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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집중조명/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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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김락
신작시/무언가 외 2편
무언가
어김없는 하늘은
나의 하늘이 되기에는 무언가 아름다운 색
언젠가 배에서 내려 단단한 땅을 내딛었을 때
무언가를 상실한 생들이 있어요
오래도록 무두질하고 손질한
주황
초록
무언가
왜 포도무늬 사탕 비닐 포장지를 벗기면서
지금껏 본 적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는지 몰라요
바스락거리기만 하는 생을 구겨서 아무데나 못 버리는지 몰라요
전말과 함께 눈에 덮힌 작은 새가
무언가 말해 줄 수 있다면
커다란 주먹이 돋아난 슬픔에게 자꾸 으깨지는 까닭을
어떤 가슴이 오래전에 묻힌 이유를
몰라요, 무언가를, 나의 불 꺼진 계절을 반죽하는 손가락들을
그것을 찾아
무언가를 평생 읽었어요
무언가를 잡고 놓쳤어요
단지 여름의 끝
여름의 끝이 학교 복도에 있었다
감정이 날씨를 구성하고
고교배구대제전과 늦털매미가 어울리듯이
학교 복도에서 입을 다문 채
사라진 마을들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괜찮았다
습기 찬 벽에 얼굴을 감추면
8월의 파도소리가 보였으므로
힘 센 허무와 반짝거리는 허기
외에는 손에 닿지 않아서
손가락이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 같은 학교 복도에서
여름의 끝을 걷는 것
어둠이 몰래 몸집을 불리면
두 팔로 우산을 돌려서 차가운 구멍이 되는 것
조용히 바깥을 흡수하며
저녁의 긴 다리로
대기의 젖은 양말을 신고서
단지 여름의 끝을 홀로 걸어갔다
레볼루션
노래 주변의 술렁거림
그것을 몸에 감는다 우리는 돌면서
바람에 찢어진
자정의 구름
도착할 땅을 모르는 열차가
우리를 돈다
흰 나비의 여린 고함을
비밀스런 가게를 찾는 사이
때로는 왜 도는지 생각해보지만
우리는 돈다
들끓는 냉정으로 지은
국가를
필연을 살해한 우연을
호두를 감싸 쥔 리듬
말발굽 소리처럼 가슴에 박히는 밤
나쁜 마음과 심장 사이 오간다
하얀 탁구공
자선대표시
파트라슈 달리다
달리자
파트라슈! 네로가 달린다
동산을 둘러싼 하얀 안개 속에서
이곳은 가루약 맛의 바람이 불 때가 있다
동산의 전모를 덮으며
눈코를 찡그려보지만 왜 항상 해맑은 표정인지
태양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여러 빛깔의 눈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지
아픈 나무들이 떨어뜨리는 과실과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로
서늘한 입김을 뱉는 마른 식물들에게
*
굶은 희망들
길고 뾰족한 지팡이에 짓눌리네
네로가 달리네
파트라슈, 하하하! 네로가 반달입으로 부르네
메아리도 조용히 웃음을 따라해 본다
생물은 느낌을 연장하고 싶어
따뜻한 물에 이마를 댄 감촉
사람들 몰래 저녁에 취한 느낌처럼
하지만 저 옆자리에 시체를 태운 채 달리는
운전석이 으깨진 검은 마차는
낡고 케케묵은 울타리를 언제쯤 넘어갈까
*
파트라슈! 지금 너의 표정은 무엇이지?
네로가 반달입으로 묻는다
누구도 궁금하지 않은 두꺼운 커버의 스케치북을
끼고 달리며
낭비한 시간이 너무 많은 뭉게구름의 표정
내일로 가는 여행비가 축나가는 여행자의
비 맞는 표정이지
시대착오적으로 나를 오해하지 말길
태양에 오래 탄 포도가 갈라진 상처를 봉합하는 저녁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시체가 되어야 할까
절망이 수북이 쌓인 수레를 끌고
*
파트라슈! 파트라슈!
(이해할 수 없군) 네로! 네로!
이 동산의 주인공은 누구지? 네로가
정지한 반달입으로 묻는다 누구지?
