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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송진권/원근법 배우는 시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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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35회 작성일 19-06-2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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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송진권/원근법 배우는 시간 외 1편


원근법 배우는 시간 외 1편


송진권


빼빼 마른 여자가 바닥에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집입니다
모르는 돌과 꽃에서 뽑아낸 안료를 색색으로 펼쳐 놓고
여자는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그려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포개지고 겹쳐집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새 떼입니다
몇 마리나 되겠느냐고 여자는 묻습니다
대답을 못 합니다
덧칠한 그림 위에 또 덧칠된 새들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화구를 걷습니다


방안은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옵니다
구름들 나무들이 쏜살같이 그 집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새들이 퍼덕이며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릅니다
왜 그 새 떼들이 지금도 내 주변을 맴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내가 피로 뭉쳐지던 때
형체도 갖지 못했던 붉은 덩어리일 때의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청춘 고백


우리는 그 짐승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그 짐승은 발굽이 무르고 뿔이 있었으나 뭉툭했습니다
목을 옭아매고 사지를 묶자 그 짐승
눈만 희번덕이며 저항도 하지 못했습니다
겁에 질린 짐승의 외마디 울음소리라니


미나리꽃 희게 무리지어 우거진 도랑에서 놈의 멱을 땄습니다
흰털을 적시며 핏물은 도랑물에 낭자하게 풀어지고
숫돌에 칼 갈아 가죽 벗겨 널어놓고
우리는 배를 갈랐습니다
뱃속에는 형체가 갖춰지지 않은 분홍색의 새끼들 대여섯 마리가 들었고
우리가 칼을 대자 그것들은 뿔뿔이 달아나려고 몸을 뒤척였습니다
탯줄을 자르고 우리는 그놈들을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물에 흘려보냈습니다
큰 통에 내장은 내장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나눠 담고 앉아서
생간을 먹었습니다


굵은 소금 찍어 붉게 붉게 웃어가며
맑은 술을 나눠마시고
피 묻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손에 아직 남은 핏자국을 닦으러 물가에 앉았습니다
낄낄낄낄 물에 비친 얼굴들은
기묘하게 일그러져서 일렁이며 흘러갔는데요
낄낄낄낄 우리는 그 표정들을 물에 흘려보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챙기고
저마다 고기를 나누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송진권 2004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자라는 돌』.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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