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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책·크리틱/차성환/낮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삶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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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87회 작성일 18-12-15 11:01

본문

책·크리틱


차성환


낮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삶의 노래

박철웅, 『거울은 굴비를 비굴이라 읽는다』/강문철, 『낮은 무게중심의 말』


가장 낮은 바닥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박철웅,「순천만」중에서
박철웅 시인의 시에는 격렬하게 삶을 관통해온 자가 잠시 멈춰 서서 인생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사유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숨 가쁘게 살아온 시인이 인생의 황혼 녘에 당도한 곳은 ‘순천만’이다.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순천만은 여인의 S라인을 닮았다
직선의 삶을 살지 못하여 곡선으로 떠밀려 온 삶을 닮았다
왜 순천만은 직선을 두고 아리랑 곡조 같은 음률로 흘러왔을까
왜 순천만은 진흙탕 같은 세월을 흐르면서 붉은 능금처럼 빛날까

굽이굽이 흐르는 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우 우는 저 소리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흐르는 물소리도 숨죽이는 저 곡조들, 웅성거리는 저 신음들,
진흙탕 같은 세월을 흐르면서 쉼 없이 키워가는 갈대숲의 저 노래들,

굽이굽이 흐르는 만을 바라보며 흘러왔던 시간을 생각한다
직선도 곡선도 때가 되면 같은 자리에서 만나더라
누구는 골목길을 돌아돌아 어깨동무하며 휘파람을 불고
누구는 큰길을 직선으로 달리고 달려 숨이 헉헉 차오르고

순천만은 가장 낮은 바닥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흐른다
구름처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기웃거리다가 깔깔 웃어주고
구경 나온 사람들처럼 시간도 정지된 듯 안단테로 노래하고
구름 같은 사람들에게 함께 걷자며 천천히 천천히 곡선으로 흐르고
─「순천만」 전문
 
‘순천만’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의 물줄기를 가지고 있다. “아리랑 곡조 같은 음률”로 굽이굽이 흐르는 ‘순천만’은 우리의 삶을 은유한다. 시인은 해 질 녘에 ‘순천만’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는 단순히 지는 해가 붉게 번진, 자연 풍경으로서의 ‘순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인생이 저물어가는 때에 자신이 흘러온 지난 삶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반추한다. “흘러왔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진흙탕 같은 세월”로 온갖 사연과 신음들이 새겨져 있지만, 그 속에는 끈질기게 부대끼고 노래하면서 살아온 우리의 삶이 “붉은 능금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시인은 ‘순천만’을 앞에 두고 가만히 멈춰 서있다. 시간의 빠른 물살을 따라 흐르는 생의 한복판에서는 깨달을 수 없었던 진실을 인생의 황혼 녘에 비로소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남모르게 숨죽여 울었던, 슬픈 사연들과 삶의 고통스러운 신음들은 한데 어우러져 “아리랑”이라는 한의 곡조를 닮은 노래로 굽이굽이 흐른다. 그리고 모든 강줄기가 결국 바다에 이르게 되듯이 삶의 욕망을 쫓아 내달렸던 직선의 삶이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면서 살아온 곡선의 삶이든 “때가 되면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박철웅 시인은 ‘순천만’의 흐르는 물소리에서 우리들의 삶이 가진 슬픈 곡조에 귀 기울인다. 각자가 품은 생의 무게와 슬픔을 보듬어 안은 채 유장한 물줄기로 흐르는 순천만의 비의悲意를 바로 보고 있는 것이다. “순천만은 가장 낮은 바닥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흐른다”. 시인 또한 ‘순천만’을 바라보며 한없이 “가장 낮은 바닥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곡진하고 곡진하게 삶을 노래한다. 그것은 마치 “진흙탕 같은 세월을 흐르면서 쉼 없이 키워가는 갈대숲의 저 노래들”과 닮아있다. 우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다.


모닥불, 하고 혀 안에서 소리를 굴리다 보면, 서글프다.
사그락사그락 불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 단풍잎들의 속삭임 같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프다.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이 다닥다닥,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응집하는 단풍잎 같다.

모닥불이 응집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위안이 된다.
서로서로 온기가 되어 타오르는 황혼의 부부 같다.
황혼의 부부가 껴안으며 떠나가는 사별의 무대 같다.

안녕, 괜찮아. 괜찮을 거야. 서로서로 위안이 되어가면서
따뜻한 품이 되어가면서 하나의 재로 돌아가는 모닥불
나도 어느 날, 당신의 가슴에서 마지막 불씨를 재울 수 있을까.