오래된 화면 속으로 달려가며
얇은 막 속에 갇힌 주인공
너는 얼어붙은 혀
새벽하늘의 굽이치는 치맛자락이 하얀 새들을 몰고 간다
컹컹 행군하는 저 작은 발들을 눈에서
놓치고 싶지 않아
달린다, 파트라슈가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산이 정적을 가른다
마테르 돌로로사
입 속
가득한 공갈젖꼭지
헝클어진 머리털
가득한 꿀 냄새
바지 한 쪽 구멍으로 나온
작은 두 발
명랑한 귀
가득한 솜사탕, 그런
아기와 여자 사이
흠집투성이 울음이 굴러가
불안하게 손잡은 들판 위로
검은 쥐들이 도망치지
컵을 두드리는 얼음들처럼
아무도 몰래
팔을 자르는 겨울나무를 지켜보기
사탕수수대로 엮은 두려움
가득 끼워진 여자의 몸
소리가 비틀거리는 라디오, 취한 비둘기, 구멍 난 두어 자루 씨앗의 행방, 바다에 흘러간 죽은 씨앗들, 나흘 후에나 강으로 빠져나가는 울음, 할 말을 찾지 못해 흐느끼는
입
가득 끼워진 공갈젖꼭지
무감한 표정으로 가는 아침 안개
가득 끼워진 두 발
산문
쓰는 사람
1.
쓰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말랑한 가래떡을 실제로 먹는 것과 비등하게 읽는 순간 기분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가 본 적 없는 마을을 읽으며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마음 어느 구석이 아파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상실 된 삶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은 만들어질 수 없지 않은가. 무언가가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단정하고 싶지 않고, 다만 가 본 적 없는 풍경을 그리워한 너는 이내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첫 책을 읽었을 때 안개 낀 런던의 풍경과 차가운 골목의 냄새가 좋았고, 셜록이 꽤 괜찮은 주인공이었음에도 그 곳의 향기가 더 좋았다. 결론적으로 다른 세계는 무한했다. 희열을 주는 모종의 향수와 향기들을 수시로 마음껏 만들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물려주신 붉은 빛이 도는 갈색 책상 상판에까지 마음껏 볼펜으로 글자를 썼다. 너무 낡았고 원하지 않은 책상이라 부담이 없었던 이유도 크지만, 너는 다만 어디든 쓰는 것이 좋았다. 종국에는 몸이 아파도 약을 먹는 방법 대신, 누군가에게 알리는 대신, 그저 아프다는 세 글자를 쓰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적도 있지만, 다만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얼마나 신속한 위안인가. 그런데 다른 세계를 원하는 대로 만들어낸다는 것이 애를 써도 꽤나 어려운 일인 줄은 그 때는 미처 몰랐다.
2.
쓰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자라서, 필연적으로 쓰는 행위에 마음을 주게 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얼굴을 때리면, 상대방 얼굴을 쳐야 할 손으로 자기 가슴을 치는 한심한 경우가 있겠고, 말이 느리거나 톤이 남달라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용보다 소리의 질감에 더욱 집중하게끔 하는 경우가 있겠고, 말할 때는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쓰는 순간에야 찾아와 주는 경우가 있겠고, 모두 다 인 경우도 나는 보았다. 너는 헛기침을 하겠지만.
계속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있지만, 너는 부산의 어느 병원에서 태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쓰는 사람으로 살고자 했다. 하지만 힘들게 기를 쓰고 세상에 태어났으니 마치 소명을 다 한 양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기에 너는 말을 도둑맞아 버렸고, 덕분에 너의 아버지는 5년 후 걱정을 하셨다. 5살이 되어도 애가 말을 안 하니 바보인가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덕분에 너는 표현의 과정으로 말 보다 글을 무척 사랑하게 되었고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말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언어를 응시하는 밤이다.
3.
쓰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의 빛은 쓰는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오랜 시간 쓰인 여러 편들의 글이 보여주는 것이어서 너는 점차 어느 색깔을 엿보게 되었다. 감정의 기저가 무슨 색으로 뜨이고 있는지.
