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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책·크리틱/이병철/전이와 이동, 새롭게 관계 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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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
이병철
전이와 이동, 새롭게 관계 맺기
김설희, 『산이 건너오다』/황영선, 『살아 있었습니까』
거처도 없는 낱말들이 낯선 몸들을 건너간다―김설희, 『산이 건너오다』
김설희의 『산이 건너오다』는 제목이 함의하듯 ‘건너옴’과 ‘건너감’, 즉 전이와 이동의 은유로 채워진 시집이다. 시 쓰기는 주체인 내가 대상인 타자 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이거나 대상을 내 쪽으로 옮겨오는 감응과 동화同化의 예술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과 만나는 것은 특별한 초월의 경험과 경이로운 무한 관념의 계시를 가능케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설희는 그 초월과 계시의 세계를 지향한다.
서정주가 「花蛇」에서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이라고 했을 때, 주체는 자아의 리비도를 뱀에 대입해 ‘스물난 색시’에게 스며들기를 갈망한다. 뱀에게로 전이된 욕망이 다시 대상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시는 주체와 대상 간의 전이와 이동이 이미지 변주를 통해 활달하게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쪽과 저쪽,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자아중심의 익숙한 세계가 아닌 타자지향의 낯선 우주로 건너가기를 시도한다. 또한 평범한 대상들이 돌연 특별한 존재로 바뀌어 새로운 의미로 수용되기를 소망한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하는 시적 순간은, 존재의 본질적인 이질성, 즉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이다. 파스는 이것을 ‘치명적 도약’이라고 불렀다. 타자성이 내게로 전이될 때, 또는 대상 쪽으로 ‘나’를 옮겨갈 때 시적 순간이 일어난다. 시인이 한 대상을 시의 오브제로 삼는 순간, 치명적 도약은 이미 시작된다. 대상의 타자성이 시인의 내부로 옮겨와 전혀 뜻밖의 것으로 변화하며, 시인 역시 자기존재의 본성이 전환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환청’이라는 현상을 시인은 “몸에서 몸으로 넘나드는 소리의 내면”으로 해석한다. “거처도 없는 낱말들이 낯선 몸들을 건너간다”(「환청」)고 시인이 쓸 수 있는 것은 ‘소리’를 발화자의 것으로 여기는 상투적 사고에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나온 까닭이다. 환청幻聽은 말 그대로 환각幻覺의 소리, 발화자 없이 떠도는 소리다. 고정된 발화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나의 ‘낯선 몸들’을 빌려가며 내 귀에 속삭이는, “거처도 없는 낱말들”이다. 시 역시 환청과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남다른 감각과 상상력을 익숙하고 평범한 자아의 입을 통해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을 빌려 대신 말하게 하는 행위가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설희의 시에는 타자에게 건너가고 싶은, 또 타자를 건너오게 하고 싶은 열망들이 가득하다. 고정된 의미와 확정된 관념, 획일화된 몰개성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비경계·비구분의 자유로운 상상력들로 번뜩인다. 김설희가 “나는 그만 비와 함께 바람 쪽으로 기울어진다”(「기울다」)고 고백할 때, 자아는 ‘비’라는 대상과 합일하여 ‘바람’이 은유하는 낯선 세계에 편입된다. 그녀가 “알몸은 다른 알몸을 경계하지 않는”(「이끼」)다고 말하는 순간, 어떠한 유행이나 기성의 관념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시의 알몸’은 타자를 경계하기보다 끌어안아 동화되는 쪽을 선택한다.
