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67호/집중조명/손현숙/절망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 외 4편/시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80회 작성일 18-04-06 18:51

본문

집중조명


손현숙



절망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 외 4편



찬피 동물이 몸을 덥히는 스물네 시간 물과 불이 다투는 꿈속이다
허기를 채우려고 하고 또 하고,

바람의 뼈마디가 꺾일 때까지 솟구치는 푸른 짐승
뱃바닥으로 땅을 기어 진흙이라도 집어먹고 싶다

흑암에서 터지는 빛,

흙 위에 꽃삽을 꽂듯
이름이 뭐니?

아무리 애를 써도 몸 달아오르지 않는다
이름이 뭐니?

누가 입을 크게 벌리고 머리부터 몸통을 덥석 먹어치운다
이건 다만 환영일 뿐
죽어서도 생각나지 않는 당신이 있긴 있었을까

광화문에 첫눈이 내리고

아무 때나 어디서나 질문할 수 있기를 꿈꾸지 말 것



빗나간 훅,


‘안녕하세요’ 애인은 낯선 얼굴이다 경어체로 인사를 한다 몇 대의 택시를 놓친, 버스도 지하철도 끊어진 47번가, 원피스의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넌 꿈속에서도 사실적이구나”,

왜 나만 작은데? 비타민을 챙겨 먹어도 키는 자라지 않았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문창과에 입학을 했는데, 책장을 넘기면 글자가 흘러넘쳤다 여선생은 혼자 질문하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안경 너머로 풍경을 고쳐 읽는다

정신사를 한 학기 내내 돌려 깎는 저, 애송이를 어떻게 이해할까 부분을 확대하는 사진의 원리는 낡은 수법이라지 침 발라 책장을 넘기는 푸른빛의 집중이 싫지 않았다

달걀을 품어 새끼를 까는 꿈이 생생하다 빗자루머리에 사과방울 꽁꽁 돌려 묶다말고 바질나무 이파리 똑, 따 먹는다 솜사탕처럼 부풀리는 재미, 하루 두 번씩 화분에 물을 주면 키가 자랄까, 쪼그라든 애인을 찾아 내 발목을 내가 건다 



타인의 연속


불끈, 주먹 쥐고 남의 집 유리창을 깨는 나를, 내가 지켜본다

골반이 틀어진 삐딱삐딱이 빗금 치며 걷는다 모르는 입이랑 밥을 먹고 공중부양도 함께 한다 팔짱 끼던 안경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손 흔들어 이별한다
 
“여보세요” 노크하듯 누가 불러 세우면 획, 뒤돌아보는 나는 내가 아니다

신장을 갈아 끼운 친구는 언제부터 아랫입술을 심하게 빤다 정장 슈트에 하이힐 신고 가로수길 걷는 날, 내가 높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저도 나도 알아보지 못한 날은 왠지 뒤숭숭,

이쯤에서 조작이 가능할까 누가 나인 척, 나라고 자꾸 우긴다,



손가락으로 눈썹을 쓰는 사이


태양의 흑점 갈아 커피 내린다
동물에서 인간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에티오피아, 인류가
깃을 털고 일어선 곳이라네
살짝 신 맛이 도는 원두
냄비에 달달 볶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나겠지만
블랙은 첨삭이 없는 마음이다
어디서 실컷 두들겨 맞고 돌아가는 길,
향기는 뒷모습으로도 후각을 부르네
불빛이 켜켜로 쌓이는 격자무늬 사이로
그림자가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한다
사람의 시작처럼 커피콩을 고르는 모양이다
혹은 종말을 선언하듯 지문을 문지른다
촉각을 세우면 비상의 은은한 유혹이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쓰는 사이
나는 문을 열고 나무 아래 오후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하리라
제의를 치르듯 사람의 길로 와서
시고 떫고 쓴맛으로 혀끝 적시면
누굴까, 장미를 깨우는
발바닥으로 지그시 허공을 밟고 서는



불 좀 꺼주세요!


