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68호/집중조명/권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37회 작성일 18-12-15 13:23

본문

집중조명


권순



신작시


발자국이 자란다 외4편


눈밭에 발자국이 난무하다
고만고만한 걸음들이 눈밭에서 자라고 지워지고

갱지에 글을 쓰듯 또박또박 옮긴 걸음, 거만하게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간 걸음, 성질머리 급해서 앞꿈치가 깊게 찍힌 걸음, 날렵하게 뛰어간,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지나간, 흔적을 남기기 싫은 듯 슬쩍 스친 걸음이 서로 다투어 걷는다 걸음은 나란히 가는 것 같지만 늘 다투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자국에 바람이 담긴다

걸음이 걸음을 기다린다 바람이 가져다주는 다른 걸음의 몸을 받는다 다른 걸음을 생김새대로 받아주던 어떤 걸음은 그지없는 눈밭이 되고

너무 일찍 집을 나선 어떤 걸음은 섞이지도 자라지도 못해 그 자리가 제 감옥인데

언 발은 왜 비굴할까
비굴한 걸음이 숨을 곳을 찾는다 

앞꿈치와 뒤꿈치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걸음이 앞서 간다 얌전하게 떼어놓은 수제비 같은 말랑한 걸음이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걸음이다

어떤 삶이 지나간 자리일까

바람이 뒷덜미를 당긴다
거기, 흩어져 구불거리는 내 걸음이
어지럽다



복숭아털, 구름


처음 세상에 나와 눈 떴을 때, 나의 첫 눈은 무엇을
보았을까 젖은 내 솜털을 스친 첫 바람의 냄새가 궁금하다

복숭아털이 구름을 간지럽히는 6월이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눈가에 구름이 머문다

누군가 무거운 장화를 끌며 담장을 기웃거린다

집안 공기가 무겁다는 것은 습기가 엄마를 짓누른다는
것이다 온몸에 날이 선 엄마의 음성이 치솟는다는 것이다

치솟은 음성마저 가라앉은 날은
밤이 더욱 길었다

고인 침을 꼴딱이며 서로 눈치를 보다가 곰팡내 나는  
끈끈한 대자리와 무거워진 이불과 엄마의 얼굴에서
낯선 문장을 읽었다

엄마의 귀를 닮은 우리는 담장 밖
장화신은 발소리에 밤새 귀를 세웠다

온몸에 잔털이 솟았다



바람인형


노을빛 가득한 창 안에 한 사람이 몸을 벗는다 우 우 우 몸 벗는 소리 창을 넘는다 야윈 어깨에 노을이 물든다

반쯤 감은 눈을 먼저 쓸어내린다 젖은 눈썹이 손가락에 닫는다 그가 내보내는 마지막 체액이다 예견된 일이라 길게 울지는 않았지만 눈을 너무 빨리 쓸어내린 게 마음에 걸린다

몸 벗은 그를 거두어가는 불길이 뜨겁다 골분으로 남은 그를 산등성이에 흩날리고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식사를 한다  저 너머에서 오는 사람들이 입던 옷을 입고

해질녘에 그가 입던 옷가지와 신발을 버렸다 차마 버릴 수 없는 사진들은 불구덩이에 던진다 붉은 구덩이에서 바람인형이 솟아오른다

방에 남아 있던 침대와 이불장을 치우고 집을 팔았다 오래된 돋보기와 귀이개를 종이상자에 담았다 눈빛과 음성은 쉽사리사라지지 않으므로 더 담아두기로 한다
 
바람인형이 춤을 춘다 꽃잎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나무의 팔을 들어 올리던 햇살이 저렇게 눈부신데, 꽃은 사라지고 없다 바람인형의 잔뜩 부어오른 팔을 누가 들어 올린다



개미


물살 어른거리는 연못가에 앉아
한 생을 가뿐하게 지고 가는
너를 본다

좀작살나무 밑을 지나
나무벤치로 기어오르더니
햇빛 쏟아지는 길바닥을 쏜살같이 횡단한다

이파리 사이로 햇살이 들고나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납작 엎드려 빛을 견디며
바람을 견디며
바닥부터 기어오르는 생을 엿본다