떨어진 산 복숭아 꽃잎이 벼랑길을 밝히는
계곡물 소리 산을 타고 높아지는
나무들이 물소리 쪽으로 몸 수그리는
나무를 건너가는 새소리 나직한
산이 제 둘레를 다 보여주는
돌탑에 하늘이 차고 들어 돌탑이 깜깜해지는
미물들 눈빛에 어둠이 깜박거리는
간이의자에 모였던 사람들 시나브로 흩어지는
창문마다 불빛들이 발돋움 하는
듬성듬성 가로등이 눈을 뜨는
어깨처진 사람들이 집으로 모이는
저 건너 송아지가 가장 순하게 우는
무리지은 너불미기들이 휘리릭 차갑게 꼬리 끌며 가는
―「저녁」 전문
위의 시는 김설희가 제시하는 전이와 이동의 시학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저녁’이라는 세계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서로 건너가고 건너오며 어우러진다. 대상들은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함께 충만해진다. ‘산 복숭아 꽃잎’은 기꺼이 ‘떨어짐’을 택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벼랑’으로 건너가 “벼랑길을 밝”힌다. ‘새소리’는 “나무를 건너가”고, ‘돌탑’으로는 “하늘이 차고 들어 돌탑이 깜깜해”진다. “창문마다 불빛들이 발돋움”할 때, “어깨처진 사람들”은 “집으로 모”여 “저 건너 송아지가 가장 순하게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 마침내 ‘저녁’이라는 한 우주가 완성된다. 건너가고 또 건너오면서, 익숙한 자기 자리를 비워 타자의 빈 곳을 채우면서, 자연과 사람이 모두 한 곳으로 모여들어 ‘송아지’의 순한 울음과 ‘너블미기(유혈목이)’ 꼬리의 차가운 온도를 향해 감각을 쫑긋 세우는 세계가 ‘저녁’이라고, 김설희는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해 말하고 있다.
스치우는 것들 빛나는 것들 다 인연이었어―황영선, 『살아 있었습니까』
황영선의 『살아 있었습니까』는 끊임없이 ‘아날로지’를 추구한다. 아날로지는 자연과 사람,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들을 하나의 유기체적 우주로 바라보는 인식이다. 황영선의 시는 타자를 향해, 자연을 향해, 소외되고 주목 받지 못하는 대상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기울어지며, 그 모든 것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자 시도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를 교감과 상응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황영선은 ‘관계 맺기’로서의 시를 통해 세계와의 화해를 꿈꾼다. 자연과 인간, 모든 사물들이 우주의 동일한 리듬 안에서 조화를 이뤘던 세계를 희구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 맺기는 자아의 성숙을 이루게 한다. 시인은 이 세계의 사물들과 끊임없이 관계 맺는 자다. 시 쓰기는 그 관계 맺기의 전과정이다. 이때, 특별한 것과 관계 맺어야 특별한 시를 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우나 진정 특별한 시는 특별하지 않은 것과 관계 맺을 때 써진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들, 몹시 사소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풍경들, 소외된 것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그들과 관계 맺기를 시도할 때 좋은 시가 탄생한다.
‘나’라는 인격체는 타자와 교감하고 상응할 때, 타자의 이질 특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며 상호간 동질성으로 어우러질 때 성숙해진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파스가 말한 것처럼 자기존재의 본성이 새롭게 전환되는 ‘치명적 도약’과 ‘너’를 통해 성숙해지는 ‘인격의 비약’이 동시에 완성되는 것이다. ‘홀로서기’는 미성숙한 자기중심적 사고다. 황영선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멀리 떨어진 타자지향의 태도로 이 세계와 상응하는 시인이다.
타자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걷어내면 무한한 은유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 낯선 타자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그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은 확실성과 설명의 세계와 결별해 불확실성과 우연, 혼돈으로 이뤄진 낯선 우주로 입장하는 행위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인하는 설명과 달리 해석은 대상에 감춰진 미시적 본질을 투시한다. 자기중심의 시각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의 내부를 심안으로 들여다보며 대상과 교감하려는 태도가 바로 은유다. 그러므로 은유는 시적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성숙한 정신이다.