죽음을 닮은 것들을 향해 너는 자주 서 있었다. 어느 날은 어두운 해변에서, 어느 날은 발이 빠지는 늪에 홀로 떨어진 채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등지고 있었다. 어느 날 등 뒤에 무언가 툭 떨어져도 빛나는 별이 아닐 거야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때문에 너는 사랑을 해봤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무엇과 무엇이 부딪히는 마찰의 순간에야 얻을 수 있는 예쁘고 거친 감정들에 너는 예민한가. 결코. 하지만 죽음을 바라볼 때야 삶의 동기를 얻었으니 너는 다른 감정보다 공포의 감정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뜨끔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죽음을 닮은 것들을 향해 서 있었던 이유는 다시 두 발로 하루를 살기 위한 방법이었음을. 그래서 너의 오늘도 어떤 색으로든 빛을 내길, 나는 바란다.
4.
이제 너의 얘기 말고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자 한다.
후회라는 정서가 왜 그다지 필요한지 의문을 가진 시절이 있었다. 괜찮은 선택들을 하며 살아 온 멋진 생이어서가 아니라, 얕고 깊은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실패하고 다치고 막히고, 그리고 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후회를 하고 다시 다질 틈이 없이 또 실패하고, 후회는 일정량의 긍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라 여겼다. 그 생각은 역시 실패인 것이다.
나는 요즈음 후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자주 등이 굽으며 후회를 한다. 얼마 전 오랫동안 꿈꾸던 소원이 이루어졌고, 첫 시집을 낼 수 있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가족에게 당장 전화를 했다. 하지만 나를 등단시켜 주신 고마우신 분을 떠올리지 못했다.
일주일 후, 병원에 계신지도 몰랐던 선생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무엇인가. 선생님께서 나의 시를 일으켜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작은 불씨조차 되지 못했을 텐데, 연락을 드렸더라면 선생님과 조금이라도 언어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무엇인가. 생각하고 생각해도 큰 잘못은 계속 남을 것이다.
김락 시의 특징에 대한 시론試論
백인덕
차이의 불안; 밖에서 안으로 ‘구겨 넣기’의 비애
1.
한 가지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개성적인 시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배워야 하는가? 누군가는 당연히 그렇다고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정말 불필요하다고 강변할 것이다. 왜 배워야 하는가? 간단하다. ‘시는 시이기 때문이다’, 비록 시적 정의의 역사가 오류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체가 다 오류라기보다는 일정 부분 적합한 개념으로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완결된 형태로 ‘무엇, 무엇이 시다’라고 말해진 적은 없지만, 일말의 오류를 감내하고라도 정의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결국 오늘 현대시의 모양을 만들어 왔다. 필자는 이 부분을 강조하는데, 더 이상 과격하지도 않게 ‘시는 쓰는 사람 마음이다’라는 생각이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결과가 고작해야 누구의 말처럼 시를 ‘화려한 연미복을 입은 산문’ 정도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시poetry의 개념의 역사를 부정하기 보다는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이 자기 개성을 발견하는 데 더 유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배우지 말아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아무리 시 자체에 근사치로 접근한다 할찌라도 그 정의는 이미 기존의 것, 진부한 세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개성적이고자 하는 존재는 그런 것쯤은 간단히 외면할 정도의 용기, 배포가 실제로 더 필요하다.
