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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권순긍 교수의 고전 읽기/아름답고 매운 ‘봄의 향기’―『춘향전春香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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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
권순긍 교수
아름답고 매운 ‘봄의 향기’
―『춘향전春香傳』
『춘향전』의 스토리텔링, 그 흥미롭고 풍성한 이야기의 숲
어느 나라나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가장 애독되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진정한 의미의 고전古典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 속에는 오랜 기간 민족의 정서를 대변해왔던 그 무엇이 있다. 흔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는 그 고전의 목록에 맨 위를 차지하는 건 무엇일까? 중국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있고, 일본에 『겐지모노가타리原氏物語』가 있다면, 우리에겐 당연히 『춘향전春香傳』이 있다.
18·9세기엔 판소리 「춘향가」가 12마당 중 가장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고전소설로도 200종이 넘는 이본을 파생시켰다. 게다가 서양의 오페라와 유사한 창극으로도 공연됐으며 1923년 처음 영화화된 후 무려 스무 번 이상이나 영화로 제작되었다. 2000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10대 춘향과 이몽룡을 주인공으로 하여 판소리 뮤직비디오 같은 『춘향뎐』을 제작하여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5년 17부작으로 방영된 통통 튀는 신세대 드라마 『쾌걸 춘향』(KBS2)도 인기를 끌었다.
『춘향전』이 어찌해서 이렇게 인기 있는 작품이 됐을까? 『춘향전』은 신분이 다른 청춘남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수난의 과정을 거쳐 다시 행복한 재회에 이르기까지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멜로드라마melodrama의 틀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뿐더러 그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익숙한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양반과 기생이라는 엄청난 신분적 격차는 진정한 사랑을 이루기 힘들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 흥미를 자극하며, 기생이기에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하기 불가능하다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모진 수난을 겪었으며, 마지막에는 사또에게 희생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사랑하는 사람이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나 춘향을 구출해 준다는 극적 반전에 이르기까지, 『춘향전』은 어느 작품보다도 드라마틱한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기에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춘향전』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수난과 재회라는 이른바 ‘대중서사’의 방식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들었기에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방식인 대중서사는 수난과 극적 반전을 갖춘 해피엔딩 스토리로 사람들이 많이 보는 인기 TV드라마에서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춘향전』은 오히려 근대에 들어와서 근대소설보다 더 많이 읽히는 고전소설이 되었다. 『춘향전』은 연간 7만 권 정도가 팔리고, 200종이 넘는 이본을 파생시켜 일제식민지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작품으로 역설적이게도 신문학 또는 근대문학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그 계기를 제공한 작품이 바로 1912년 등장한 이해조(李海朝, 1869~1927)의 『옥중화獄中花』다. 이해조는 이미 『자유종自由鐘』(1910)에서 “『춘향전』은 음탕교과서”라고 부정했지만 강제합병 후 그 고전의 세계로 돌아와 판소리를 개작하여 『옥중화』를 창작하게 된다. 당시 유일한 신문이었던 〈每日申報〉의 1면에 1912년 1월 1일~3월 16일까지 연재되었고 이어서 8월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불티나게 팔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이 무렵 『춘향전』의 이본은 모두 84책이 등장했는데 『옥중화』나 그 작품을 저본으로 한 것이 무려 73책으로 87%를 차지할 정도라고 하면 『춘향전』이 곧 『옥중화』였던 셈이다. 어찌 보면 『춘향전』은 계몽기에 새로 만들어진 ‘창조된 고전’이며 근대문학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심지어는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1923년 최초로 『춘향전』 영화를 만들 때도 대본이 없어 당시 유명한 변사였던 김조성金肇盛(1901~1950)이 『옥중화』를 읽어주고 거기에 맞춰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인기의 비결은 판소리를 통해 접한 이미 익숙한 서사의 방식에도 영향이 있지만 복잡다단한 가정사나 개화의 이념보다 신분이 다른 남녀의 애정에 초점을 맞춘 대중서사, 곧 멜로드라마의 방식에 있어 보인다. 남녀의 애정사는 누구나 즐겨 찾는 이야기지만 개화와 계몽의 격랑 속에 남녀의 애정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드문 현실에서 『옥중화』는 그 길을 일찍부터 열었던 셈이다. 신문에 연재되고 이어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는 점도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매체를 통한 소설의 유통은 근대적 문학 수용 방식이었기에 『옥중화』 역시 그 경로를 활용하여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
지금 조선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무엇이냐 하면 『춘향전春香傳』이나 『심청전沈淸傳』이라고 한다. 이 『춘향전』과 『심청전』의 애독자는 만히 중류이상 가정부인이다.(H.K生, 「가정과 구소설」, 〈동아일보〉 1929. 4. 2)
잘 팔리고 말구요. 지금도 잘 팔리지요. 예나 이제나 같습니다. 『춘향전』, 『심청전』, 『유충렬전』 이 셋은 농촌의 교과서이지요.