세상에 먼저 온 것이
너인지 나인지는 모를 일이다

근원을 알지 못하는 내가
여기서 툴툴대며 어른거리고 있듯이
너도 생의 한 귀퉁이를 붙들고
그저 벌벌 기는 것이리라

물살마다 바람이 잇자국을 남기는 이 가을
흔들리는 것들이 어른거린다
어른거리는 것들이 길을 재촉한다



가족사진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가 돌아왔다
신화 속에서 본 듯한 얼굴이다

민낯으로 고개 끄덕이며 웃고만 있어도
눈만 찡긋해도 속내가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가 돌아왔다
얼마간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입을 열지 않는 그는 성대를 잠그고
투명하게 웃고만 있는 그는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바닷가 사람의 표정이다

고막이 없는 사람처럼 헐렁하게 웃는 그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새벽에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디에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곳에 아무도 없다고 여긴 게 잘못이다

소리가 난다
숨어서 내는 저 소리를
자꾸만 가라앉는 저 소리를
무엇이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자선대표시


잠자는 등


잠자는 등이 비를 맞는다
버스터미널 소음들이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버즘나무가 젖은 보따리를 둘러메고
강으로 달아나는 줄도 모르고
등 너머 고요에 물든 듯 혼자만 적막하다
그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일까

잠자는 등이 웃는다
노을빛에 한쪽 눈을 지지고 떠났던 첫 여자가
아이를 업고 돌아오는 줄도 모르고
버즘나무 성화에 몸 열었던 앞강이
다투어 짐을 싸는 줄도 모르고
안팎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듯 웃는다
누군가 핏발 선 눈으로 웃는 등을 핥고 있다
붉은 그 눈은 웃는 등에 속해 있는 것인가
등 너머 아득함에 속해 있는 것인가

잠자는 등에 마지막 비가 내린다
속옷까지 젖은 버스가 멈춘다
소음들이 마지막 비를 통과한다
돌조개 무덤을 지나온 빗방울이 강으로 뛰어든다
선잠 깨어 어디에 속할지 모르는 것들이
부지런히 자리를 뜬다



시론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시론을 떠올리다가 가장 먼저 생각난 말이 있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문학이 세상에 의해 함부로 바뀌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 쓰는 사람은 시를 잘 쓰는 것보다 시를 통해 삶이 변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느 선배 시인이 술자리마다 일갈하던 말이다. 물론 그 시인도 그 말을 들은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시론은 내게 늘 육화되지 못하고 빗나가는 멀리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렇기에 시는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도 접었고, 시인이 대단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이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일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세상을 사는데 그리 유용하지도 않고, 댓가를 넉넉히 주고받지도 못하는 시는 쉽사리 곁을 내주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런 시를 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붙들고 끙끙거린 것이 시와 관계 맺기의 전부이다. 시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도 없고, 그 무엇을 무엇으로 바꿀 수도 없다는 사실만을 거듭 확인할 뿐이다. 시를 통해 삶의 변화를 꿈꾸기도 했지만 시적 순간에 발화되는 열정의 화염이 자주 일지 않았다. 그렇게 수년간 시와 불화하며 지내다가 최근에 울라브 하우게의 시집을 읽고 시가 안겨주는 행복과 충만감의 순간을 맞을 수 있었다.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라는 시집이다. 그의 시는 내게 시가 여전히 별게 아니지만 그래도 시의 얼굴이 어떠해야 하는지, 숨결이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울라브 하우게는 노르웨이 울빅에서 평생을 정원사로 보내며 간호사가 어린 환자에게 약을 먹여주는 것 같은 시를 썼다. 열흘 동안 먹지 않고 의자에 앉은 채로 가장 인간답게 존엄한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의 모습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시인이다. 그에게 시는 대단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묻어오는 소금 한 톨 같은 것이다. 새에 매달린 물방울이나 이슬 같은 아주 작은 것으로 높은 곳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대양이 아니라 물을 원해요
천국이 아니라 빛을 원해요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
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
바람이 소금 한 톨을 가져오듯
―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전문

하우게를 통해 시가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설레었다. 북유럽 눈 내리는 풍경 속에 막대를 들고 서성이며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려고, 그저 도우려고, 가지 끝을 당겨주거나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대신 눈을 맞을 수 있는 돌봄의 시는 얼마나 포근한가? 나도 그의 정원으로 달려가고 싶다.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 몸에 눈을 맞는다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에서