개성적인 존재로써 자기를 정위定位하고자 하는 시인(비교적 신인으로서)김락 시인의 고민이 깊어지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그런 판단에 앞의 사족이 길어졌다. 실제로 이번에 접하게 된 신작 작품들 속에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의 정위에 대한 불안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김없는 하늘은
나의 하늘이 되기에는 무언가 아름다운 색
언젠가 배에서 내려 단단한 땅을 내딛었을 때
무언가를 상실한 생들이 있어요
오래도록 무두질하고 손질한
주황
초록
무언가
왜 포도무늬 사탕 비닐 포장지를 벗기면서
지금껏 본 적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는지 몰라요
바스락거리기만 하는 생을 구겨서 아무데나 못 버리는지 몰라요
전말과 함께 눈에 덮인 작은 새가
무언가 말해 줄 수 있다면
커다란 주먹이 돋아난 슬픔에게 자꾸 으깨지는 까닭을
어떤 가슴이 오래전에 묻힌 이유를
몰라요, 무언가를, 나의 불 꺼진 계절을 반죽하는 손가락들을
그것을 찾아
무언가를 평생 읽었어요
무언가를 잡고 놓쳤어요
―「무언가」 전문
이 작품의 표제이면서 핵심어라 할 수 있는 ‘무언가’는 축자적 의미의 ‘정체불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1연의 경우, 1행의 ‘어김없는’이라는 관형수식이 ‘하늘’을 제한하면서 동시에 행의 ‘무언가’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2연에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단단한 땅을 내딛었을 때”, 즉 시적 화자가 ‘하늘’이 아니고 ‘땅’에 관심을 돌렸을 때 ‘무언가를 상실한 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일까? “오래도록 무두질하고 손질”했기 때문에 오히려 ‘무언가 아름다운 색’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이쯤에서 ‘무언가’가 마치 ‘개와 늑대의 시간’의 알 수 없는 형체처럼 시인에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가까워지거나 희미한 빛이 분명해지면, 즉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정체를 알게 될 수도 있는 그 ‘무언가’가 아닐까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런 기대감은 3연의 “바스락거리기만 하는 생을 구겨서 아무데나” 버리면 혹은 “전말과 함께 눈 덮인 작은 새가/무언가 말해 줄 수 있다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아직 그러한 ‘특이점’은 도래하지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드러나듯이 시인은 “그것을 찾아/무언가를 평생 읽었”고 심지어 ‘잡고’ 있었지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아직도 과거처럼 “커다란 주먹이 돋아난 슬픔에게 자꾸 으깨”어지고 “나의 불 꺼진 계절을 반죽하는 손가락들”의 정체에 대해 “몰라요 무언가를”이라고 대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시인은 그 ‘무언가’(여기서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상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인데, 왜냐하면 마지막 연에 드러나듯 ‘그것을’ 찾아, 한 행위가 ‘무언가’이기 때문이다.)의 동인動因을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힘 센 허무와 반짝거리는 허기
외에는 손에 닿지 않아서
손가락이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 같은 학교 복도에서
여름의 끝을 걷는 것
어둠이 몰래 몸집을 불리면
두 팔로 우산을 돌려서 차가운 구멍이 되는 것
조용히 바깥을 흡수하며
―「단지 여름의 끝」 부분
주지의 사실이지만, 불안은 밖에서 침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에서 자라나 밖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몸집을 불리고, 뿌리를 뻗어 정신의 외계外界의 시공간마저 왜곡하고 변형한다. 시인은 ‘무언가’에 대해 늘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집착하지만 그 이유는 손에 움켜쥘 수 있는 것이 “힘 센 허무와 반짝거리는 허기”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둠이 몸집을 불리면/두 팔로 우산을 돌려서 차가운 구멍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마는데, 손을 뻗어, 즉 투사投射의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하기보다는 밖을 ‘흡수吸收’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된 이해인데 우리는 외부의 빛을 흡수하면 자신이 어둠에 갇히게 될 것이란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외계의 빛은 다 흡수할 수도 없고, 빛을 흡수하면 스스로 빛나 사위는 오히려 환하게 밝아지는 경이를 경험할 확률이 더 높다. 이를 시적 개성에 비유해보면, 타자로부터 시적 영향을 얼마나 받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빈도頻度나 강도强度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의 문제라는 점이 밝혀진다. 과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신인은 언제나 강한 시인의 그림자로 남게 되고, 심지어는 진부한 대체물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김락 시인의 불안이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오히려 걱정을 더는 일이 될 것이다. 휠덜린의 유명한 말처럼 ‘위험이 있는 그것에 구원도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2.
