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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김서은/공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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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김서은/공간 외 1편
공간 외 1편
김서은
조금 슬프고 조금 아늑하다, 휑한 하늘 한 귀퉁이인가 먼지나라 먼지들이 비행운이 없이도 하얗게 날고 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누군가 나에게 속삭인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을 때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먼 바다를 생각하는 순간에도,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불쑥 공간이 손을 내민다. 아직은 따듯하다 고요한 우주의 한 조각을 베어 먹듯이 허겁지겁 먹어대던 그 많은 밥 알갱이들, 미처 소화되지 못해 어지러운 멀미의 날들이 이곳에선 낮은 음계의 음악처럼 귀에 익는다. 우주의 한 조각에 비루한 몸을 기대는 것이 이렇게 슬프다니! 오래된 연인처럼 공간이 나를 감싸 안는다 부지런히 시간을 톱질하던 당신 속으로 내가 스며든다. 조금 슬프지만 아늑하다. 하루분의 일조량으로 더욱 단단해진 무수한 공간 속으로 이름 없는 별들이 지고 있다 이곳은 슬프고 조금 아늑하다.
기대지 마시오 추락위험!
뒷모습이 뒷모습에 떠밀려
그림자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때
첫 번째 하늘은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우거진 해안선을 따라
기억 속으로 바스라져 갔다
어느 날 순간의 감정이 또
다른 감정의 가지를 흔들어대고
한 가지는 한 가지를 휘감아 오르자
당신의 등은 오래된 나무처럼 휘어져갔다
나무의 깊이와 높이로 나무의 계절은 짙어지고, 흘러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지하 1층에서 지상 10층을
칸칸이 오르내리는
저녁의 외투자락들 나는
슬픔의 안과 밖을 만진 것처럼
어둡고, 추웠다
일만 번 비상을 예행하는
새들의 울음 몸짓
빛나는 단 한 번의 추락을 위해
저 머나먼 페루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허공에 뿌리를 심은 엘리베이터,
발밑으로 모여드는 벼랑의 시간
차가운 입술로 주문을 외운다
기대지 마시오, 손대지 마시오
추락위험!
가슴 한 쪽을 열어 보이는
최후의 구름이거나 최초의 하늘이거나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김서은 2006년 《시와 세계》로 등단. 시집 『안녕, 피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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