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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천세진/그대가 보낸 문장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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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98회 작성일 19-06-2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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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천세진/그대가 보낸 문장 외 1편


그대가 보낸 문장 외 1편


천세진


그대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문장들이 잘 익으라고
아랫목에서 오래 묵혔다 보낸 건지
지푸라기 군데군데 묻어있고
그 사이 발효가 잘 되었는지
쿰쿰한 아랫목 냄새 피어오르고
문장들 사이 곰팡이도 보이는데


이제 막 피는 곰팡이들의 갓 위에
그대가 끝내 쓰기를 주저했을 문장들
비밀의 빗장이 풀려 또렷해지고 있는데


써내려가자 마자
문장들이 너무 또렷해질까 봐
시간에 맡겨두었을 것인데
편지가 너무 늦게 도착했거나
너무 일찍 도착했더라면
여러 번 주저했을 문장들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 어쩌자고……


그러길 바란 건지 모를 일
종이에 적은 문장들까지도
곰팡이가 덮어주기를 바랐는지 모를 일


지금 피어나는 문장들 말고도
다른 문장들이 또 있었는지 모를 일
한숨이 길게 이어졌을 테고
모든 문장에 같은 시간을 불어넣지는 않았을 테니


서러운 이의 영혼은 흰빛이라는데
편지를 열었을 때
여리게 흩어지는 흰빛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주저하던 문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발효되어
부끄럽게 빠져나간 것인지


그대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애완愛玩의 문장들



그대를 만나러 가던 골목에서
몇 개 문장을 얻고
세계의 자궁 깊이 파고 드는 노숙의 웅크림에서
몇 개 문장을 적선 받았다


그대를 만나 손을 맞잡았을 때
지문指紋의 산맥 너머로
몇 개 문장이 건너왔다


그대를 안았을 때
몇 개 문장이 또 건너왔다

그대가 입을 닫자
주점 벽 가득 돋아 오르는 문장들
숨기고 싶거나 증거가 될 문장들


그대가 격하게 술잔을 기울이자
탁자 아래로 강처럼 흘러가는 문장들

그대가 들려주는 애완愛玩의 역사,
개, 고양이들이 핥아먹었다는 문장들
나는 그대의 애완愛玩이 아니어서
맛이 없는 문장들


카페 창가로 자리를 옮겨
더치커피 문장을 마실 때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문장들
붉은 얼굴의 문장들
검은 얼굴의 문장들
무수한 그대가 옷깃 아래 흘린 문장들


그 문장들을 잽싸게 줍는 일에서
나의 문장은 시작되었고


유기된 주인 없는 문장들에게
목줄을 매고 특허권을 부여하여
애완의 문장 한 채를 짓는다


천세진 2005년  《애지》로 등단. 시집 『순간의 젤리』. 문화비평가,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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