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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김혜영/조개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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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김혜영/조개들 외 1편
조개들 외 1편
김혜영
오후 3시의 바다는 나른하지. 김춘수 논문을 준비하는 조개에게
전화를 걸었지. 언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바다가 아는 비밀이지
조개는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지. 껍질 바깥에는
자갈치 아줌마의 은빛 칼이 기다렸지. 그게 무의미인 거야
조개 빨아줘
어디를 빨아줄까
낯선 메시지 문자를 해석하는 가리비
두 개의 딱딱한 껍질은 날개가 퇴화한 거야
날개의 깃털이
조개 등에 내려앉아 흔적을 남긴 거지
미래의 조개들은 뼈의 기억을 지우고
말랑말랑한 살들로 이루어진 글을 읽겠지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분석하겠지
모르는 게 있으면
그 부드러운 살결을 애무하는, 파도에게 물어봐
식빵을 구울까
섹스를 할까
커피를 내리는 아침식탁에서
남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냉소적인 입술로 말하지
아줌마라는 말, 참 신비해
자갈치 아줌마, 지하철 아줌마, 청소부 아줌마, 말랑말랑한
유방, 뱃살이 통통한, 흰 머리가 희끗희끗 반짝이고, 소녀처럼
웃었다 웃는 주름살 …… 가끔, 허무한 듯
응시하는 바다, 툴툴 털고 뒤뚱거리는 엉덩이
무의미해서 …… 점, 점, 신비해지는 아줌마라는 말,
데레사 성녀의 약간 벌어진 입술처럼
무의미해서 …… 더 에로틱한 목소리로 진화하는 말
조개의 살결을 물들이는 거친 몸짓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오후 5시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떠나는 조개들
사바나 초원에서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사바나 초원
사자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갈기를 휘날리며
산책을 하다가 시퍼런 눈알을 굴리다
쏜살처럼 돌진한다
무리에서 뒤처진 사슴의 척추를
앞발로 툭 친다 모가지를 콱 문다
사슴의 사지는 축 늘어지고
붉디붉은 핏방울이
뚝, 뚝,
풀잎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사바나 초원에서 제물이 된 사슴처럼
미추천이라는 메일을 받고
해고라는 말을 들었다
사형수 목에 감긴 밧줄처럼
황홀한 주검이 불러오는 한낮의 여유
햇살이 초원을 쓰다듬던 손으로
사자의 두 눈을 잠재우고
신성한 식욕이 잠시 잦아드는 오후
김혜영 199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산문집 『아나키스트의 애인』. 제 8회 애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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