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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이시경/제국의 혁명가 외 1편―빨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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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신작시/이시경/제국의 혁명가 외 1편―빨리빨리
/제국의 혁명가 외 1편
―빨리빨리
이시경
지금은 빛의 시대, 소식을 나르고 정보를 처리하고
속도가 중요한 세상으로 바뀌었으나 제국은 여전히
고전을 답습하고 있다.
카스트나 다름없었다.
상전이 앞서가면 종들이 뒤따른다. 제국은 철저한 계급 사회. 명사 형용사 동사 부사 순으로 다녀야 한다. 순서를 바꾸는 것은 반역, 그것이 율법이다. 제국에서 하는 일은 언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서 문장을 만드는 일, 톱질과 망치질 소리가 쉴 새 없이 넘쳐나지만 그러한 제도로는 할당량을 채울 수 없다. 일이 많아질수록 양반들은 풍류에 몰입했고 일은 모두 아랫것들 차지다.
기회를 노리던 어느 날 ‘빨리빨리’가 부사들을 모아 놓고 소리쳤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그가 앞장서서 담을 넘자, ‘열심히’ ‘성실하게’ ‘비켜라’ ‘달려’ ‘뛰어라’가 뒤를 따랐다. 충견 ‘멈춰라’만이 컹컹 짖어댈 뿐.
불새
―흑체 복사
거대한 어미 새가 태양 속에서 산다
그가 홰를 칠라치면 머얼리 새끼들까지 덩달아 날갯짓하느라
사방이 온통 불바다
오래 전부터 새끼들이 날아들었다
지구는 그들이 찾던 둥지, 떼로 몰려들어 집 짓고 살고 있다. 숲속 바위나 나무 등걸에도 날아다니는 곤충의 날개나 들짐승의 털 밑에도 공간이 있는 곳은 어김없이 곰실곰실 꽉 들어차 있다
불새마다 부리에 빛깔을 띠고서 지수함수를 물고 있다
저 불씨가 모이면 큰 불이 된다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굴속을 드나드는 녀석들
구멍마다 불씨들이 모여 짹짹거리며 벽을 쪼아댄다
그들은 불을 먹고 온몸으로 불을 뿜는다
자궁은 모든 빛깔을 머금고
구우불구우불 깃털에서 불벌레를 뽑기 위해 파다닥거린다
어디를 둘러봐도 갑도 을도 없다. 새도 박쥐도 포유류도 기울지 않게 먹여 키웠다 그들은 영원한 불새, 언젠가 마이크로웨이브 앓이를 하며 암흑 속에서 스러져 가겠지만
우리 몸 구석구석에서 그들 소리가 나는데
암이 생겼다는 것은 그곳 불새들이 미쳐간다는 뜻이다
이시경 2011년 《애지》로 등단. 시집 『쥐라기 평원으로 날아가기』.
공장은 이내 멈춰 섰고, 도시 전체가 마비될 지경이 되자
당황한 제국은 혁명가들과 협상한 후에 이렇게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품사들 간에 상하 귀천은 없다.
부사도 맨 앞에 우두머리로 나올 수 있다.
부사 홀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빨리
빨리빨리
빨리빨리 빨리
다시 공장은 돌아가고 도시는 빌딩숲이 되어 가는데
춘삼월 꽃이 필 때 숲속에서 벌 나비 산비둘기들이 꼭 그랬다.
‘구구 구구’ ‘구구 구우’ 숨 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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