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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신작시/하기정/종이배의 기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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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하기정
종이배의 기분 외 1편
종이배는 배의 모양을 갖춘 종이이다 그러니까 종이배는 종이를 모른다 좁은 창으로 햇빛의 귀퉁이가 날카롭게 접히는 줄을 모른다 나무의 낮잠을 모른다 나뭇잎배의 소용돌이를 연못의 깊이를 모른다
햇빛은 갑판 위에 발을 들여 놓는다 앞이 접히면서 자꾸만 뒤를 만든다 각을 접는 손가락의 지문을 모른다 다시 펼치면 무릎이 생겨나는 걸 모른다
눈이 내려서 연못이 얼 것 같은 날의 기분을 모른다 퉁명스럽게 맨땅 위에 올려놓아도 엎드려 정박할 줄 모른다 진짜 배의 기대로 가득 차 있다는 자각을 모른다
비행기여도 트럭이어도 상관없다 오직 나아간다는 물살의 기분으로
의지는 의지대로 노를 젓는다
욕조의 물이 넘치도록 난파할 줄 모른다
절정
그러니까 우린 그날 저녁 무렵
만나서 죽기로 했잖아
죽어서 새가 되기로 했잖아
다음을 약속하기도 전에
이 만남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가 맨 꼭대기라고 생각하면서
굴러 떨어지기로 했잖아
시계에 금을 그어 놓고
낭떠러지로 구르는 연습을 하면서
이 시간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줘
레. 미. 파. 솔까지 도의 절정
동맥이 두부처럼 부드럽게 끊어졌으면 좋겠어
부두처럼 조용하게 정박했으면 좋겠어
우린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난파하기로 하자
비상한 재주도 없이
날아오르려는 새처럼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가서
우리는 뛰어 내리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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