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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소시집/현택훈/불곰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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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12회 작성일 18-12-1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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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현택훈



불곰 외 4편


파미르고원에 있는 오래된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이 곳에서 한 사흘 굶을 계획입니다 이곳까지 떠밀려오느라 너무 많은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저는 겨울을 사랑하겠습니다 우수리에서 온 편지는 어슬렁거리는 저녁 구름보다 조금 짙은 그리움입니다 이 늙다리 호텔은 꾸벅꾸벅 졸기 좋은 굴입니다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가 몇 대 더 지나가면 밤이 깊어질 것이므로 유리창마다 몇 량의 눈뭉치를 눌러 담을 수 있겠습니다 불기둥을 안고 잠드는 밤이 필요했으나 늙수그레한 눈송이에게도 송유관 같은 밤이 있었을 것입니다 늙어 기력이 쇠하면 산딸기나 먹겠지만 아직까지는 가축을 건들지는 않습니다 고선지(高仙芝)의 말도 이 부근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는 생각을 하니 산울림을 나뭇잎에 비축해둔 남쪽 산이 눈앞에 선합니다 그 산 골짜기에서는 해마다 나뭇잎들이 계곡의 물을 품으면 앵두가 익었지요 허겁지겁 먹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던 밤에 밤하늘엔 송사리 떼 같은 별들이 가득했지요 경의선을 탄 적 있다는 러시아 무희는 입에 칼을 문 듯 어색하게 웃어보입니다



구에서 십 년 살아보니


바늘귀가 들은 건 호롱불 흔들리는 이야기였지 바느질로 기운 겨울 밤하늘은 스무고개를 하며 찾아가는 길이었지 우수리에서 불어오는 북동풍, 그 차가운 목소리가 귀밑에 입을 맞췄어 어린 감나무가 있던 집, 애기업개로 살다 간 삼양 고모는 열여섯 살이었어 삽사리문고 읽다 까무룩 잠들면 수 천 년이 흘렀던 거야 옛 이야기 속 누이는 다 슬픈 건지 솜이불 다독이는 소리 낮아졌지 비키니 옷장 속에 숨어 얼굴을 묻으면 라디오 소리가 더 잘 들렸어 엄마 키만 한 기타를 갖고 싶었어 이름 난 별자리 옆에는 탁아소가 성행이었고,



남도의원


바닷바람은 수평선에서 불어올까
푸른 알약이 쏟아진 듯한 바다

낡고 야윈 사람들은
원고지 한 칸 같은 병실에 들어가
비로소 슬픔을 분양 받는다

더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으러
남도의원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바다가 보이는 의원에서
약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이 있다

병원에서 겨울을 나면
얼굴이 눈사람처럼 하얗게 될 것이다

수평선 너머에는 어린 바람이 머물러 있을까

부근에 염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공기에 남아있는 소금기가
하얀 시간의 부위에 얹힌다

오래된 병원
장기 입원 환자들은 자신의 병과 오래 사귄다

한 보름이나 한 달
남도의원에 입원하여



세계의 아침 인사


우리 오늘 밤엔
세계의 아침 인사를 서로 건네 볼까
나무 자전거로 만든 집에서는
창문이 따뜻한 이불이지
마지막 인사는 세계의 아침 인사
우리 오늘 밤엔
세계의 아침 인사를 서로 건네 볼까
반나절 동안 빨래집게를 찾았는데
그새 젖은 옷이 다 말라버린 섬에서 살았네
소파에서 잠든 참새가 따뜻해
꽉 끌어안으면 심장이 터져
사랑해서 밟아버린 악기들
비명 같은 소리를 길게 뱉고
더는 딛을 곳 없는 곳에서
세계의 아침 인사를 할 거야
네가 부르는 노래는 모두 세계의 아침 인사
손톱 깎기 좋은 양지를 찾아다녔을 뿐인데
그럭저럭 살고 있다는 안부를
세계의 아침 인사로 건네 볼까
잘 지내느냐는 말을
구겨서 창밖으로 던지고 싶은 높이에 누워 잠들지
놀이터는 밤이면 훌쩍 자랐다가 
낮이 되면 도로 아이가 된다는 내용이었던 같아
네가 내게 들려준 세계의 아침 인사는
놀이터 옆을 지날 때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곤 해
이젠 잘못 탄 버스에서도 당황하지 않아
아무리 멀리 가도 섬에서 내릴 테고
바닷가 따라 걸으면 다시 장미커텐 앞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세계의 아침 인사를 듣겠지
세계의 아침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무인비행기


너의 하늘이 요즘 어떤 색깔인지
운동화 끈을 그렇게 묶으니까 자꾸 풀리잖아

부드러운 홑이불을 덮고 누운 도시의 하늘 위를 비행한다
보고 싶어도 갈 수 없으니 무인비행기를 띄울 수밖에

착륙하고 싶지만 안아보고 싶지만
나의 임무는 서늘한 고도에서 맴돌지

밥 먹을 때 젓가락을 국 그릇 위에 올려놓고
영화 볼 때 중간 열 왼쪽 끝자리에 앉고
편의점 음료수 코너 앞에서 선택하지 못해
한참을 서 있는 거 여전해

차갑고 축축한 정찰 내용
기상 악화로 흐릿한 하늘 탓하며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불시착한 마음은
그곳에 박혀

바람꽃 다시 피면
안개가 암호처럼 피어오른다



시작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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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가 고장 나서 새로 하나 샀다. 무소음으로 샀다. 그 전에 있던 벽시계는 초침소리가 신경 쓰였다. 낮에는 잘 들리지 않는데 조용한 밤에 초침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그 소리를 계속 들으면 불안한 마음이 나를 따라왔다. 누군가 나를 미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소음으로 샀더니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그래도 궁금해서 벽시계에 귀를 갖다 대보니 시계 태엽 소리가 가늘게 들리는 게 아닌가. 모든 흐르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반짝이듯 소리를 내는 벽시계는 시간을 증명한다. 하늘은 며칠 참았다가 바람소리를 낸다. 맑은 날엔 빈 병에서 나는 바람소리가 더욱 크다.
 두 손바닥으로 두 귀를 막았을 때 들리는 소리가 지구의 자전 소리라는 말을 듣고  멍청이처럼 따라해 본 적 있다. 하지만 지구의 외부는 진공 상태이기 때문에 음파가 발생할 수 없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손바닥으로 두 귀를 막았을 때 들리는 우웅, 하는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그 소리는 심장 박동 소리처럼 내 안에서 반짝인다. 그것은 시간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소리는 멈추지 않고 흐른다. 두 귀를 막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아득한 우주로 마차가 구르는 소리가 반짝인다.
 아주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클로버 밑으로 들어가 비단벌레의 고충을 듣고 싶다. 비단벌레는 쌓인 게 많을 거야. 애벌레로 지내는 7년 동안 말을 하지 못한 매미는 땅 밖으로 나와서는 세차게 노래한다.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게 아니다. 시의 행과 행 사이에 얼마나 많은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리는가. 지금은 말하지 못했기에 내일은 쓸 수 있다. 말하지 말고 글로 소리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유리창과 필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바람 부는 날엔 유리창이 먼 곳의 유리창에 타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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