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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책크리틱/안성덕/‘진단 혹은 처방’―천선자 시집 『파놉타콘』, 양진기 시집 『신전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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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559회 작성일 19-02-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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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책크리틱/안성덕/‘진단 혹은 처방’―천선자 시집 『파놉타콘』, 양진기 시집 『신전의 몰락』



주지하다시피 1970, 80년대의 산업화를 통해 우리의 삶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세상사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인 법. 산업화를 통해 우리는 풍부한 물질 등 외적인 풍요를 누렸다면, 고향, 기다림, 정, 여유 등 내적인 것을 상실했다. 크고 빠르고 1등만 인정받다보니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역설적이게도 통신기술의 발달로 우리들의 관계는 더 소원해졌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지 않은 소통이 늘어나면서 언제부터인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온기가 사라졌다.
이렇듯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변화도 적응하기 힘이 드는데, 살상가상 세계경제포럼은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제시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한다.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야 하고 세상 그 무엇보다 지능화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16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국은 비대면非對面이었다. 이세돌은 알파고의 대리인(?)과 바둑을 두었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고안해 낸 기계가 이제 사람을 감시하고 지령을 내리는 시대가 도래된 것이다. ‘도둑 잡으라고 키운 개가 주인을 감시하고 있는 꼴’, 그러니 황당한 우리는 그 감시를 감시하고 살아갈 수밖에, 여백을 잃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천선자 시인의 『파놉티콘』과 양진기 시인의 『몰락한 신전』은 휙휙 날아가는 세상에 대한 ‘진단이자 처방’이다.

1. 감시를 감시하다: 천선자『파놉티콘』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일망감시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감시와 통제의 방법인 ‘파놉티콘’의 개념은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오늘날 권력 작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뚝배기 소머리국밥을 후후 분다.
매운 깍두기 숟가락에 올리며 카메라를 본다.
카메라도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눈알을 굴린다.
숟가락은 입으로 가고 눈은 카메라와 싸운다.
눈덩어리 커다랗게 만들어 무작정 던진다.
거지발싸개 같은 놈, 앞뒤 가리지 않는다.
집채만 한 덩어리가 머리통을 맞힌다. 웃는다.
째려보는 것 좀 봐, 금방이라도 펀치를 날릴 기세네.
달래고 어르고 치고 빠지는 솜씨가 보통 아니다.
전략을 바꾸어 주먹으로 턱을 한 방 날린다.
앞차기, 옆차기, 엎어치기, 돌려차기로 마구 팬다.
다리가 풀리자 쌍코피가 터져 코허리로 흐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중얼거리며 노려본다.
괘씸한 카메라 국밥에 말아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카드로 국밥 값을 지불하고 돌아 나오는데,
등 뒤에서 웃는 눈동자, 나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
―「파놉티콘·1 ―cctv」 전문

어딜 가나 체크된다.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찍히고 산다. 단순히 찍하는 게 아니다 감시당한다. 끼니를 해결하러 간 국밥집, 천장의 카메라가 화자를 “째려”본다. 국밥집에 오는 도중에도 수없이 찰칵찰칵 찍히는 줄 모르고 찍혔을 화자, 못마땅하다. 가는 곳마다 노려보는 카메라에 속이 상한 화자는 “허겁지겁” “눈덩어리 커다랗게 만들어 무작정 던진다.” 눈眼싸움을 벌인다. 허나 싸움의 승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카메라는 이미 우리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을 테다. “분이 풀리지 않아 중얼거리며” 국밥을 “먹어치”우고 카드로 국밥 값을 치른다. 가만 보니 ‘카드’, ‘카메라’ ‘카’자 돌림의 형제다. 이미 기계에 종속되어 버린 것이다. 카메라 아니 기계 문명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화자, 존재 증명으로 증명사진 찍듯 국밥집을 나오며 카메라 앞에 등판을 더 오래 들이 민다. 카메라와의 눈싸움으로 ‘감시를 감시’하는 의식을 치른다.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허둥지둥 정신이 없다.
바지주머니를 뒤져보다 윗주머니 뒷주머니,

놀란 심장 반쪽이 아가미를 파닥인다.
전화를 건다, 남편 010, 아이 010, 어머니 010,
―「파놉티콘·46 ―스마트폰」 부분

카메라뿐 아니라 스마트폰도 우리를 감시한다. 한시도 가만 놔두지 않고 호출하고 카톡 카톡 거린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에 핸드폰이 들려있지 않으면 좌불안석이다. 전화번호 앞자리 ‘010’이 꼭 눈, 코, 눈 같다. 감시자의 얼굴 같다. 눈 동그랗게 뜨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만 같다. 그 전화기가 손에 없으면 불안한 건, 어쩌면 감시를 감시해야 하는 우리들의 눈을 잃은 불안이 아닐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크고 동그란 눈동자,
앞트임뒤트임, 쌍꺼풀 수술을 한 왕방울 눈동자.

