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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특집1 셀럽 작가 전성시대/이영주/시, 그리고 시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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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77회 작성일 18-12-1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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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셀럽 작가 전성시대


이영주


시, 그리고 시 밖


동료 시인과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한 흥미 때문에 다양한 활동을 시도해왔지만 지금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설레면서 하는 일은 오로지 시 쓰는 일뿐이라고. 시를 쓰는 일은 외부의 보폭을 넓히며 자신의 존재를 발산하는 것들의 반대에 있다. 외부의 보폭을 최소화하고 오로지 내부의 세계를 넓히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 그것이 시 쓰기의 전부라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시간은 내게 시인으로서의 비밀스러운 영토를 확장시켜주는 특별한 시간이었고, 생활인으로서의 불편한 나를 잠시라도 차단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시를 쓰면서 찾아오는 고통과 불행은 다른 층위의 것이었고.
시를 쓰고 지면에 발표를 하고 시집을 묶는 것. 시인에게 그것 말고 다른 활동이 가능하다면, 그 시 세계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소소하게 친구들과 나누거나 서점에 가서 슬쩍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 정도? 단체의 제안으로 행사에 참가하거나 특강을 하는 비교적 액션이 큰 활동을 동반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긴장과 설렘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러한 사회적 소통은 꽤나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시를 함께 읽으며 풍류를 즐기는 일들은 역사를 들춰봐도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사회적 활동의 행위들은 아무래도 촉망받는 유명한 작가들일 경우에 기회가 많이 찾아온다. 독자들이 넓게 편재해 있는 작가일수록 외부 활동의 영역이 넓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독자들은 그 작가를 만나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눈빛, 표정, 섬세한 몸짓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된다. 그의 작품이 그의 내부에서 뻗어 나와 광장에 도달하기를 독자들은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것은 작품이 주는 감동과 조금 다른, 새로운 떨림을 선사하는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열망은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한 지점이다. 자신의 세계가 타인에게 어떻게 도달하는지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생생한 시간이니까.
물론 그러한 소통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작가들도 있다. 각자 사정은 다르겠지만 아마도 내면의 보폭은 크지만 외부의 보폭은 최소화하며 사는 것에 익숙한 종족들이라는 점도 한몫하지 않을까. 수줍어서 독자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작품 간의 소통이 아니라 직접 대면하는 소통 자체를 피로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겠고, 무대공포증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각자의 사정이 액션을 멀리 하게 되는 이유가 되리라.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황이란 없다. 또한 처음에는 어색했던 외부 활동이 점점 익숙해지고, 종국에는 그것 자체를 즐기고 재미있어 하는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 또한 충분하지 않은가.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최근 들어 활자로서의 시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듯하다. 이것도 일반론은 아니다. 다양한 문화적 현상과 시가 결합할 가능성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많아졌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소통의 매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소통의 방식 또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결합하여 더욱 넓어졌다. 시 자체의 힘과 결합한 시 밖의 에너지는 작품에 색다른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이제 어떤 시들은 언어로만 읽어서는 안 되는, 다른 종류의 읽기로 접근하는 포인트를 선사한다. 그것은 시인의 활발한 외부 활동이 가져온 또 다른 시의 영역이 아닐까. 시는 텍스트로 출발하여 다층의 문화를 포함하는 열린 세계가 되고 있다. 시의 영역은 넓어지고 감각적으로 소비된다.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시의 향유는 점점 더 흥미로운 일들이 생겨나는 문화적 지점이다.
대중매체와 성공(?)적으로 결합할 경우 이 방식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 세계를 얼마나 진중하고 깊이 있게 접근하느냐 하는 고전적 관점에서부터 인상적인 한 줄을 자신의 느낌대로 소비하는 SNS의 방식도 있고, 작가에 대한 매력이 부과되어 팬덤 현상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전에는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작가들의 여러 행사들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독자와 시인 스스로 소통 창구를 만들어가는 독립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물론 여전히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고, 독립적인 활동에도 지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단순히 독서 인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좋은 사회는 시를 향유하는 인구가 늘어날수록 빨리 다가온다고 믿는다.)
