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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신작시/김성호/비 오는 날의 달팽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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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성호
비 오는 날의 달팽이 외 1편
비가 온다. 시작은 이래야 했다. 자주 가는 장소, 내가 담배를 피우며 커피잔을 놓는 장소는 거기, 내 자리에 달팽이가 보였다. 나는 쓸 것이 많았지만 달팽이는 쓸 것을 준 것이다. 나는 집을 갖고 사는 것이, 집을 갖고 다니는 것이, 그 모습이 참 귀엽고 앙증맞았다. 달팽이가 움직이다가 풀이 눈에 닿아서 눈이 쏙 들어가는 모습이 참 귀엽고 앙증맞아서 나도 덩달아 눈을 깜빡였다. 비가 온다. 왜 비만 오면 달팽이가 보이는가? 달팽이는 하나의 시, 나는 달팽이를 보며 하나의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저것은 오래도록 기어온 나의 시, 저것은 동그랗고 우왕좌왕하는 말랑말랑한 나의 시다. 달팽이를 보고 돌아온 것이 내가 가져온 나의 시. 달팽이는 떠났지만, 내가 달팽이를 떠나 왔지만, 내가 달팽이를 보며 움직이는 모습이 골똘히 집이랑 함께 다니는 달팽이였다. 그렇게도 아침을 건드리는 것이 달팽이가 빗속에서 띄운 모가지였다. 부슬부슬 비가 온다. 부슬부슬 비가 오니까 빼꼼 나왔다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간다.
숨이 차오르기 전에
올바르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람을 그리워한다
바람은 나를 그리워한다
눈 녹는 비파여
말은 못하지만 비파여
세모나고 네모난 그림 같은 손짓이 있다
입김을 터는 조각들이 있다
도시가 내게 주는 것이 있다
황혼이 내게 주는 것이 있다
어디론가 일치하는 자극의 소리가 있다
나는 바람을 메운다
바람이 나를 부른다
마시고 싶은 공기가 있다흑점의 불길이 있다
거센 박동과 고동과 아픔이 있다
더러운 깨끗한 새가 있다
세수의 건지는 투명한 불빛이 있다
자유를 모르는 숭고한 정신이 있다
한결같은 눈보라가 있다
두 귀 사이에 침실이 있다
발가락이 있다
추상이 있다
백사장이 있다
벽이 있다
바람벽이 있다
바람기둥이 있다
바람줄기가 있다
바람물결이 있다
바람아래가 있다
바람씨가 있다
모자가 있다
싸라기가 있다
터가 있다
장막이 있다
비파가 있다
사람이 있다
거북이가 있다
멍이 있다
흔적이 있다
해가 있다
가르마가 있다
마늘이 있다
수사가 있다
반짝임이 있다
자정이 있다
눈동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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