그 날까지, 그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따뜻한 그 무엇이었으면 싶다.
우리의 황혼이, 마지막 날 저녁이,
―「모닥불」 전문


「순천만」의 “바람이 불 때마다 우우 우는 저 소리들”처럼 시인은 ‘모닥불’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 아마도 늦가을의 단풍잎을 모아서 태우는 모양이다. 시인은 ‘모닥불’의 “사그락사그락 불타는 소리”에서 “단풍잎들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 속삭임을 감지하는 시인의 예민함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통해 삶을 반추하게 한다. ‘모닥불’은 곧 삶의 동반자로 살아온 “황혼의 부부가 껴안으며” “서로서로 온기가 되어 타오르는” “사별의 무대”로 떠오른다. 이 ‘모닥불’은 단풍잎이 살아온 모든 이력과 함께 불꽃 속에서 사라지는, 생의 마지막 풍경이기에 서글프고 또 아프다. 그리고 위안을 준다. 서로의 “따뜻한 품” 속에 응집해서 껴안으며 불타오르는 ‘모닥불’이기 때문이다. ‘모닥불’은 결국 다 타버리고 “하나의 재로 돌아가”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서로 위안이 되어가면서” 소멸하는 모습은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 또한 보듬어 안는다. “우리의 황혼”에, 생의 “마지막 날 저녁”의 그 순간까지 “당신의 가슴에서 마지막 불씨를 재울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박철웅 시인은 “굴비를 바라보며 나는 정말 굴하지 않고 있는가, 굴비처럼 가슴에 소금을 뿌리며 햇살과 바닷바람에 잘 말라 가고 있는가”(『거울은 굴비를 비굴이라고 읽는다』)라고 말한다. 세상살이에 부패하거나 썩지 않고 ‘굴비’처럼 초연하게 견뎌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내가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가, 쫓기며 달려왔는가 욕하며 미워하며 아등바등 달려왔는가”(『하루살이』)를 되물으며 세속에 찌들어 정신없이 살아온 삶에 대해 반성한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욕망에 이끌려 “하루살이처럼 불빛을 보며 달려든”(『하루살이』) 삶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젊은 날, 숨 가쁘게 달려온 삶을 잠시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주어진다. 시인은 인생의 황혼 녘에 이르러서야 생의 한복판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을 되돌아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의 많은 시편이 석양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에 남겨져 있다. “이제 하나둘 정리할 시각이 가깝다는 생각에/나를 조용히 내려놓으며/석양이 빚어놓은 수채화 속으로 물들어 간다”. 『거울은 굴비를 비굴이라 읽는다』에는 박철웅 시인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응시하고 더듬었던 시간이 채록되어 있다. 삶을 되돌아보는 자의 따뜻한 시선과 깨달음이 담겨 있는 시편들은 우리의 삶 또한 가만히 보듬어 안아줄 것이다.
       
마음 깊은 곳이 꽉 차서 함부로 넘어지지 않는/낮은 무게중심의 말-강문철, 「낮은 무게중심의 말」 중에서
강문철 시인은 일상의 사물을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보통 사람에게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이지만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삶의 소중한 의미에 가닿게 한다.  