(박문서관 주인인 노익형의 말, 《조광》 4권, 1938. 12)
이런 『춘향전』의 인기 때문에 1920년대 말에는 KAPF의 논객이었던 김기진金基鎭(1903~1095)에 의해 당시의 소설을 『춘향전』식으로 쓰자는 ‘대중소설론’도 제기될 정도였다. 무엇이 『춘향전』을 이토록 널리 읽힐 수 있게 만들었을까? 소설뿐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꽃인 영화로도 『춘향전』만 만들면 흥행에 대박을 터트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 영화사에서 『춘향전』의 위치는 단연 독보적이다. 20편이나 계속 제작된 점도 그렇거니와 주요한 시기마다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1923년 하야가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은 최초의 민간제작영화(실상 최초의 극영화)이며, 1935년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은 최초의 발성영화였고,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영화 부흥의 계기가 되었으며, 1961년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였고, 1971년 이성구 감독의 『춘향전』은 최초의 70밀리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춘향전』이 독서물은 물론이고 왜 영화와 같은 신생 장르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을까? 이른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춘향전』은 어쩌면 문학사를 뛰어 넘어 문화사, 예술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의 숲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가보라. 주변의 모든 것이 『춘향전』의 스토리텔링으로 장식돼 있다. 춘향호텔, 도령여관, 월매집, 춘향식당, 몽룡 찻집, 방자슈퍼 … 심지어는 남원 춘향제 중 춘향아가씨 선발대회는 미스코리아 못지않게 KBS에서 전국으로 생중계를 한다.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도 아니고 단지 소설 속의 주인공일 뿐인데 이렇게 폭 넓은 지지를 획득하고 있는 것은 그 스토리텔링이 살아서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그 매력적인 이야기의 숲으로 들어가 보자.
영혼과 육신이 만나는 아름다운 진경眞景
흔히 쓰는 말에 ‘춘향 같은 여자’란 말이 있다. 그저 남자만 바라보고 모든 걸 바치는 지고지순한 열녀烈女를 뜻한다. 그래서 장가 못간 총각들은 어디 춘향과 같은 여자 없냐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면 뺨 맞기 십상이다. 실제 춘향도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춘향전』의 오해도 여기서 시작된다. 한 명의 남자만을 열렬히 사랑하여 변학도에게 죽도록 매를 맞고 긴 칼을 쓰고 앉아 옥중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춘향, 이것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춘향의 모습이다. 이당以黨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렸다는 광한루 춘향사당의 춘향영정이 딱 그런 분위기를 띠고 있다.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주르르 흘릴 것 같은 청순가련한 여인의 전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라. 일개 기생인(물론 『춘향전』은 비기생계 이본도 있지만 대다수는 기생계이다.) 천민 신분의 여자가 명문대가 양반 도령을 맞아 사랑을 이루었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요즘도 빈부나 처지가 다르기에 결혼하지 못하는 일이 흔한데 신분을 지고의 척도로 삼았던 봉건시대에는 오죽했겠는가. 바로 그런 험난한 사랑의 여정을 극복하고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그 험난한 여정을 눈물만 흘리는 청순가련형 여자가 어찌 극복해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춘향에게 부과된 그 모진 고통 때문에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 남원부사 아들인 이몽룡이 그네 뛰는 춘향이를 보았을 때, 이몽룡은 춘향을 기생의 딸이라 잠깐 즐기는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네 뛰는 춘향이를 물어보니 방자가 “다른 무엇이 아니오라 이 골 기생 월매 딸 춘향이란 계집아이로소이다.” 하자 “장이 좋다. 훌륭하다”고 하고 “들은 즉 기생의 딸이라니 급히 가 불러 오라”고 한다. 동등한 처지의 사랑이 아니라 미색을 탐하는 양반 난봉꾼의 행태다. 기생이 이른바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것처럼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생의 존재였고 이몽룡도 그렇게 생각란 것이다.