차이를 말하고자 시작했다가 ‘지향’을 말한 셈이 되고 말았다. 동일성으로부터 ‘차이’를 구원하는 것은 지향과 결부될 때 더 복잡하고 지난至難한 일이 되고 만다. 지향은 시인이 이미 파악한 것처럼 끊임없이 재귀하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바람에 찢어진/자정의 구름/도착할 땅을 모르는 열차가/우리를 돈다”(「레볼루션」)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처음에는 ‘도착할 땅’을 찾지 못한 ‘열차’가 ‘우리’를 돌지만, 결국은 ‘필연을 살해한 우연’ 속에서 ‘우리’가 돈다는 인식의 변화다. 밖(기차)이 안(우리)으로 전치되는 이 상황을 시인은 최소한의 시어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연, “호두를 감싸 쥔 리듬/말발굽 소리처럼 가슴에 박히는 밤/나쁜 마음과 심장 사이 오간다/하얀 탁구공”에 이르면 그 담담함이 극한 대립을 겨우 억누른 호흡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호두’를 감싸 쥔 리듬이 미약한 생명의 맥동이라면 이것이 곧 거대한 ‘말발굽 소리처럼’ 시인의 가슴에 박힌다는 것은 시인이 ‘나쁜 마음과 심장’ 사이에서 어떤 전형적 개념(하얀 탁구공)을 진자운동 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다.
이쯤에서 김락 시인의 이번 작품들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무엇보다 시적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시인은 최소한으로 ‘시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내장한 채 그것을 거부하면서 즉 진부화 하면서 자신의 개성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문제는커녕 오히려 고무, 격려 되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개성적이고자 하는 작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특이성’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차이란 무엇을 부정함으로써 개별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이함으로써 생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성’된다는 것이다. 시로 국한하면 이 생성은 오롯이 ‘상상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수행될 리가 만무하다. 다시 말해 시에서 차이를 만드는 방법은 시인의 상상력의 깊이와 넓이에 달린 것이지, 기존 시들과의 차별성만 가지고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
김락 시인의 자선 대표작들은 이런 점에서 그 개인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 시의 전망을 한층 밝게 하는 데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입 속
가득한 공갈젖꼭지
헝클어진 머리털
가득한 꿀 냄새
바지 한 쪽 구멍으로 나온
작은 두 발
명랑한 귀
가득한 솜사탕, 그런
아기와 여자 사이
흠집투성이 울음이 굴러가
불안하게 손잡은 들판 위로
검은 쥐들이 도망치지
컵을 두드리는 얼음들처럼
아무도 몰래
팔을 자르는 겨울나무를 지켜보기
사탕수수대로 엮은 두려움
가득 끼워진 여자의 몸
소리가 비틀거리는 라디오, 취한 비둘기, 구멍 난 두어 자루 씨앗의 행방, 바다에 흘러간 죽은 씨앗들, 나흘 후에나 강으로 빠져나가는 울음, 할 말을 찾지 못해 흐느끼는
입
가득 끼워진 공갈젖꼭지
무감한 표정으로 가는 아침 안개
가득 끼워진 두 발
-「마테르 돌로로사」전문
이 작품이나 「파트라슈 달리다」의 경우, 표제의 상징성이 너무 강해서( ‘마테르 돌로로사’의 경우에는 반드시 주석이 필요하다) 오히려 시인의 신선한 의도가 거대 상징에 둗혀버릴 위험이 없지 않지만, 이야기(일종의 ‘환상’)와 현실을 등치等値의 관계에 놓고 거기에서 시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 시도는 충분히 가치가 인정될 것이다. 시인은 ‘공갈 젖꼭지’가 물린 아기와 “사탕수수대로 엮은 두려움/가득 끼워진 여자의 몸” 사이에서 ‘컵을 두드리는 얼음들처럼’도망치는 ‘검은 쥐’라는 이미지를, 또한 “소리가 비틀거리는 라디오, 취한 비둘기, 구멍 난 두어 자루 씨앗의 행방, 바다에 흘러간 죽은 씨앗들, 나흘 후에나 강으로 빠져나가는 울음, 할 말을 찾지 못해 흐느끼는//입”의 상사성相似性을 찾아낸다. 단언컨대, 이러한 작업들이 김락 시인은 진정한 ‘개성’적 시인으로 정위定位하는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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