시인들이 직접 나서서 책방이나 낭독 공간을 운영하면서 독서 인구를 늘리고 문화 활동을 이끌어가는 현상 또한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책방은 단순히 책만 소비되는 곳이 아니라 독립 문화 활동의 근거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 시’의 확산이다. 이제 그곳에 가면 친밀한 시인들이 있고, 아름다운 작품이 있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내면의 교류가 가능한 공간임을 느낀다. 이 매력적인 시의 확산을 시인과 독자들이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든 그 반대급부가 존재한다. 이러한 매력적인 현상에 재미를 느끼며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활동 영역이 되겠고, 여전히 시의 향유의 최전선에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시 밖의 것들이 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우려를 느낄 수 있다. 시 자체에 대한 접근보다 그 외의 것들이 시를 잠식하고 평가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고민에 빠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액션을 취할 수 없는 자신의 역량에 자책을 하거나 그 현장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겠고, 사회적 확산을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왜곡된 시각을 덧씌우는 현상이 생겨날 수도 있다. 젊은이들의 영역일 뿐이라며 도외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이른바 셀러브리티의 상징처럼 읽힌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팬덤 현상이 만들어낸 작가의 연예인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작가는 작품에 집중하는 것에 앞서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더욱 중시하거나 독자들이 작품과 시인을 동일시하여 불편한 판타지에 빠지는 아쉬움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무엇이든 앞면과 뒷면이 있기 마련이니까. 장점과 단점은 항상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런 모든 것과 상관이 없다. 시는 쓸 수 있는 것을 쓰는 현장이다. 쓸 수 없는 것까지 쓰려는 현장이다. 쓰이고 나면 스스로 움직이는 생물체이다. 시는 어떤 억압과 편견도 거부한다. 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하염없이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은 시의 것이기도 하지만 시와는 상관없는 것이기도 하다. 미지를 향해 미끄러져가는 여정 속에서 구현되는 많은 현상들이 시를 조종할 수는 없다.(만일 조종당한다면 그것이 시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시는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자기 운명으로 간다. 시를 쓰는 사람도 시를 읽는 사람도 그 운명을 프레임 안에 가둘 수가 없다. 시는 스스로 간다. 어느 순간 시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시는 그럴 뿐이다.
셀러브리티가 되는 시인이 있으면 또 어떤가. 독자가 100여 명 안팎에 머무는 시인이 있으면 또 어떤가. 등단제도를 거부하며 시 쓰는 사람도 있겠고, 시인이 되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시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겠고, 제도 안에서 자신의 언어를 돋보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편견에 사로잡혀 작품을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 또한 우리 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억압일 뿐이다. 그것은 쉽게 읽히는 시이든, 쉽게 읽히지 않는 시이든 마찬가지다. 쉽게 읽히는 시가 있으면 불편하게 읽히는 시도 있게 마련인 것처럼 대중의 환호를 받는 시인도, 대중의 관심을 덜 받는 시인도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다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하나의 프레임을 과도하게 선호하고, 그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들은 차별하는 억압적인 태도가 모든 것을 폐쇄적으로 만든다. 과도하게 어떤 것을 환호하게 되면, 그것에 권력이 생긴다. 문제는 그것에 권력을 부여하는, 시와는 상관없는 힘들이다. 그것은 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것들이 존중받는 것, 섣불리 평가되지 않는 것,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유지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좀 더 열린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단 편견을 벗어나보자. 그리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자. 참여해보자. 참여를 거부해보자. 뜨거운 관심을 보내자. 무심해지자. 응원하자. 비판해보자. 대안을 제시해보자. 아무것도 상관없어 보자.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해보자. 그야말로 재미있는 시의 현장이 되지 않겠는가.
               
시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향유되는 일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시가 사라진 사회다. 시가 죽어나간 사회는 지옥도가 구현되는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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