하지만 이 초대를 춘향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네가 지금 시사時仕(현직 관기)가 아닌데 왜 오라 가라 하느냐?”고 반문한다. 실상 춘향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여성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그것이 춘향의 본 모습이다. 결국 사또 자제 이몽룡은 “네가 너를 기생으로 앎이 아니라 들으니 네가 글을 잘 한다기로 청하노라.”고 궤도를 수정해 ‘글벗’으로 초청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아름다운 두 청춘 남녀가 첫 눈에 반하고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 사랑은 상대방의 신분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상대방이 마음에 드는 지인지감知人知鑑의 상대, 말하자면 필feel이 통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적 장애가 가로 놓여 있고, 그 간극은 당시의 통념상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이들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 잠깐 즐기는 유희에 불과했다면 신분은 그리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날 밤 이몽룡은 춘향의 집을 방문해 서로가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하고 ‘불망기不忘記’까지 적어준다. 말하자면 ‘혼인서약서’가 되는 셈인데 당시의 관습으로 그것이 사회적 구속력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양반과 기생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절차인 셈이다. 적어도 둘 사이에는 신분이 문제가 될 것이 없어진 것이다.
그 첫날 밤 춘향과 이몽룡의 질탕한 ‘사랑놀음’은 『춘향전』을 외설시비에 휘말리게 했다. 개화기 신소설 작가였던 이해조는 ‘음탕교과서’라 했으며 초기 국문학 연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던 조윤제는 『춘향전』의 주석에서 그 대목을 아예 삭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공판 과정에서 지지 의견을 내놓았던 민용태는 『즐거운 사라』를 『춘향전』에 비견하기도 했다. 그 장면을 자세히 따져 보면 포르노와 별 다를 게 없다.(16살 밖에 안 되는 애들이 밤새 온갖 짓을 다하니 이거야말로 ‘미성년자보호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진정한 사랑, 영혼의 만남이 있는 그들의 사랑의 행위는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다. 사랑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존재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우리의 고전에서 남녀의 만남은 흔히 성性을 수반하게 되는데, “옛날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랑에 적극적이었는가?”라고 의문을 품게 된다. 그것은 남녀의 만남이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규방에 갇힌 규수가 가족 외에 젊은 남성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젊은 남녀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이 되어 주저하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이 한 번에 모든 과정이 이루어진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보면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에서 태학에 다니는 이생을 본 최랑은 한 눈에 반해 그날 자기 방으로 이생을 끌어들여 지극한 사랑의 행위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남녀가 사귀는 ‘연애’라는 말은 근대 이후에 생긴 개념이라고 한다. 즉 근대적 제도와 시공간이 확보된 뒤에 비로소 밀고 당기는 연애의 과정이 생겨난 것이다.
『춘향전』의 이 부분을 강독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정말 미치도록 서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춘향전』의 ‘사랑가’ 중에 한 예를 보자. “나는 죽어 인경마치 되야 … 인경 첫마디 치는 소리 그저 뎅뎅 칠 때마다 다른 사람 듣기에는 인경소리로만 알아도, 우리 속으로는 춘향뎅 도련님뎅이라 만나 보자꾸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랑의 자장磁場안으로 들어오는 그런, 마치 첫사랑의 연인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고 너무 좋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런 경지다.