지하철 승강장 스크린 안쪽으로 여자가 기울어진다 가방에 고개를 파묻고 보따리처럼 주저앉는다 나는 프레미엄급 짝퉁의 단서를 찾는다 친절한 넥타이가 만취한 옆구리에 양손을 찔러 넣는다 보따리를 세운다 문이 열리고, 자리에 부려진다 쏟아지는 머리칼에 어깨를 내주는 남자가 제법 근사하~, 덜컹, 바퀴가 요철 위를 굴러간다 여자가 뭉클 속을 게운다 아차! 벌어진 페라가모 속으로 저녁의 내용들이 적나라하다 남자 왼쪽 허벅지 뜨끈하겠다 여자는 문득, 여자로 돌아온다 남자는 순식간에 신사를 지운다 “아이, 씨발~” 시발과 씨발의 차이는 제법 디테일하네, 내용은 내용을 물고, 타고 흥건하게 젖은 바닥을 뒹군다 운명 공동체란 난처한 것이구나, 파편처럼 튀는 냄새의 반경은 모르는 척이다 막차, 신분당선 7-3칸 풍경은 불을 켜고 남자와 여자를 집중조명 한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지만 모두에게 적나라한, 여자는 노파처럼 정지했다 비현실적이다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었겠지만, 가방의 로고가 약간 삐뚜름하네, ‘다음 역은 신갈, 신갈~’, 스크린이 열린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나도 모르고,



<시론>


#1.
다리가 없는 새의 이야기를 안다. 새는 살아있는 동안은 하늘을 계속 날아야 하는데,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도 허공을 지붕 삼아 바람의 등을 타야 한다. 그런데 새가 딱 한 번 기적처럼 땅에 몸을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 도래하는 그때라는 것. 그러니까 새는 죽음을 통해서만 땅으로 몸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새의 입장에서는 바로 완성의 한 때, 자유인 것이다. 일평생 허공을 밀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그러나 죽음의 한 때, 완성을 맛본다는 새의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서는 벼락과도 같은 이야기였음에 틀림이 없다.
 
#2.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히려 죽은 아버지와 더 많이 가까워졌다.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오셔서는 모자를 써라, 양말을 꼭 신어라, 잠이 오지 않으면 그냥 눈이라도 감고 있어라, 등등 간섭을 하신다. 그러면 나는 그냥 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양말을 신고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쏘다니곤 한다. 물론 이것도 허구다. 그러나 삶이 무척 두려웠었고, 죽음으로 완성을 이루었던 어떤 존재는 오히려 이승에서보다 더 자유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삶의 어떤 습성이 ‘계’를 넘어간 그곳에서도 여전하다는 느낌. 그러니까 육체를 벗어버린 영의 존재들은 오히려 자유롭게 시공을 훨훨 넘나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가끔은 꿈속에서 배가 고프면 잠에서 깨자마자 밥그릇을 싹싹 비우기도 하는 것처럼 혹시 여기가 거기는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사흘 만에 주검에서 부활을 하셨다는 이천 년 전의 사내와도 여전히 내통을 한다.

#3.
소설 속 무무는 게라심의 두 번째 사랑이다. 무무와 게라심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 무무는 강가에 버려졌던 강아지. 게라심은 듣지도 말을 할 줄도 모르지만 힘이 무척 센 농노다. 고단했던 두 존재는 서로의 육체에 기대어서 헛간에서 잠들곤 한다. 먹을 때 먹고 일할 때 일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게라심은 충성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지주에게 복종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게라심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타티아, 그녀는 게라심의 심장을 흔들어놓을 만큼 아름답다. 타티아를 사랑하면서 게라심은 조금씩 소망을 키워간다. 그것은 사랑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게라심의 느닷없는 변심이 무척 못마땅했던 지주는 타티아를 다른 농노에게 시집을 보낸다. 사랑을 지켜내지 못했던 게라심은 조금씩 스스로를 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두 번째의 사랑이 찾아왔다. 무무!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반드시 지켜주고 싶었던 사랑이다. 그러나 농장의 주인은 게라심의 반항을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무무를 죽이라는 명령과 함께 게라심은 고민에 빠진다. 그 길로 게라심은 무무에게 고깃국을 먹이고 배에 태운다. 게라심은 무무의 몸을 꼼짝 못하게 묶어버린다. 밧줄에 몸이 꽁꽁 묶이는 동안에도 무무는 게라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믿는 무무의 행동에서 게라심은 문득, 사랑과 자유의 등식을 생각한다. 그리고 무무를 제 손으로 강물에 던져버린다. 마치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던 저를 버리듯 게라심은 이전의 자기를 버린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신분의 탈출이다. 많은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게라심이 얻은 결론은 스스로가 힘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게라심은 안다. 힘이 없으면 사랑도 자유도 없다는 것을.