시인이 아닌 사람들과 만나면 좀처럼 시를 들먹일 기회가 없다. 설령 들먹인다고 해도 요즈음 시들은 너무 어려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시인은 무슨 말인지 알고 썼을까 하는 조롱 섞인 소리까지 종종 듣는다. 소통하지 못하는 시에 대한 독자들의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하우게는 쉬운 시, 현관에 놓인 나막신 같은 바로 신을 수 있는 편안한 신발 같은 시를 보여준다. 쉬운 시에 대한 생각, 소통이 되는 시에 대한 생각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를 일깨워 준다. 현관에 놓인 신발처럼 바로 신거나 읽으면 세계가 바로 보이는 그런 시를 열망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시는 너무 쉬워서
현관에 놓인 나막신처럼
바로 신으면 되었지
― 「베르톨트 브레히트」에서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서 나무와 오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가 있다. 비를 맞으며 날이 저무는 것을 바라보며 함께 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시인이 있다. 나무와 함께 나이 들어가며 서로에게 나는 냄새를 나누는 나무와 노시인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북위 61도의 춥고 척박한 땅에서 나는 푸른 사과를 닮고 싶다. 그의 새 식탁보 같은 노랗고 신선한 시를 쓰고 싶다. 그 식탁에 마주 앉고 싶다.

여름은 추웠고 비가 많았다
사과가 푸르고 시다

푸른 사과가
없는 사과보다 낫다
이곳은 북위 61도이다
        ―「푸른 사과」에서
새 식탁보, 노란색!
그리고 신선한 흰 종이!
단어들이 올 것이다

피오르에 얼음이 얼면
새들이 날아와 앉지
                  ―「새 식탁보」에서

나의 시가 꿈꾸는 세계는 여전히 대단하지도 용감하지도 않다. 아주 사소한 일들과 작은 진실을 들여다보는 순간만이 존재한다. 그 순간 모든 존재 사이에는 어둠에서 빛나는 공간이 있으니 시간이 다할 때까지 하우게처럼 늙은 나무아래 서서 존재와 존재 사이를 그 사이의 공간을 지켜보며 기다릴 것이다.

* 울라브 하우게의 시집 제목에서 가져옴.



존재와 부재 사이의 불확정성


최광임


삶이라는 것이 그렇다. 이치적으로 보자면 살아볼수록 세상이나 사람의 일이 명쾌해지는 것이 옳다. 어려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며 젊어서는 많이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모르는 것이 삶이라고들 한다. 이상한 것은 이제 삶을 좀 알게 된 나이인데 정작 어떤 일이나 현상에 너그러워진다는 점이다. 젊어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을법한 일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의 폭을 넓혀두고 판단을 유보한 상태로 수용하기도 한다. 모르는 것도 알 것 같고 아는 것도 모르는 일 같다. 나는 물론이며, 나와 연관된 구성원들이 구체적 관계들로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떤 것도 확실성을 가져보지 못한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 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만 터득했을 뿐이다. 내 인생의 방향은 내가 선택하기 이전부터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나는 최선을 다했으나 세상은 여전히 흔들리고 어른거리며 불확정적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자체가 생의 의미이며 가치일지도 모른다.
 권순의 신작시 5편과 자선 대표시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섞이지도 자리지도 못”(「발자국이 란다」)하는 것들이거나 어지러운 것들, “너인지 나인지는 모를 일이”거나 “흔들리는 것들이 어른거”(「개미」)린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가족사진」)닌 채로 “어디에 속할지 모르는 것들”(「잠자는 등」)이 권순의 사유를 관통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르는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거기에 삶이 있다. 

눈밭에 발자국이 난무하다
고만고만한 걸음들이 눈밭에서 자라고 지워지고

갱지에 글을 쓰듯 또박또박 옮긴 걸음, 거만하게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간 걸음, 성질머리 급해서 앞꿈치가 깊게 찍힌 걸음, 날렵하게 뛰어간,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지나간, 흔적을 남기기 싫은 듯 슬쩍 스친 걸음이 서로 다투어 걷는다 걸음은 나란히 가는 것 같지만 늘 다투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자국에 바람이 담긴다