봉건시대 고루한 예교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인간의 개성을 마음껏 발산하는 그런 발랄하고도 도발적인 춘향의 모습이 바로 여기서 확인된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otti(475~1564)의 「다비드」와 같이 르네상스의 많은 그림과 조각들이 왜 중세의 음울한 휘장을 벗어버리고 모두 인간의 아름다운 육신을 드러내는가를 생각해 보라. 단 물신화된 요즘 사회의 성性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조건 성이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 동반될 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춘향전』의 성은 진정한 사랑, 영혼과 육신이 만나서 펼쳐지는 한없이 아름다운 진경眞景인 것이다. 춘향이의 성을 이 물신화되고 파편화 된 현대의 퇴폐적 성과 동일시해서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반의 노리개가 아닌 주체적 여성으로
자, 이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상호신뢰와 애정에 의해 감추어져 있던 신분적 갈등이 현실의 고난으로 드러난 것은 이몽룡과 이별하고 변학도가 남원부사로 내려오면서부터다. 아름다운 기생을 사이에 두고 한량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미기담美妓談’ 혹은 ‘탐화담探花談’은 조선 후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어는 고을에 원님으로 내려 왔던 양반이 그 곳의 아름다운 기생과 사랑을 나누었고, 임기가 다하여 서울로 올라갔지만 기특하게도 그 기생은 절개를 지켜 나중에 돈을 주고 기생신분에서 빼내어 첩으로 삼았다는 얘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어찌 보면 아름다운 사랑얘기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사랑인가는 여러모로 생각해 봐야 한다. 아름다운 꽃을 꺾듯이 여성은 단지 장식물에 불과하며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저 얼굴 하나 잘 나서 뽑히게 된 것이다. 이들 이야기의 제목으로 많이 등장하는 ‘탐화探花’ 혹은 ‘절화折花’라는 표현이 그 단적인 예다.
예전에는 기생을 ‘말하는 꽃’ 혹은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의미의 ‘해어화解語花’로 불렀다. 바로 이것이 남성 사대부들이 기생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아무나 꺾을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바로 기생인 것이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여성의 살아 있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정식 부인이 아닌 첩으로 삼았다는 대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몰론 당시의 신분제도 속에서 부부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성의 주체적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향전』이 여느 ‘기생이야기’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춘향전』은 제목처럼 여성 주인공인 춘향이의 얘기인 것이다.
남원에 내려 온 변학도는 만사를 제쳐놓고 ‘기생점고’부터 하고 춘향이를 찾는다. 어떤 이본에 보면 기생명부에 없으니 명부에 집어넣고 데려 오라고까지 한다. 춘향이를 대하는 이몽룡과 변학도는 이렇게 태도부터 다르다.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이몽룡과 우격다짐으로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 바로 이 변별점이 춘향이가 그토록 강하게 수청을 거부한 근거가 된다. 변학도는 춘향을 인격체가 아닌 양반의 노리개로 보고 수청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춘향이의 수청거부는 이몽룡을 위해 절개를 지킨다는 의미보다도 바로 이런 무자비한 폭압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변학도가 기생이 무슨 정절이 있냐고 조롱하자 춘향은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충불사이군忠不事二君이요 열불경이부절烈不更二夫節을 본받고자 하옵는데 연차 분부 이러하니 생불여사生不如死이옵고 열불경이부烈不更二夫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 …… 충효열녀 상하있소. 자상히 들으시오. 기생으로 말합시다.(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
춘향이가 강변하는 것은 봉건적 덕목인 ‘열烈’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한 남성과의 사랑을 위해서 수청을 거부하겠다는 말이다. 곧 이몽룡에 대한 수절이 아닌 자신의 인간적 권리를 주장한 셈이다. 이런 춘향의 항변에 대해 “지나가던 새도 웃겠다.”거나 “기생이 정절이면 우리 마누라는 기절”이라 비아냥거릴 정도로 당시 기생은 인간대접을 못 받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실정법에 해당되는 ‘열’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야 했다. 당시의 봉건적 덕목을 이용한 것이지만 춘향이 강조하는 ‘열’은 한 인격체의 권리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외피의 역할을 한다. 그러기에 춘향이가 주장하는 ‘열’은 그 핵심에 있어서는 봉건적 덕목과 상반되는 당당한 인격체의 자유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왜 춘향이가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했을까?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면 춘향이 매를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거지꼴로 내려온 이몽룡을 보고 살아날 희망을 포기하고 사후 처리까지 부탁한다. 아주 독하게 마음먹고 여러 유혹도 뿌리친다. 변학도는 이방을 보내 “네가 수청을 들면 관가의 창고 돈이 다 네 돈이 될”것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어머니인 월매는 사또도 자존심이 있으니 “이번만은 눈 질끈 감고 수청 한 번 들라”고 한다. 실상 당시 관가에 속한 기생들에겐 관장과 잠자리 한 번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기생들이 그걸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춘향은 양반의 노리개가 되어 구차하게 사느니 당당하게 죽겠다고 한다. 이런 당돌하고도 강인한 모습이 춘향이의 진면목이다.
