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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특집Ⅰ│내 시의 모멘텀/이정원/꽃의 복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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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특집Ⅰ│내 시의 모멘텀/이정원/꽃의 복화술
그리움은 외발이지 무엇엔가 기대려 하지
열흘 붉은 뒤에도 한층 소스라쳐 백일에 닿는 꽃 향낭을 풀어 딸꾹딸꾹 물 위에 풀어놓는 꽃 경면주사로 쓴 부적을 여름내 깃발로 걸어 놓는 꽃
명옥헌, 고운 짐승처럼
선홍이 우네
여름에 찢겨 산발한 곡비처럼
손톱을 물어뜯어 피가 고였지 라솔솔미 라솔솔미, 검은등뻐꾸기 적막에 엎드려 우는 비애의 통점을 파먹었지 두드러기의 나날, 가려워 피나도록 긁어 대다가 까무룩 숨 놓아도 좋을 허공에 안기고 보니 시푸른 물의 맨살, 반짇고리에 감춰 둔 실타래 꺼내 불긋불긋 풀어놓으면
그늘은 우묵하지 대낮을 수납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쓰르라미의 이력 싸잡아 들여놓으려 품을 맘껏 늘여 보는데 불현듯 쏟아지는 저 생리혈, 그늘은 붉은 맛을 완성하지
꽃은 피일까 피가 꽃인 것처럼
배롱꽃
그리움으로 사르는 허공 외발로 걸어
헐은 곳마다 피딱지 익는
백일은 오지
오고야 말지
절정의 막고굴 저 환한 폐허로부터
배롱꽃!
매혹이었다. 20여년 세월 저쪽, 이름이 주는 묘한 정감과 울림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처음 듣는 꽃, 상상 속에서 우글우글 피어나던 꽃, 때론 가슴에 꽃그늘을 드리우던 꽃.
서양문물이 대세이던 때, 그런 사조에 경종을 울리며 민족의 얼과 혼을 일깨운 유홍준 선생님의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명언에 기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는 간절한 필독서였다.
그 시절 국내여행조차도 쉽지 않았지. 가사에 매여 여행다운 여행은 언감생심, 책을 통해 만나는 여행지의 모든 풍광과,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인식하에 쓰인 해박한 문화해설은 그의 유려하고 개성 있는 필력과 더불어 내 지적, 감성적 허기를 달래주는 요긴한 텍스트였다.
제 1권에서 만난 담양의 누각과 정자, 원림에 대한 해설은 거기에 등장하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명옥헌이란 이름과 내력만으로도 내 영혼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책 속에서 처음 접한 그 배롱꽃이 자미꽃, 부끄럼나무, 간지럼나무, 혹은 목백일홍이라 불린다는 사실과, 배롱꽃잎으로 붉게 물들었었다는 자미탄紫薇灘은 매혹을 넘어 그리움의 극점에 있었다.
그 후, 이따금 남도 여행에서 만나게 된 배롱꽃은 가히 충격이었다. 뙤약볕 속에서 이글이글 타는, 그러나 넘치지 않은, 타버려도 재티 하나 남기지 않을 것 같은. 유홍준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속기俗氣 하나 없는, 그러나 고아한 유혹의 눈짓을 염천에 끼얹는, 여름여행의 표상이라 해도 좋을 저 꽃이 남녘에선 그리도 흔한 꽃일 줄이야! 무더위 속 여름여행이 황홀하고 풍성하도록 곳곳에 불쑥불쑥 흐드러진 꽃무더기, 흔해빠져도 천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운 담양행은 쉽지 않았다. 그 꽃이 족보를 싸들고 북상하여 수도권까지 야금야금 종족을 퍼뜨렸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명옥헌 배롱꽃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깊어만 갔다.
드디어 작정하고 떠난 담양이었다. 몇 년 전 한여름을 택해 여행 컨셉을 담양 정자와 원림으로 정하고 여행길에 나선 것은 명옥헌 배롱꽃을 염두에 둔 까닭이다. 하여 저 유서 깊은 소쇄원의 광풍각과 제월당에서 양산보가 경영한 원림의 자연풍광에 흠뻑 취해도 보고 환벽당과 취가정에서 소나무 골 깊은 주름의 세월을 읽기도, 자미탄 너머 너른 광주호를 조망하는 눈맛을 만끽하고, 송강의 성산별곡을 떠올리는 식영정에서 낙락장송의 그림자인양 쉬어보기도 했다. 송강집과 면앙집 등 조선 사림들의 정신적 철학적 자산을 집대성해놓은 가사문학관에 이어 맨 마지막 코스로 정한 곳이 명옥헌! 감춰둔 가장 소중한 보물을 아껴보듯이 숨겨둔 애인을 만나러 가듯이,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계곡물이 흘러 연못으로 흘러가며 내는 소리가 옥구슬 같다 하여 명옥헌이라 이름 붙였다는 내력과 조선시대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해서 은거를 마련한 오희도 가문의 원림이라는 사전 지식을 챙기긴 했지만 2009년에 국가지정 문화재 제 58호로 지정되었다는 건 거기서 알았다. 드디어 마을길을 걸어 당도한 명옥헌,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황홀한 정경이었다. 절정에 이른 꽃무더기, 명옥헌 정자 기왓골과 어우러진 멋들어진 수형의 고목들. 연못에 떨어진 데칼코마니의 풍경들, 수초 사이를 빼곡이 수놓은 꽃잎들, 명옥헌에서 조망되는 그 원림의 조경은 심오한 뜻과 더불어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절묘했다. 꽃나무도 고목이 되어야 저렇게 고졸한 자태가 되는구나. 그늘은 깊었고 하늘도 흰 뭉게구름을 풀어 한 폭 꽉 찬 구도의 그림을 펼쳐놓았다.
한참을 풍경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있다가 그러나 곧 그 황홀함 속에 감추어진 폐허를 보았다. 철 늦은 검은등뻐꾸기 울음이 들렸던가. 깔깔거리는 꽃잎 사이에서 흡사 복화술 같은 속울음을 들은 듯했다. 밤새 몸뚱이 가려워 긁어대다가 제풀에 지쳐 떨어진 꽃들의 넋이 연못 위에 핏빛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백일은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꽃잎 하나하나로 보면 피었다 지는 낱낱의 순간들이 모여 이룬 날들이다. 따지고 보면 길지도 않은 백일이건만 매일이 죽음인 핏빛 흥건한 꽃잎의 낙화가 있지 않고야 저리도 눈부신 꽃무리를 이룰 수 있으랴! 물속에 떨어진 깊은 그늘이 옹기종기 모여 흔들리는 꽃잎을 더욱 더 진한 선홍으로 물들였다. 한 우주가 생겼다 없어지는 무수한 반복 끝에 채우는 백일이니 꽃잎 하나마다 막고굴 같은 폐허의 허허로움이 한여름을 환하게 달구고 있었다.
어떤 자연현상의 이면엔 허무의 낌새 자명하건만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해온 건 아닐까? 그리움의 끝에서 만난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상처로, 또는 무화로 이우는 비애의 알고리즘이다. 그것은 지나친 아름다움에서 오는 아이러니지만 위 시는 그날의 안복眼福으로 낳은 것이 분명하다. 두고두고 머릿속을 밝히는 한여름 땡볕의 그 환한 폐허는.
이정원 2002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5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 『내 영혼 21그램』, 『꽃의 복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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