걸음이 걸음을 기다린다 바람이 가져다주는 다른 걸음의 몸을 받는다 다른 걸음을 생김새대로 받아주던 어떤 걸음은 그지없는 눈밭이 되고

너무 일찍 집을 나선 어떤 걸음은 섞이지도 자라지도 못해 그        자리가 제 감옥인데

언 발은 왜 비굴할까
비굴한 걸음이 숨을 곳을 찾는다 

앞꿈치와 뒤꿈치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걸음이 앞서 간다 얌전하게 떼어놓은 수제비 같은 말랑한 걸음이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걸음이다

어떤 삶이 지나간 자리일까

바람이 뒷덜미를 당긴다
거기, 흩어져 구불거리는 내 걸음이
어지럽다
-「발자국이 자란다」 전문

발자국의 형상을 통해 타인의 삶을 가늠하고 나의 삶을 반추한다. 눈밭에 찍힌 난무한 발자국들이야말로 삶의 유형을 드러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발자국은 그 주인의 사회적 권위, 명성 따위는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발자국 주인의 심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므로 “고만고만한 걸음들이 눈밭에서 자라고 지워지고” 하는 광경을 통해 어느 생의 됨됨이를 가늠해 보는 일은 꽤나 객관적인 일이 된다.
성실한 자, 거만한 자, 건성인 자, 소심한 자 다양한 성정을 가진 자들이 눈밭에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 서로 다른 그들은 섞일 것 같지 않지만 엎친 데 덮치고 덮친 데 얹히며 바람 불고 눈발 날리는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 “걸음은 나란히 가는 것 같지만 늘 다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발자국 위에 눈발이 얹히고 또 누군가가 걷고 발자국은 그렇게 존재를 증명해 가며 사회를 이루어 간다. 자란다.
그런데 “섞이지도 자라지도 못해 그/자리가 제 감옥인” 그래서 비굴해지는 발자국도 있다. 자라지 않는 발자국이다. 필시 삶을 경쟁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왔을 것이라는 걸 시인은 모를 리 없다. 즉 “언 발은 왜 비굴”한지 정작 모르는 것은 아닐 터이나 시인은 짐짓 자문하듯 묻는다. 요는 다양한 삶의 표정들 속에서 “흩어져 구불거리”고 안정적이지 못한 ‘내’ 발자국이 대조되기 때문이다. 혹시 소심하지는 않았는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으나 나와 또 다른 내 발자국도 다투며 걸어온 것은 아니었는지,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걸음이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되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내 삶은 아닌데 내 삶이 되는 것들이 ‘생’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이끌어 간다.

처음 세상에 나와 눈 떴을 때, 나의 첫 눈은 무엇을
보았을까 젖은 내 솜털을 스친 첫 바람의 냄새가 궁금하다

복숭아털이 구름을 간지럽히는 6월이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눈가에 구름이 머문다

