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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특집Ⅰ│내 시의 모멘텀/박장호/표피에 덮인 시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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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특집Ⅰ│내 시의 모멘텀/박장호/표피에 덮인 시간의 책
1. 굿바이 미스터 트리
홍대에서 합정 가는 길이었다. 횟집이었고 회식했다. 다섯 중 나만 안경을 썼고 나만 외딴 성性이었다. 일행들은 안주만 먹었고 술은 나만 마셨다. 동떨어진 마음을 달래려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취하기도 전이었다. 가로수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알이 없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안경테가 내 것과 똑같은 표범 무늬였다. 누군가 물었었다. “무인도에 있는 네 방 창가에 그림자가 스친다면 그게 무어라고 생각해?” “나뭇가지.” “너는 전생에 나무였구나.” 안경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나는 나무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사람으로 된 나무 같았다. 나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헬로우 미스터 트리.” 인사를 받은 나무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속에서 표범이 포효했다. 내 눈동자 속에 뛰어들어 나의 표범을 내몰았다. 길가에 선 나무의 표범과 자리에서 나온 나의 표범. 나의 혼과 나무의 혼이 뒤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는 사람이 된 나무다. 나는 담배를 다 피우고 안으로 들어왔다. 횟집이었고 회식 중이었다. 어디다 대고 미스터래. 조용히 자리에 앉아 일행들과 어울렸다. 처음이었지만 즐거웠다. 우뚝 섰던 외로움이 사라지자 마침내 취했다. “말 없는 나무 같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나무랄 수 없는 사람인걸요.” 자리가 끝날 때까지 나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횟집 밖으로 나온 나는 나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굿바이 미스터 트리.” 곁에 있던 일행이 물었다. “이 나무 잘 아시나 봐요?” “남이랄 수 없는 나무죠.”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 합정에서 홍대 쪽으로 2차를 갔다.
2. 굿바이 미스터 피플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내 몸만 사랑해서 벌을 받았다. 나무로 변할 거라 했다. 사람이 말을 걸 때까지 나무로 살게 될 거라 했다. 달아났다. 두 팔은 나뭇가지로, 입술은 잎사귀로, 얼굴과 몸통은 줄기로, 다리는 뿌리로 변해 갔다. 안 돼, 안 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되지, 그게 나든 남이든 무슨 상관이야. 긴 시간이 흘렀다. 문득 말소리가 들렸다. “헬로우 미스터 트리.” 눈이 뜨였다. 안경 쓴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안경테가 내 것과 똑같은 표범 무늬였다. 기회가 왔다. 성난 맹수로 혼자인 맹수를 몰아내고 사람을 차지했다. 나의 혼과 그의 혼이 뒤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는 나무가 된 사람이다. 눈이 감기니 알겠다. 넌 사람으로 된 나무가 아니라 나무로 변하는 사람이었구나. 안경테만 남았었구나. 헤어지는 게 두려워 너만 사랑한 여자였구나. 횟집에 들어갔던 그가 나와서 인사했다. “굿바이 미스터 트리.” 남이랄 수 없는 나무를 남기고 사람이 간다. 일행들과 정을 모아 홍대 쪽으로 2차를 간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나뭇가지가 왜 흔들렸다고 생각해?”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서.” “너는 멀어지는 것만 사랑하게 될 거야.” 거리가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나무랄 수 없는 사람이 간다. 잘 가라, 사람아. 멀어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랑하면 할수록 팔이 하늘에서 엉켰다. 잘 가라 사람아. 너는 나의 전생, 나는 너의 내생. 너에게 남은 사람은 내가 다 사라져 줄게. 나에게 남은 남자는 네가 다 살아 버리렴. 잘 가라 사람아. 이젠 나무가 될 일이 없겠구나. 사람이 사람으로 살면 되지,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야. 잘 가라, 사람아. 잘 가라.
3. 굿모닝 미스 스킨
로돕신이 분해된다. 어둠에 덮여 있던 세계가 형체를 드러낸다. 나무는 나무로 섰고, 사람은 사람으로 멀어졌다. 이곳은 혈관과 관다발이 이어진 역설의 땅. 담화가 실화가 되는 미신의 페이지. 나무에 꽃이 피면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무에서 잎이 진다. 죽음은 저마다 빛나는 별이 되고 하늘에 동기화되지 않은 먼 죽음은 표범의 피부에 장미로 핀다. 우리는 밤의 이야기 속에서 만났다. 눈을 감고 대화의 앞부분을 생각한다. “기억나지 않는 깊은 꿈을 꾸게 된다면 그곳이 어디일 것 같아?” “무인도.” “무인도에서 살고 싶은 거구나. 하지만 그곳은 꿈속의 섬이 아니야. 네 곁엔 이미 사람이 없거든.” 눈을 떴다. 로돕신이 분해되었다. 그는 없고 촛불이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라진 그를 그리워했다. 마디가 바뀐 시간이 이야기로 이어져 나는 창밖에서 움직이는 나무의 그림자와 나뭇가지에서 깃을 친 새의 깃털을 보았다. 촛불과 나눈 이야기를 물고 진피의 세계를 떠나는 새를 본 건 표범의 눈. 사람이 외로운 건 그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무가 사랑에 빠진 건 몸속에 도는 장미 향기 때문이다. 하나이면서 둘인 표범이 자리를 바꾸고 멀어진 표피의 아침. 그 모든 이야기를 덮은 시간의 책.
―《시산맥》, 2017 여름.