춘향이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범한 지어미로 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반의 노리개가 돼야 하는 신분적 질곡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신분적 질곡에 당당히 맞섰던 여자가 바로 춘향이다. 춘향이와 비교해 볼 때 이몽룡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상대일 뿐이고 명문대가의 양반이기에 사랑의 성취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춘향이는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이룬 것이 아니라 천민인 기생도 한 인격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분해방’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러기에 『춘향전』은 한국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처절한 한 천민의 투쟁사인 것이다.
『춘향전』의 다양한 변주
이런 『춘향전』이기에 수많은 작품으로 끊임없이 재창작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물론 거기에는 18·9세기의 『춘향전』과는 다른, 그 무엇이 녹아있다. 소설로는 이광수를 비롯하여 이주홍, 최인훈, 김주영, 김용옥, 이청준, 임철우 등이 현대화 작업에 가세했고, 시詩로는 김영랑을 비롯하여 서정주, 박재삼, 전봉건 등이 『춘향전』을 작품화했다.
최인훈의 『춘향뎐』(1967)을 보자. 과거 공부하던 이몽룡은 역적의 자손으로 멸문지화를 입게 되어 암행어사는커녕 춘향의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춘향은 암행어사가 서방님이겠거니 하였지만 얼굴을 올려다보는 순간 환상이 무너진다. 게다가 암행어사는 춘향의 미색에 반하여 첩이 될 것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사랑하는 두 사람은 밤도망을 하여 소백산맥 기슭에 숨어 버린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다. 작가의 말처럼 “가장 어두운 중세의 밤을 보낸 여자”로 춘향이 남아있는 것이다. 최인훈의 『츈향뎐』을 통해 4.19 혁명의 실패 후 군사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출구가 없이 답답하기만 하던 60년대 현실을 얘기하고 있다.
임철우의 『옥중가』(1990)는 춘향이 갇힌 옥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몽룡은 뒷전으로 힘을 써서 변 판서의 사팔뜨기 외동딸과 혼인하기로 약조한 덕택으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니 암행어사가 되어도 남원에 나타날 수가 없어 “곧장 담양 땅으로 내려간다.” 이런 소식을 접한 춘향도 이몽룡의 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변학도의 애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민중들의 꿈을 배반하고 권력과 야합한 1990년 3당 통합이라는 한국정치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춘향전』을 1990년대 한국정치의 축소판으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춘향의 모습은 다양하다. 정말 춘향은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의 말처럼 ‘천의 얼굴을 지닌 여인’인 것이다. 『춘향전』 자체의 텍스트에서도 기품 있는 여인으로, 생기발랄한 요부로, 독하게 저항하는 투사로, 사랑을 갈구하는 연인으로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했다. 그렇게 변모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지켜나가기에 만인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 중심에는 이몽룡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주의 시 「다시 밝은 날에-춘향의 말 ·2」, 「춘향유문-춘향의 말·3」은 그런 절절한 사랑을 펼쳐 보이고 있다.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겁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드래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쏘내기되야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서정주의 「춘향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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