그녀는 적금 타서 더 크고 동그란 라이트 사러 간다.
혼수 밑천 탈탈 털어 더 밝은 외제 라이트 사러 간다.
―「파놉티콘·23 ―성형중독·1」 전문

고양이와 쥐를 좋아하는 속이 시커먼 늑대, 속이 빤한 늑대,
아담과 이브가 되어 붉은 사과를 훔쳐 먹는 저돌적인 동물,
―「파놉티콘·24 ―성형중독·2」 부분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산다.” 자크 라캉의 말이다. “그녀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자발적 감시’, 즉 자기검열의 의식을 치르느라 성형을 한다. 그녀가 “적금 타서” “크고 동그란 눈동자”를 사러 가는 것은 ‘감시 시대’의 비판이 아니다. 감시를 감시하는, 그 감시에 대응하는 나아가 감시에 순응하는 적극적 존재 증명일 테다.

오빠나 형이 기다리고 있었을 골목 안, 이제 오빠 대신 형 대신, 희미한 가로등 대신 불량배 같은 감시의 카메라가 눈을 번득인다. 높은 망대 꼭대기에 가로등을 밝힐 수 없다면, 우리는 그 감시를 감시해야 한다. 감시를 인정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보여주는 것은 보지 않고 보고 싶어 하는 것만 줌 인하여 확대 왜곡하는 눈(眼)이 눈(雪)이 되어 소복소복 내릴 것이다.(<시인의 말 중에서>), 천선자 『파놉티콘』이 바로 ‘감시의 감시’다.

2. 여백, 충만을 비우다 : 양진기『신전의 몰락』
산업화의 부작용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여백을 잃었다. 가득함만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욕망을 욕망하고 배를 채우고 주변을 내 편으로 채우기에 급급했다. 텅 빈 충만은 그저 교과서 속의 말씀으로만 치부했다. 동양화의 미덕인 여백은 먹물이 모자라 남겨 둔 것이 아니다. 붓이 부러져서 칠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작은 틈도 내보이면 안 된다고
틈을 보이면 비집고 들어온다고
빈틈없이 야무져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었지

하지만 틈이 없으면 금이 가지
틈이 없는 모든 것들은 갈라져 금이 가
타일과 타일 사이
도로와 도로 사이의 간격
경계와 경계의 마디
정색과 엄숙의 순간
틈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어

틈이 없다면
돌 틈 사이로 지절대는 물의 수다를 읽을 수 없고
창문 틈으로 쏟아져 온몸을 핥는 햇살도 없어
콘크리트 틈에서 돋아난 푸른 생명도 볼 수 없어
밀어가 들어 갈 틈이 없으니 연애의 시작도 없지
허술한 틈이 있어야 새들도 둥지를 짓지
사랑도 기웃거리지
틈을 보여줘
다가갈 수 있도록
―「틈에 대하여」 전문

틈을 보이면 밀리는 걸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경쟁자가 치고 들어오는 걸까? “작은 틈도 내보이면 안 된다고”, “빈틈없이 야무져야 한다고/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안과 밖을 단단히 옥죄기에 급급했다. 무대는 좁고 사람은 많으니 밀려나지 않으려면 앞사람은 무대 밖으로 밀어내고 뒷사람은 아예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배웠다(?). 허나 마을 앞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바람에 흔들려야 부러지지 않고, 살랑살랑 잎새를 흔들어주어야 “새들도 둥지를 짓”는다. 그 그늘에 사람이 들어 쉰다. 철길도 틈틈이 틈을 주어야 제 간격과 평형을 유지한다. “밀어가 들어갈 틈이 없으”면 연애도 없고 “사랑도 기웃거리지” 못한다. 틈, 비어있음이 아니라 충만을 위한 여유이자 여백이라고 진단한다.