이 시집의 총체성이 결국은 ‘관계 맺기’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모든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속에서만 온기를 느낄 수 있어요 … 어디 사람뿐이겠어요 꽃과 나무는 햇살과 바람의 품에서 피어나 자라고”(「프리허그」), “서로가 서로에게 틈을 내어 바라봐주고”(「심심풀이」), “스치우는 것들 빛나는 것들 다 인연이었어”(「바람의 유언」), “너, 나 제 빛깔 함께 풀어 그려가는 것”(「담쟁이」), “함께 걷고 마주하고 노닐고 뒹군다 낯선 이국의 풍경 속에 나도 섞인다”(「이국의 봄」), “조용히 몸을 열어 서로를 염려하고 곁에 있음을 안도하는 것이다”(「안부」), “너는 내가 될 수 없고 다만 닮아가고 있을 뿐이다”(「착각」)와 같은 대목들이 특히 그렇다.
지금 나는 시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미숙한 나를 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립니다
일그러진 우주를 피우기 위하여
오랜 기다림이 흐린 것과 낮은 것
강한 바람과도 말 걸어 친구합니다
깊어지고 깊어지니 달이 봅니다
가끔 흔들리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두 같은 길동무 아니겠는지요
―「떡잎의 발설」부분
황영선에게도 타자로부터 스스로를 걸어 잠갔던 시절이 있었다.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 두려워 꼭꼭 숨어 지내”던 그녀는 “때가 되면 아무 까닭 없이 돋는 꽃순들의 기운에 기대어 넌즈시 마음을 열었다”고 고백한다. 이 전향적 자각에 “나는 사랑할 줄 몰라서 꽃 피울 줄도 몰랐다”(「내 안의 꽃」)는 반성이 선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꽃순들의 기운’에 위로와 힘을 얻어 마음을 열게 된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낯선 사물들과 친구 맺기를 시도한다. “함께 호흡한다는 것”마저 두려웠던 시인으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시인에게 시 쓰기란 “아직 미숙한 나를 펴기 위해”, “일그러진 우주를 피우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리는 자기표현의 행위다. 내 마음을 먼저 열고 타자에게 다가갈 때, 타자도 온 힘을 다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서로 다른 곳에서 마주 다가온 두 타자가 어울리며 교감하는 순간, “흐린 것과 낮은 것 강한 바람과도 말 걸어 친구”가 되며, 세계의 온갖 사물과 현상들이 “모두 같은 길동무”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무처럼 풍성한 쉼이라 할 수 있지
상냥한 사랑법으로 나는 혼자일 수
있었어
세상의 소리를 듣고 볼 때
내 안에 밝은 햇살이 비추었지
반짝이는 말씀을 줍는 데는
호화로움 따윈 쉽게 버릴 수
있었지
오래도록 싱싱한 이 우주의 방에서
꿈틀거리는 나의 언어에
감사해야 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의 바람 나의 공기
―「곁을 두다」전문
‘곁’을 둔다는 것은 자존심, 독선과 독단, 아집, 고정관념, 자기애, 자기중심적 사고 등 자아를 이루는 빽빽한 자의식을 비우고, 타자가 들어올 수 있는 교감과 상응의 자리를 만들어두는 일이다. 황영선은 주체가 자신의 내부에 타자가 머물 ‘곁’을 두는 성숙한 정신을 “나무처럼 풍성한 쉼”이라고 말한다. 나무의 속성이 그러하다. 새와 벌레, 햇살, 비, 달빛, 사람, 짐승을 불러 모아 넉넉한 그늘 속으로 품어 안는다. 내 목소리에만 집중하지 않을 때, 내 판단과 경험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의 소리를 듣고 볼 때” 자아는 비로소 “내 안에 밝은 햇살이 비추”는 새로운 각성과 전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 각성과 전향의 풍성한 숲에서 시인은 “반짝이는 말씀”인 ‘시’의 열매를 수확한다. 그녀는 시를 얻는 데 “호화로움 따윈 쉽게 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교만과 허영, 자기우월감 같은 자기중심적 태도를 버리고 타자의 가치에 주목하는 순간, 시와의 만남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다. 황영선은 자아와 타자, 주체와 대상, 인간과 자연이 한 데 어우러져 태초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아날로지, “오래도록 싱싱한 이 우주의 방”에서 “꿈틀거리는 나의 언어에 감사”한다. 『살아 있었습니까』는 바로 그 감사의 고백이다.
이병철_2014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2014년 《작가세계》로 평론 등단.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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