누군가 무거운 장화를 끌며 담장을 기웃 거린다

집안 공기가 무겁다는 것은 습기가 엄마를 짓누른다는
것이다 온몸에 날이 선 엄마의 음성이 치솟는다는 것이다

치솟은 음성마저 가라앉은 날은
밤이 더욱 길었다

고인 침을 꼴딱이며 서로 눈치를 보다가 곰팡내 나는  
끈끈한 대자리와 무거워진 이불과 엄마의 얼굴에서
낯선 문장을 읽었다

엄마의 귀를 닮은 우리는 담장 밖
장화신은 발소리에 밤새 귀를 세웠다

온 몸에 잔털이 솟았다
―「복숭아털, 구름」 전문

‘솜털’은 애초에 내 것이었다. 다른 이가 가지고 있거나 다른 곳에 나있는 솜털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보송보송한 내 몸을 통해 처음 솜털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털로 인식되는 것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내 삶에 중첩의 의미가 된다. 마땅히 내 삶의 일부여야 할, 아버지라는 존재의 유무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삶을 결정짓는 절대적 요건이 된다. 부재의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화자에게 더 힘들었던 요인은 아버지가 부재하다는 사실보다, 주로 담장 밖에서 서성이는 일로 존재를 각인시키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온몸에 선 날이다. 화자와 그 밖의 자녀들은 엄마의 행위에 따라 아늑한 밤이 되기도 하고 “서로 눈치를 보며 곰팡내 나는/끈끈한 대자리와 무거워진 이불”을 주체하기 힘든 밤이 되기도 한다. “집안 공기가 무겁다는 것은 습기가 엄마를 짓누른다는” 것이며, “엄마의 음성이 치솟는다는 것”이다. “치솟은 음성마저 가라앉은 날은/밤이 더욱 길었”던 그 일상은 화자가 단 한 번도 바라던 삶은 아니었다. 여기에 화자의 독자성, 자유, 비판적 이성은 자리할 틈이 없었으며 엄밀히 타자의 삶에 의해 내 삶이 “온 몸에 잔털이 솟”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 ‘나’로서는 엄마와 아버지의 일들을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와 아버지는 왜 서로를 겉돌았던 것일까. 성인이 된 화자는 이제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라기보다 하나의 ’기술‘, 그것도 ’창조적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너 나 좋아, 나 너 좋아 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다 ‘사랑은 한 사람과 그가 사랑하는 하나의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 사람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성격적 지향이며 태도’라는 것인데 화자의 부모님은 그 인식에 이르지 못한 데서 자초한 불행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상대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고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하늘과 땅의 본질이 다르듯 존재들의 본질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그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이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 없이 의무나 책임만을 강요했거나 일방적 사랑을 요구했다면 그 사랑은 서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가 돌아왔다
신화 속에서 본 듯한 얼굴이다

민낯으로 고개 끄덕이며 웃고만 있어도
눈만 찡긋해도 속내가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가 돌아왔다
얼마간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입을 열지 않는 그는 성대를 잠그고
투명하게 웃고만 있는 그는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바닷가 사람의 표정이다

고막이 없는 사람처럼 헐렁하게 웃는 그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새벽에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디에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곳에 아무도 없다고 여긴 게 잘못이다

소리가 난다
숨어서 내는 저 소리를
자꾸만 가라앉는 저 소리를
무엇이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가족사진」 전문

시인은 ‘그’의 본질에 관하여 조금 더 심미적 거리를 갖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은 타자이면서 나이다. 특히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 공동체는 구성원 하나의 불행이 가족 전체의 불행으로 연좌된다. 혈연이란 유기적 관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정)의 관계이기도 하며 사회 내 개인과 개인의 관계이기도 하다. 특히 물리적 요소이든 심리적 요소이든 개인과 사회와의 불화는 구성원 간 심리적 요소의 기능을 강화한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가 돌아왔다”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가 돌아왔다” “입을 열지 않는 그는 성대를 잠”그고 웃기만 한다. 연유는 알 수 없겠으나 부재하던 ‘그’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그 이전의 상태가 되지 않는다. 시의 내용상 가족 중 그 누구도 그를 꺼려하거나 피하지 않지만 심지어 화자는 “자꾸만 가라앉는 저 소리를/ 무엇이 끌어 올릴 수 있을까” 궁리하지만 그가 목소리를 내지 않는, 혹은 숨어서 내는 이유는 자기검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유로든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스스로의 미안함이 ‘그’의 심리적 요소로 기능하게 된 것이리라. 
“웃고만 있어도/눈만 찡긋해도 속내가 드러나는” 그, “투명하게 웃고만 있는” 그, “헐렁하게 웃는” 그,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시인은 들여다보고자 노력한다. 아니 이미 본질을 봤으므로 그가 소리를 내는데 도움을 주고 싶은 것이다. 가족 중 누구라도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화자에게도 심리적 요소로 기능하게 되는 탓이다.
“어디에 속할지 모르는 것들”로 인한 심리적 요소의 기능은 「잠자는 등」에서도 계속된다. “잠자는 등이 비를 맞”고 “잠자는 등이 웃”으며, “잠자는 등에 마지막 비가 내”리는데 잠자는 등은 저 홀로 적막하거나 고요하고 아득하다. 풍경들은 소란하여 그 등과 대비된다. 삶의 풍경들이 다소 스산해 보이기는 하지만 잠자는 등과 대비되어 역동적이기까지 하다. ‘잠자는 등’으로 지칭되는 주체는 마치 앞다투어 소란한 것들의 “안팎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듯 웃”을뿐이다. 게다가 “선잠 깨어 어디에 속할지 모르는 것들이/부지런히 자리를 뜬다”.
어디에 속할지 모른다는 것은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팎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듯”했던 것은 주체적 의지라기보다 자기 결정권이 결여된 존재로서 중심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흔들리는 존재는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존재감이 없다는 것과 같다. 즉, 부재하는 것과 동의어라 해도 무방하다. 마치 불확정적이고 고단한 생들이 하루 노동을 마치고 우왕좌왕 빗속을 뚫고 귀가하는 버스 안 풍경에 덧옷을 입혀 은유한 듯한 ‘잠자는 등’은 그 풍경 속의 하나가 시인 자신일 수도 있겠으며 우리 사회의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그런가 하면, 이승과 저승이라는 생의 경계에서 죽음을 통한 구체적인 부재는 이별에 대한 슬픔과 애틋함을 지니게 한다. 시 「바람인형」의 ‘그’는 유명을 달리했고 ‘가족사진’에서와 같이 시인은 대상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낸다. “예견된 일이라 길게 울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눈을 빨리 감겨준 행위 등에 대해 마음이 쓰인다. ‘그’와 관련된 이승의 것들을 신속하게 처리하면서도 “오래된 돋보기와 귀이개를 종이상자에 담았다 눈빛과 음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으므로 더 담아두기로 한다”. ‘눈빛’ ‘음성’은 비가시적인 것이나 화자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불확정적인 상태의 존재들에 대한 애틋함은 시인의 시의식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삶의 낮은 자리에 있는 존재,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위축된 존재들에 대해 시인의 마음이 닿아있다.

