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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신작시/김지훈/꿈의 백과사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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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지훈
꿈의 백과사전 외 1편
1.
모르는 것은 잊어버리고 싶은 것,
몽정처럼 비린 새벽이 온다
내 꿈은 왜 하필 군사용어로 도배 되었나 전생에 나는 나폴레옹의 병정이었을까
수많은 전략 포복과 계략들
잠깐, 어지러운 사전을 덮고 나는 잠이 든다 몇 페이지에 당도했을까
<아가씨 항시 대기>-<예수천국 불신지옥> 차라리 까막눈이었다면 나는
조금 덜 자랐을 텐데 더럽게 아름답고 쓸모없는 활자들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 텐데
부엉이의 시린 두 눈을 잠식하는 달 두 개,
흔들린다
나무가 성큼 가지를 뻗는다
내 목 앞까지 다가온 가지는 칼 셧다운 셧다운
나는
눈꺼풀을 방패 삼아 셔터를 내린다
꿈은 눈 뜬 자들의 몫,
밤새 눈을 뜬 채로 우는 자들의 몫
1-1.
아침을 펼친다 어젯밤에 대해 기록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인적인 꿈이었으므로 내 꿈은 지상에 뿌리가 없다 그러므로 속편이 없다 1면을 넘기지 못한다 내 꿈을 재단한 기사가 거짓말처럼 기록되어 있다
헤드라인을 밟으며 세상의 수천 수억의 눈알들이 굴러온다
나는 곧 쓰러질 볼링핀처럼 이를 악물고 눈을 감는다 속보 속보
출근시간이 지났다 부리나케 신문을 덮고 변기물을 내린다
너는 쓸쓸하고 우아하게 뒤를 닦는다 거울에 비친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
뒷통수에 눈알이 자란다 더러 변기는 말간 호수를 꿈꾸지만
지금은 비상 초비상 꿈은
등 뒤에서 자란다 수염난 변기에 비친 내 얼굴,
거울 속에는
어제의 얼굴 물오른 변기 속에는 지금의 눈물
들썩이며 빠진 어깨 다시 이어붙이며
귓가에 살며시
울어도 괜찮아 내가 함께 울어줄게 힘껏 울어줄게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는 이명이 만든 음악일까 소음일까
1-2.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은
되찾고 싶은 것들이 만든 알량한 자존심
까무라치게 사랑스러워 깨물었던 부엉이와 키핑해둔 나폴레옹 37년산
이것은 만국 사전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
누가 꿈을 발명했습니까 이토록 시커먼 적폐 속에서도
반딧불이가 살 수 있게 누가 젖은 숲을 잘 말려 널어놓았습니까
고모역
역마다 불이 꺼진다
부산에서 대구로 가는 막차
단 한 번도 고모역에 정차 한 적 없으나
나는 나직이 고모, 고모역을 불러본다
고모역에 내리면 고모들이
오래된 시계처럼 한참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역사 맞은편 철로 위
화물차가 길게 드러누워 있다
달리는 열차
순간의 풍경이 영원처럼 누워있다
나는 열차 맨 뒤 칸 창문 앞에 선다
멀어진다 까마득히, 고모의 밤에서 멀어진다
멀리 산이 서고 마을은 아득해진다
객차와 객차가 안간힘으로 서로를 물고 있다
문을 연다
내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차표 너머 중년 여인이 내 자리에 앉아 있다
무릎 위에 나를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던
고모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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