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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신작시/기명숙/대낮 풍경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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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기명숙
대낮 풍경 외 1편
E아파트 들뜬 벽지 뒷면이 寂寞의 서식지가 된 지 오래다.
몇 겹 단층을 이룬 전화기 위 먼지는 화려한 언술의 대화가 끊긴 이전을 기록 중이고
지금 삼중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패트롤카의 능수능란한 저 굉음은 손목을 긋고
15층에서 몸을 날린, 우울증 환자의 스토리를 호송중인 게다.
집안 풍경의 비밀이란 서로의 외로움을 발설하지 않는 것
식기세척기에 여러 날 갇혀있는 접시의 꽃무늬가 시들어간다든가
장식장 위 찻잔이 도도하게 턱을 치켜세워도 한 방울의 찻물을 담아내지 못하는
비틀고 꼬집어도 하루 종일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는 몇 개의 방문만
군더더기처럼 버려져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다.
쓰다 만 가계부와 먹다 남은 두통약 몇 알,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민무늬 식탁은
턱 괴고 앉아 최대치의 고요를 우려내어 마신다.
곰팡이가 습기를 타고 순식간에 번지듯 외로움이 창궐할 때, 虛無는 점령군의 모자를 쓰고 아파트 내부를 장악한다.
차라리 칼부림 사건 현장이거나 방화를 도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딩딩, 뱃가죽이 늘어난 벽시계 녹슨 관절로 외로움을 타종하지만
견디고 있다는 사실은 베란다의 식물들처럼 잎맥이 변색됐을 때야 눈치 채는 것
띠리링, 배달을 묻는 세탁소 전화벨 소리에 후다닥 달려들어 귀를 쫑긋거릴 때, 대낮 풍경이 제법 생기가 돌았던가!
맨드라미 네일 아트
서른여덟, 남편과 사별했다는 여자의 네일 아트는 특별하다. 묵은 손톱을 잘라 내거나 갈아 없앨 때의 집요함에 남자들은 벌벌 떤다. 병들고 볼품없어진 내면을 들키지 않게 화장이 두꺼워지듯 에나멜을 덧칠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왕국의 로맨틱한 소재를 그려 넣고 현란한 솜씨와 그럴듯한 空虛를 악세사리 마감재로 사용한다. 진열대 위 형형색색 손톱이 슥슥 자라는 동안 멀쩡하던 여자가 심장을 꺼내놓고 진저리치는 밤들이 있다. 남자들은 여자의 변덕을 피해 달아나고 샵 창문 시든 햇빛 사이로 동네 여자들의 수근거림이 삐쭉빼쭉 걸리는 게 다반사였다. 며칠을 앓았을까, 여자의 속눈썹은 더욱 길어지고 입간판 속 맨드라미는 한여름 폭염에 쩍쩍 갈라지고 있다. 붉게 더 붉게, 여자에 대한 소문은 더욱 요염해지고 미닫이문을 거칠게 흔드는 바람소리에 소스라칠 때마다 맨드라미 까만 씨앗이 후두둑 떨어진다. 연일 이상기온 찜통더위로 입간판이 녹아내리고 저 여자의 왕국도 병든 손톱의 안쪽과 같이 바스락바스락 갈라지고 있는 중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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