#4.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이었을 거다. 그녀는 물처럼 방안에 담겨있어도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었을 것이다. 때에 맞춰 밥을 한 수저 떴을 것이고, 턱 선이 고운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레이스 커튼을 걷어 올려 창으로 햇살을 듬뿍 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며, 오랜 친구랑 한 달 후쯤의 약속을 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늙어버린 엄마에게 치매 약을 챙겨 드시라는 채근도 할 수 있었겠다. 빈 젓가락을 들어 허공에 이름 석 자를 적었을지도 모르는 일. 이미 떠났거나 떠나버릴 얼굴을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의자 두 개짜리 식탁은 답답해, 중얼거리며 김 한 장 위에 밥을 조금 얹다 말고 문득, 먼지처럼 가벼워진 삶이 복사뼈를 타고 정강이까지 올랐을 것이다. 문득, 그녀는 말랑하고 길고 가벼운 무엇을 생각했을 것이다. 잠시만 참으면 간단할 텐데, 혼자 피식 웃기도 하면서 고개를 꺾어 천장을 휘둘러보았을 것이다. 천장과 바닥의 간극이 사라지는, 입 속의 밥을 서둘러 삼켰을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서 청바지에 묶여있던 가죽 벨트를 무사처럼 잡아 뺐을 것이다. 빨간색 간이 의자를 옆구리에 끼고 부엌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사무원처럼 의무적으로 의자를 놓고 가스렌즈 위로 올라가서 작은 발판을 밝고 천장의 가스관을 손으로 확인한 후, 다시 가느다란 목에 부…, 드럽게…, 한 번, 두 번, 벨트를 챙, 감고…, 조금만 참으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눈에 밟히는 미움아, 사랑아, 두려웠던 내일아, 마지막 감각인 발끝으로 의자를 차버렸을 것이다. 파노라마처럼 한 생이 가슴으로 벅차게 지나갔을 것이다. 아마 내가 탄자니아 커피 한 잔을 목젖으로 부드럽게 흘려 넣었을 꽃철, 그녀의 부음을 받았다.  



분산分散과 위계位階 ; ‘절망’을 너머서는 시적 전략
―손현숙의 시세계


백인덕 시인



1.
이론異論 정도가 아니라 비난이 쇄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결과가 불을 보듯 자명할 땐 미리 사과를 하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슨 이론을 오래 논구論究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냥 하나의 징후, 약간 미약한 경향을 읽어내고 싶을 뿐이다. 인간의 생명활동 중 하나인 마음도 몸의 감각들이 전부 차단되면 저 자신의 가상假想과 놀다 지쳐 절망하거나 극적인 환각의 상태로 흩어져버린다. 단순히 몸과 마음의 분리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극을, 즉 도전하는 존재로서 나아가 위기를 획책하는 힘으로서의 외계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정신활동도 이 외계의 자극이 없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재귀적으로 저 자신을 해체하는 것뿐이다. 시인은 그나마 조금 나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자신’이라고 애매하게 뭉뚱그린 것이 사실은 ‘의식과 무의식’, 즉 결코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정신의 두 인자因子의 난장亂場을 의미한다는 것을 거의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혼란의 원인이 아니라 강도에 주목하고, 파국에의 염려보다 진행 상황에 더 주목한다.
현대의 시인은 강력한 ‘페르소나persona’ 이론 덕분에 그가 작품 속에서 설정하거나 깨져 파편인 채로 박아 넣은 성격이 결국은 하나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적확하게 여실히 알고 있다.

