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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미미서사/김혜정/바퀴 굴리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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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미미서사/김혜정/바퀴 굴리는 여자
바퀴 굴리는 여자는 바위 남편과 함께 산언덕에 살았다. 그녀는 끝없이 바퀴를 굴렸다. 그녀의 남편은 자칭 자유인인데 게으르기 짝이 없었다. 늘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각기 산에 올랐다가 폭우가 쏟아졌을 때 만났다. 남자가 미끄러지려고 했을 때 그녀가 지렛대처럼 그를 받쳐주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가 한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폭우가 그친 뒤 그들은 산을 내려왔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했다. 그녀는 무심히 응했다. 햇살 좋은 날 그들은 고궁을 걷다가 노을을 만났다. 그녀의 눈은 신비로운 빛을 뿜었고 그녀의 말은 마술처럼 그를 이끌었다. 그녀는 바퀴를 굴려 달나라에도 가고 고래가 되어 심해를 떠돌기도 했다. 혹은 바위틈의 작은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고 한 줄기 빗방울이 되어 땅을 적시기도 했다. 그는 그녀에게 흠뻑 빠졌고 곧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고백했다.
“나는 당신 옆에 있고 싶어. 허락해 줘.”
“하지만 난 언제든지 바퀴를 굴려 당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당신이 바퀴를 굴리는 동안 내가 원하는 세계로 갈 수가 있어. 제발 당신 곁에 있게만 해 줘.”
그는 그녀가 끊임없이 바퀴를 굴려 이야기를 짓는 동안 빈둥거렸다. 그는 거기에 만족했고 다른 것을 꿈꾸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지 나무 냄새가 언덕을 타고 내려왔다. 그녀는 언덕을 넘었다. 거기에 나무를 심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꽃을 피워낼 때까지 끊임없이 물을 주었다.
“당신이 심은 나무들은 정말 아름다워요.”
나무를 심는 남자는 묵묵히 자기 일에 몰두했다.
어느새 산은 나무들로 빼곡했다. 그녀는 그 나무들을 보기 위해 언덕을 자주 넘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깃들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마침내 그와 그녀는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 아래서 사랑을 나누었다. 나뭇잎을 덮고 잠든 그들을 바람과 새와 꽃들이 지지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곳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정원이 생긴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은 겹겹이 후회로 넘쳐났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로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언제든지 바퀴를 굴려 당신을 떠날 수도 있어.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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