저마다 몸 한 구석 푸른 기둥을 세우고
가투에서 돌아온 스무 살 우리가 소주를 마시고 있어
물불 가리지 않고
제 몸을 불살라 이루려던 혁명
스크럼 짜고 전진하던 대오
메뚜기 떼처럼 흩어졌다 다시 모여들던 선술집
탁자 위에 빈 술병은 늘어가고
비틀거리는 새벽으로
혁명은 사라졌고 우리는 희미해졌어

누구는 타도를 외치던 정당으로 들어가 정치인이 되고
누구는 매판자본이라고 욕하던 기업체 이사가 되고
이도저도 아닌 우리는 싸구려 술집에 모여
설계할 수 없는 미래를 술잔 속에 빠뜨리고 있어
한 잔을 마시면 한 살씩 젊어져
세 병을 마시니 스무 살 청년이야
술병을 다 비우면 꾸었던 혁명이 되살아날까
이모, 처음처럼 한 병 더
―「처음처럼」 부분

이제 “저마다 몸 한 구석 푸른 기둥을 세우고” 우리가 그토록 이루려 했던 “혁명도 사라졌”다. 빈틈없이 “스크럼을 짜고 전진하던” “우리도 희미해졌”다. 누구는 “타도를 외치던 정당으로 들어가 정치인이 되고” 또 누구는 “매판자본이라고 욕하던 기업체 이사가 되”었지만, “처음처럼”을 외치며 알량한 자존심을 내보이는 우리는 아직도 혁명을 꿈꾸며 “이모, 처음처럼 한 병 더”를 외치며 쓴 소주잔을 비운다. 검고 숱 많던 머리칼도 제법 희끗희끗 듬성듬성해졌다. 넉넉해졌다. 아직도 철이 덜 난 듯, 이미 가속이 붙어버린 청춘의 한순간을 툭 분지른다. 삶의 가속도를 줄인다. 내몰리는 삶 속, 허세 같은 여유지만 여백을 꿈꾼다.

허공에 머리를 조아린다. 편파적으로 공평무사한 허공을 섬기며 살점이 찢어지고 가족은 흩어지고 종족은 몰사한다. 깨진 기와로 벅벅 긁는다. 사소하게 격노한 허공은 두두두 외적을 몰고 와 아침저녁으로 영역을 에워싸 초토화 시킨다. 바그다드, 팔레스타인, 카슈미르, 다마스쿠스에서 아기의 팔다리가 흩어진다. 소녀의 가랑이가 찢어진다. 없는 허공을 어디에나 있다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 검은 입속에서 축복과 저주의 말이 튀어나온다. 절도와 간음과 살육이 번성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통한 자는 끝까지 애통하다. 세치 혀가 주름진 뇌에 달라붙어 환상이 허공을 가공한다. 근엄한 옷들이 수금을 한다. 마취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반역을 한다. 프로레슬링이 번성하던 시대도 끝장났다. 첨탑도 금이 갔다. 끝났다.
―「신전의 몰락」 전문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우리는 상식과 도덕의 붕괴를 경험했다. 무너진 지붕의 “깨진 기와로 벅벅 긁는” 아픔이었다. 산업화의 과정과 결과는 “공평무사”하지 않았다. 온갖 편법이 판을 치고 힘의 논리가 우선 먹혔다. 부익부 빈익빈, 가진 자는 더욱 몸을 불렸고 애초에 가지지 못한 자는 온갖 착취에 시달렸다. 재개발을 빙자한 기업논리에 멀쩡하게 살던 집에서 내몰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려 올라간 망루에서 불에 타 죽기도 했다. “근엄한 검은 옷들”로 대변되는 권력이 우리를 “격노”하게 했다. 종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했다. “애통한 자는 끝까지 애통”해야 했다. 개인에 그치지 않고 충만을 위한 광분은 국가 간에 작용되기도 했다. “바그다드, 팔레스타인, 카슈미르” 등에서 “아기의 팔다리가” 포탄에 날아가도 했으며, 또 어디선가 꿈 많은 “소녀의 가랑이가 찢겨”지기도 했다. “프로레슬링이 번성하던 시대”가 갔음에도 쇼는 계속되고 있다. “첨탑도 금이” 가고 있다. 이 모두 ‘틈’을 허락지 않고 충만을 숭배하는 탓이다.

우리는 산업화 이전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가지 않는다. 제로섬게임이건 치킨게임이건 살아남아야만 한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변해가는 세상을 진단하고 삶의 세목을 읽어내고 안타까워하는 일이라도 지속적으로 행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감시를 견뎌내며 빈틈 같은 여백이라도 만들며 살아야 한다. 천선자의『파놉타콘』과 양진기의 『신전의 몰락』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진단 혹은 처방’이다.


안성덕 2009년<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몸붓』. 원광대 출강 중. 《아라문학》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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