찬피 동물이 몸을 덥히는 스물네 시간 물과 불이 다투는 꿈속이다
허기를 채우려고 하고 또 하고,

바람의 뼈마디가 꺾일 때까지 솟구치는 푸른 짐승
뱃바닥으로 땅을 기어 진흙이라도 집어먹고 싶다

흑암에서 터지는 빛,

흙 위에 꽃삽을 꽂듯
이름이 뭐니?

아무리 애를 써도 몸 달아오르지 않는다
이름이 뭐니?

누가 입을 크게 벌리고 머리부터 몸통을 덥석 먹어치운다
이건 다만 환영일 뿐
죽어서도 생각나지 않는 당신이 있긴 있었을까

광화문에 첫눈이 내리고

아무 때나 어디서나 질문할 수 있기를 꿈꾸지 말 것
─「절망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 전문

손현숙 시인은 이번 신작들을 통해 ‘분산하는 자아와 위계에 눌린 자기’의 섬뜩하고 심심한 ‘위악僞惡적 놀이’를 구체적으로 환시幻視한다.
인용 작품은 표면만 따라가 보면 선명하게 빗금 쳐진 두 개의 층위가 하나의 명제로 수렴되는 구조를 갖고 있음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충위는 1연의 1행, ‘꿈속이다’와 6연의 2행, ‘다만 환영일 뿐’이 거느리는 환각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드러나 있듯 ‘꿈속’에서는 ‘물과 불이 다투’고 있다. 마찬가지로 6연의 경우, “누가 입을 크게 벌리고 머리부터 몸통을 덥석 먹어치운다”는 것이다. 물과 불이 싸우고, 뱀이(‘찬피 동물’, ‘뱃바닥으로 땅을 기어’ 등의 표현을 통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이 뱀임을 쉽게 표피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제 종족을 잡아먹는 ‘환각’은 과연 무엇을 겨냥하는가? 가장 강력한 암시는 “흑암에서 터지는 빛”이겠지만, 거기에 닿기 위해서는 좀 에둘러 갈 필요가 있다, 화자는 달아오르지 않는 ‘몸’에 자꾸 “이름이 뭐니?”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층위는 환각의 아래에서 진행된다. 즉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아니 흔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실이 환각을 조성造成하는 것이 아니라, 환각이 사실에 대한 욕망을 조장助長한다. 이때 화자가 욕망하게 된 것은 ‘이름이 뭐니?’에서 강력하게 암시되는 것처럼 ‘이름’, 즉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자기 동일성, 즉 정체성을 확립하고 싶다는, 일정한 방향의 단일성으로 결합하고 싶다는, 아니 그렇게 비춰지고 싶다는( 우리는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리 애를 써도’ 달아오르지 않는 ‘몸’에 대해 이름이 뭐니‘라고 묻는 행위는 응답 이전에 호명을 갈구하는 도착倒錯이기도 하다.) 강한 욕망을 드러낸다.
짧고 좀 복잡해 보이지만, 이 작품은 분명하게 일종의 포섭구조를 갖고 있다. 시공간이 개입한 시적 진술은 아무리 뜯어 봐도 7연과 8연인데, 1연의 ‘꿈속’이 나머지 연들의 욕망이 터져 나올 균열을 만든다면 6연의 ‘환영’은 그 세계를 ‘광화문’이라는 비명碑銘 같은 지명 아래 가둔다. 즉, 무의식이 의식을 조장하고, 조장된 의식은 어떤 현실 인식에 부딪쳐 좌절하는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 끝에는 “아무 때나 어디서나 질문할 수 있기를 꿈꾸지 말 것”이라는 명제가 자리한다. 시적 명제는 결정론적 최종은 아닐지라도 시적 인식의 끝의 가장자리를 포함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절망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질문하지 않기’가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질문’의 함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왜 나만 작은데? 비타민을 챙겨 먹어도 키는 자라지 않았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문창과에 입학을 했는데, 책장을 넘기면 글자가 흘러넘쳤다 여선생은 혼자 질문하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안경 너머로 풍경을 고쳐 읽는다

