우지 못해
아팠던 몸을 털며
나는 이제 맘껏 웃을래요
저기, 돋아난 꽃들 뒤로
푸른 망토를 걸친 여름이 웃고 있네요




송악*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절벽에 길을 내는,
저것은 푸른 방이다


어미 나무 커다란 밑둥에
공기뿌리 내밀어 터를 잡고는
벼랑 같은 날들에 못질을 하고 있다


혼자서는 땅에 터를 잡을 수 없는 몸
벽을 감싸고 감싸 사나운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성벽 쌓고 있다


푸른빛 새어나오는 곳에
선운사로 향한 창문 하나 내걸고
단단한 망치질로 마디마디 기둥을 잡아가는,


바람의 날개 위에 제 몸을 실은 새처럼
거친 세상 길 없는 길을 걸어 올라가는
절벽 위 저 푸르고 푸른 방


*고창선운사 소재. 천연기념물 367호.




비 오는 날


빗줄기 사이사이 젖지 않은 자리가 많다


나는 몸을 접고 또 접어


그 얇은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쏟아지는 소리, 아득하다


가만 보니
빗줄기 자리자리 사람들이 많다
몸을 접고 또 접었다
비 오는 날은 모두 몸을 접어
빗속에 앉아 있나보다


접힌 몸과 몸 사이



■시작메모


내 앞을 지나가는 무수한 시간들을 본다.
이 시간 속을 예전의 내가 걸었을 것이고
앞으로 올 내가 걸을 것이다.
무한한 시작과 무한한 끝
그 간극에서 만났던 수많은 풍경과
그 풍경 위에서 만났던 수많은 너와 내가
나는 벌써부터 그립다.



박혜연 2007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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