표피를 구성하는 세 개의 문
“문이 다가온다. 문에 다가선다./문을 통과해도 나는 나밖에 될 수 없겠지만/내가 문 밖의 나를 담을 것인가./문 밖의 내가 나를 담을 것인가./나는 망토를 쓰고 내가 지었던 표정을 잊는다./그리고 문을 통과한다. 통과한다./이 문을 통해서./나는 돌아간다. 나는 돌아온다.”
내 등단작들 중 한 편인 「끝없이 잘게 쪼개진 문들이 있는 숲」의 일부분이다. 시가 내게 오는 순간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아 인용했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할 때 시가 온다. 그러므로 문이 문제다. 문이 있다는 것은 이쪽과 저쪽이 함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은 대체로 공간 사이에 세워지지만 이동을 전제로 하므로 시간 위에 세워진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쪽과 저쪽이 공존하듯이 ‘지금’과 ‘다음’도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다음이 지금과 함께 있다는 것은 역설이다. 지금은 다음을 향하기 때문에 지금이 완결된 것이라 말하는 것도 역설이다. 지금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미확정의 다음이 지금과 공존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이전 역시 종료되지 않고 운동하는 지금에 관계되어 유동한다.
문은 시공간 안의 사람, 사물, 이야기, 글자 등 속에 숨어 있다. 문이 발견되면 드나듦을 통해 이쪽과 저쪽이 연결되고 이전-지금-다음이 엮이며 별도의 텍스트가 생성된다. 그런데 나는 왜 이쪽에 있으려 하지 않고 저쪽으로 가려 할까. 우울해서 그런 것 같다.
「표피에 덮인 시간의 책」에서는 세 개의 문을 상정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은 ‘소외문’이다. 주변과 동화되지 못하면 우울해진다. 우울해서 동화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울할 땐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다. 가두리된 시간 속에서 내게 무의미한 입자들이 나를 배제하는 어떤 패턴을 반복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그러니 구멍을 내야 한다. 흡연이다. 흡연을 구실로 자리를 이탈해 숨을 쉬었다. 횟집 앞에서 알 없는 안경을 쓴 가로수를 발견했다. 누군가 장난으로 걸어 둔 모양인데 테의 무늬가 내 것과 똑같았다. 유심히 보았다. 말이 없는 데다가 똑같은 안경테까지 쓰고 있는 나무를 나와 무관한 존재라 여기기 힘들었다. 나무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과 나무가 똑같은 용모로 만날 까닭이 없다. 어떤 손의 장난이 나와 나무를 만나게 한 결합 에너지였다. 안경을 쓴 순간 나무는 사연을 갖게 된다. 나무의 사연을 알고 싶었다. 안경테가 문이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 문으로 나무가 나왔다. 나무의 뿌리에 사람의 허리가 사람의 다리에 나무의 줄기가 이식되었다.
소외문을 통과하면 더 큰 소외가 기다린다. 분리다. 두 번째 문은 ‘분리문’이다. 나무는 사람의 모습으로 분리되었고, 사람은 나무의 모습으로 분리되었다. 표피의 세계에서 나무는 사람으로 사람은 나무로 산다. 표면이 이면을 무화시킨다. 시를 쓰는 나와 시 속의 나도 분리된다. 나는 나무가 아니니까 시 속에서 사람이 된 나무는 내가 아니다. 나무가 된 사람도 내가 아니다. 일상과 분리된 시 속엔 언어만 흩어진다. 흩어진 언어가 스스로 언어를 부른다. 시 속의 내가 시 쓰는 나를 무화시킨다. 시인의 의지와 별개인 텍스트가 생성된다. 시인은 텍스트의 발원지가 아니라 텍스트가 형성되는 데 쓰이는 결합 에너지다.
세 번째 문은 ‘회전문’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도, 나무와 사람이 분리되는 것도 회전문 속의 일이다. 분리되었던 것들이 돌고 돌아 섞인다. 회전문을 통과한 물질은 잠시 표피의 세계를 형성한다. 종이는 양면이지만 세계의 표면은 다면이다. 무수히 많은 면을 가지고 있다. 물질은 그 표면들로 뿔뿔이 흩어진다. 인연은 한때 같은 면에 있던 것들이 회전문을 통과하여 수많은 시공간의 표면으로 흩어진 뒤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그래서 이곳과 저곳이 이어지고, 이전-지금-다음이 재구성되고, 나무와 사람이 이어지고, 혈관과 관다발이 이어지고, 담화가 흩어져 실화를 구현하고, 실험과 서정이 섞이고, 꿈의 언어가 현실의 언어로 나타나고, 일상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일상이 된다. 그리하여 멀어지는 것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므로.
멀어지는 것을 덤덤하게 사랑할 줄 아는 게 중요하다. 아직은 알 듯 말 듯 하다.
끝없이 잘게 쪼개지는 시간은 우울한 사람의 시간이다. 대체로 우울했고,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고 그 와중에 시를 썼다. 한 가지 일을 십 년 넘게 했으면 할 만큼 한 거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그럼에도 계속 시를 쓰는 건 시의 마력 때문이다. 확정되지 않은 힘이 나를 부른다. 보여 줄 듯 말 듯 나를 기다린다. 다가갈수록 테두리가 없는 시공간이 어른거린다. 나는 지금이고 지금은 알 듯 말 듯 하고 시는 다음이다. 그러므로 시는 내 미래다. 시간이 쪼개진다. 끝없이 잘게 쪼개지는 건 무한한 팽창이다. “문이 다가온다. 문에 다가선다.” 이 문을 통해서 나는 다르게 돌아간다. 나는 다르게 돌아온다.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므로.
박장호 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나는 맛있다』, 『포유류의 사랑』. 산문집 『샌드백 치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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