더는 자신을 지지할 수 없을 때

수련은
물의 평지에다 커다란 제 손을 내려놓는다

내가 왼종일 헤매다
늦은 밤 방바닥에 등을 붙이는 일처럼

높낮이가 없어 큰 갈등 없는
공중도 지하도 아닌 정거장 같은
누구나의 발돋움에 디딤돌이 되어주는

수면과 지면,

이 두 바닥을 수련은
손과 발로 꽉 붙들고 있다
―「물의 평지」 전문


위의 시는 수련이 수면 위에 연잎을 펼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은 ‘수련’과 ‘수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고 있다. 수련은 수중 식물로 육지 식물과 다르게 흙에 뿌리를 내려 줄기의 기반을 잡을 수 없다. 물속에 뿌리를 내리는 수련은 자신의 몸을 지지해줄 아무런 바탕이 없는 것이다. 수면 위로 줄기를 내고 연꽃을 피워내기 위해서는 몸을 기댈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수련은 그 토대를 수중에서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시인은 연잎이 펼쳐지는 마법과 같은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련은/물의 평지에다 커다란 제 손을 내려놓는다”. ‘수련’은 “더는 자신을 지지할 수 없을 때”, 아무런 지지대가 없는 수중의 한가운데에 “제 손을 내려놓”아 그 토대 없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토대를 만들어 낸다. 어떤 생명도 기댈 수 없는 ‘수면’이 한순간에 ‘수련’이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든든한 ‘물의 평지’로 새롭게 거듭나는 순간이다. 불안정한 물의 속성 없이는 ‘수련’은 그 꽃(생명)을 피워낼 수 없다. 언뜻 보면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부정성의 조건이 긍정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는 ‘수련’이 두려움 없이 ‘수면’ 위에 손을 내려놓은 행위를 통해 가능할 수 있는 세계이다. ‘수면’은 순식간에 “물의 평지”라는 전혀 다른 형질로 변환을 이루면서 “누구나의 발돋움”이자 “디딤돌”이 된다. ‘수련’ 또한 ‘물의 평지’ 없이는 자신의 생명을 연속시키고 지켜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존재의 기반이자 토대로서 ‘물의 평지’가 없이는 ‘수련’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물의 평지」는 ‘수련’과 ‘수면’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수련’의 생태를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연결시키고 있다. 강문철 시인은 ‘수련’이 물의 평지에다 “제 손을 내려놓는” 행위를 바라보면서 기억 속의 자신이 “왼종일 헤매다/늦은 밤 방바닥에 등을 붙이는 일”을 떠올린다. ‘수련’과 마찬가지로 시인도 더 이상 삶이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바닥’(“수면과 지면”)에 의지해 소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련睡蓮’은 시인에게 삶에 대한 수련修鍊을 계시한다. 이 낮은 ‘바닥’은 삶의 기반이 되고 그러기에 그것을 “손과 발로 꽉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춥다, 비가 눈이 되어 내린다
내가 저를 좋아하는 걸 알아
저도 날 젖지 않고 가라고 배려하는 것이다

눈 많은 나라에 간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눈길 조심하라고
나도 눈길 조심하라고 답을 보냈는데

미쁘다, 가만가만 바닥에 내려와
흔한 발자국을 귀하게 감싸 안는
눈송이 같은 말

마음 깊은 곳이 꽉 차서 함부로 넘어지지 않는
낮은 무게중심의 말

집에 들어오니 옷에 붙은 눈이 녹고 있다
저를 생각해주는 내가 고맙다고
내가 젖지 않고 집에 도착해 다행이라고 울고 있다
─「낮은 무게중심의 말」 전문


겨울철에 비가 눈이 되어서 내리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일상적이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비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비가 추운 길에 “날 젖지 않고 가라고 배려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비가 눈으로 바뀌는 기상의 변화가 ‘나’에게 “배려”로 다가오는 것은 “눈 많은 나라에 간 아이”가 “눈길 조심하라고” 보내온 “문자” 때문이다. 아마도 아이는 멀고 추운 이국땅에 있다가 ‘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문자”를 보낸 듯하다. 아이에게 “문자”를 받고 나서 “눈길 조심하라고 답을 보”내고 난 후에 바라보는 눈은 그냥 내리는 눈이 아니라 “눈 많은 나라에 간 아이”가 ‘나’에게 보내온 ‘눈’처럼 여겨진다. 아이가 걱정해서 보낸 따뜻한 문자 한 통은 믿음직스럽고 ‘나’로 하여금 추위를 잊게 만든다. 아이의 문자는 ‘나’의 “흔한 발자국을 귀하게 감싸 안”으며 또한 “마음 깊은 곳이 꽉 차서 함부로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송이 같은” “낮은 무게중심의 말”이다. ‘눈’은 아이의 문자처럼 나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내린다. 집에 도착한 ‘나’의 옷에 붙은 눈이 녹는다. 시인은 자신을 배려해준 비가 “내가 젖지 않고 집에 도착해 다행이라고 울고 있”는 것으로 체험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일상적인 상황이 시인에게는 ‘나’를 위로해주고 감싸주는, 소중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낮은 무게중심의 말”은 시인이 외롭고 험난한 인생길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힘이 된다.
강문철 시인은 차갑고 냉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시선을 보낸다. 그가 시인으로서 가진 사명은 “젖어들 곳 하나 없”는 “나와 무관하게 얼어붙은 세상”(「가만히 뒤돌아 걷다」) 속에서 “다시 몸을 추슬러 온 세상을 적시게 하는 일”(「바람나다」)이다. 찬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돌섬’을 바라보며 “한겨울 인력시장에 혼자 남아 꺼져가는 모닥불 쬐고 앉은” 사람의 “우긋한 등짝”을 떠올리는 시인은 그의 “뼛속까지 시”(「돌섬」)린 통증까지 공감하고 조용히 아파한다. 그의 시선은 “걷어차인 사람들이 등지고 울기 좋은 곳”(「하현」)과 그곳에서 힘겨운 삶을 이겨내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저들”(「나무 여행법」)에게 머물러 있다. 강문철 시인의 시가 가진 진정성은 바로 삶의 낮은 바닥을 바라보는, 그 시선의 끈질기고 오랜 머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낮은 무게중심의 말』에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담담히 건네는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차성환_2015년 《시작》으로 등단.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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