물살 어른거리는 연못가에 앉아
한 생을 가뿐하게 지고 가는
너를 본다

좀작살나무 밑을 지나
나무벤치로 기어오르더니
햇빛 쏟아지는 길바닥을 쏜살같이 횡단한다

이파리 사이로 햇살이 들고나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납작 엎드려 빛을 견디며
바람을 견디며
바닥부터 기어오르는 생을 엿본다

세상에 먼저 온 것이
너인지 나인지는 모를 일이다

근원을 알지 못하는 내가
여기서 툴툴대며 어른거리고 있듯이
너도 생의 한 귀퉁이를 붙들고
그저 벌벌 기는 것이리라

물살마다 바람이 잇자국을 남기는 이 가을
흔들리는 것들이 어른거린다
어른거리는 것들이 길을 재촉한다
―「개미」 전문

산다는 것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 약간의 목표가 다를 수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오로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사는 존재적 실존 양식을 기본으로 삼고자 한다. 그랬을 때 충만한 삶의 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재 하의 사회 시스템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 자체를 구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소유하지 않고서는 인간 최소한의 존엄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 구조이다. 돈 벌어 집을 사고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었음에도 더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을 일삼아야 하고 도덕성을 상실해도 아무도 꺼림칙해하지 않는다. 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사회는 인간의 양심을 극도로 기피하며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와 재화의 가치만을 추종하는 삶의 형태를 지향한다. 결국 소유적 실존 양식을 취하면 취할수록 삶은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 재산, 직업, 명성, 사회적 지위, 지식, 인맥 등 과거에 축적한 것과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묶여 사는 소유적 실존 양식은 우리 인간이 제대로 된 비판적 이성을 갖지 못하게 하며, 회의, 불안, 고독과 무기력증 등 고질병을 앓게 한다. 
「개미」도 그렇다. “근원을 알지 못하는 내가/여기서 툴툴대며 어른거리고 있듯이/너도 생의 한 귀퉁이를 붙들고/그저 벌벌 기는 것이리라”라고 화자는 불안증과 무기력증을 앓는다. 이 사회의 소속감이 불확실한 개인이 ‘근원’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존재감은 노동 주권으로부터 나온다. 노동은 사회의 한 부분이며 사회적 행위이다. 그것을 보장받지 못했을 때는 “흔들리는 것들이 어른거”리는 불확정적인 존재, 즉 삶의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화자인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기계화, 전산화된 사회,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이 시대 삶의 방식이 모두 불안정하며 불확정적이다.
개미처럼 일하나 내일이 보이지 않는 사회, 시인은 ‘나’라는 화자의 생 하나에 국한시킨 것이겠지만 현제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 구조가 그렇다. 이 사회의 낮은 자들, 갖지 못한 자들은 개미처럼 일한다 해도 “그저 벌벌 기는”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결코 어떤 무엇을 보장받을 수도, 보장되지도 않는 사회, 가진 자만이 복식으로 자산을 늘려갈 수 있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