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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김은자/밍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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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김은자/밍크 외 1편
밍크 외 1편
김은자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가 예배를 보아요.
전화벨은 무음진동으로 바꾸어 놓고
설교시간 내내 졸아요.
기도시간이 되자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해요.
어깨를 들먹일 때마다 짐승의 털들이 살아나요.
그들도 한때는 뒷발에 달린 작은 물갈퀴로 물고기를 잡아먹었을 테지요.
한 줌의 온기를 훔친 죄를 변제하는 시간이 제사예요.
죽은 듯 산 듯 체온으로 존립하는 껍데기가 기름져
아침이 번들거려요 내가 뭐랬어요?
허물을 낚아채 조립한 것은 죄라고 외경에 써있어요.
짐승의 털로 감싸인 그녀.
허물로 옷을 지어 입으면 부자가 될 줄 알았는데
껍데기를 입고 가난한 눈물을 흘리는 여자
누군가도 그 허물로 옷을 지어 입고 체온을 지탱하며 살 테지요.
비곗덩이처럼 뚱뚱한 아침
두 손을 모은 여자가 거짓말을 해요.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비를 털고 일어난 풀처럼
밍크들이 눈을 떠요.
겉옷의 배후에는 수많은 직립들이 모로 누워 숨져 있지요.
물 속 끝까지 따라 들어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걸터앉아
습격당한 것들에게서 도살의 피냄새를 풍겨요.
찬송소리가 들리고 더운 김을 뿜어내는 파이프 오르간
짐승의 맨살을 걸친 여자가 방언처럼 애원해요.
조금만 더 죽음을 끌고 다니게 해달라고 간구해요.
아직도 전화벨은 무음진동
예배가 끝날 때까지 어느 죽음 하나 입을 열지 않아요.
한 올의 슬픔
한 올이 나를 찌르던 그 해, 스물이었지.
한 올로 찢겨져 더운 계절을 바시락거리고
슬픔에 몸을 기대어 맑게 펄럭였지
한 올이 깃발처럼 우리를 때렸지.
청춘의 끝에는 예리한 갈퀴가 달려 있어
축축한 한 올이 되어 뒹굴었고 우리는 짐승처럼
지푸라기처럼 울었지
서로의 이름을 입술에 묻히며 종말처럼 물들어 갔지
한 올에 대하여 묻는 자는 한 올의 새가 되어 날아가리니
머리카락 한 올도 잃어버리지 않는 밀랍의 시간
모든 것은 한 철에 일어난 일이었지
바람을 베어 달아난 산국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
폐부 깊숙히 비수를 꽂는 눈빛 속에서도
흐느끼던 청라의 목소리
우리는 빈 손이었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속된 채 귀머거리처럼 뒹굴었지
한 올이 긴 혀를 내밀어 상처의 언저리를 핥아주면
뱀처럼 뒹굴며 말라갔지
언제나 뒷면이었지
우리는 불면이었지
가끔은 슬픔 한 올을 입에 넣고 혀로 꾹꾹 씹었지
한 올의 실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하얀 방을 나비처럼 빠져 나갔지.
빠져 나간 것들이 플라타나스처럼 웃으며
한 잎 두 잎 낙하할 때면
어른이 된 듯
가늘고 긴 울음들을 한 올로 벗겨냈지
삐걱거리지 않는 가난은 무소의 뿔처럼 견고했고
저녁내 비가 내려도 별이 떴지
김은자 2004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외발노루의 춤』, 『붉은 작업실』, 『비대칭으로 말하기』 등. 산문집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온다』등. 현 중앙일보 문학칼럼 <문학산책> 연재, 현 뉴욕일보 시칼럼<시와인생>연재, 현 뉴욕166AM K RADIO 에서 ‘시詩쿵’ 문학프로 진행. 붉은작업실 문학교실 운영.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당선, 윤동주해외동포문학상, 해외풀꽃시인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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