정신사를 한 학기 내내 돌려 깎는 저, 애송이를 어떻게 이해할까 부분을 확대하는 사진의 원리는 낡은 수법이라지 침 발라 책장을 넘기는 푸른빛의 집중이 싫지 않았다

달걀을 품어 새끼를 까는 꿈이 생생하다 빗자루머리에 사과방울 꽁꽁 돌려 묶다말고 바질나무 이파리 똑, 따 먹는다 솜사탕처럼 부풀리는 재미, 하루 두 번씩 화분에 물을 주면 키가 자랄까, 쪼그라든 애인을 찾아 내 발목을 내가 건다 
─「빗나간 훅,」 부분

주지의 사실이지만, 융에 따르면 우리가 가면(페르소나)을 생각처럼 능숙하게 바꿔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무의식’이 그 착탈着脫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개인무의식은 콤플렉스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 콤플렉스들은 저 유명한 ‘외디푸스 콤플렉스’처럼 무의식을 형성하는 어떤 근본구조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형성 인자因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작은 결점들이 하나 혹은 여러 개가 작동하면서 한 가면의 무의식으로 그때그때 형성되는 것이다.
인용 작품은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훅’은 권투에서 상대를 가격하는 기술 중 하나인데 주먹을 비스듬히 돌려 강하게 던지는 것을 말한다. 잽이나 스트레이트에 비하면 ‘회심의 일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은 이런 훅이 번번이 ‘빗나’가는 상황의 원인에 집착한다. 그것은 2연에서는 “비타민을 챙겨 먹어도 키는 자라지 않았다”라는 왜소함에 대한 콤플렉스로, 3연에서는 “저, 애송이를 어떻게 이해할까”라는 자문自問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불편한 위계의 콤플렉스로 드러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작다’는 상대적인 현상이 언어적 층위를 넘어 사회적 위계로까지 확산한 현재에 대한 불만, 더 나아가 거기에 날리는 ‘훅’마저 번번이 빗나가는 즉 그런 현상에 훅 한 번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불만이 진짜 절망인 것이다.
무릇 콤플렉스란 음지 식물과 같아서 어두운 곳에 숨겨두면 둘수록 다른 콤플렉스들과 연결되면서 끝내는 걷잡을 수 없는 음습한 덤불을 형성하고 만다. 따라서 개인무의식에 알알이 박혀 있는 콤플렉스는 가면이 형성되는 시점마다 표면 위로 끌어 올려 전시할 필요가 있는데, 시인은 누구 못지않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싶다. 4연에서 “달걀을 품어 새끼를 까는 꿈이 생생하다”고 밝히는데 사실 이 ‘꿈’은 자아가 일정한 위계 속에 편입하기 이전에 갖는 자연스러운 착오일 뿐이다. 이 착오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이 어떤 ‘재미’, “하루 두 번씩 화분에 물을 주면 키가 자랄까”라고 상상하는 상황을 빚어낸다. 비록 시인은 “내 발목을 내가 건다”고 자신의 굳건한 현실인식을 강조하듯 드러냄으로써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지만, 「빗나간 훅,」은 완고한 현실에 던지는 상상의 한 방, 유쾌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정신적 건강성을 역으로 반증한다.

2.
일반적인 의미에서 ‘위계’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나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계단의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목적에 가깝게 다가설수록 위계가 높아진다고 이해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 활동에서 말하는 위계는 화살보다는 옆으로 번지면서 흩어지는 바람으로 상향식 계단이 아니라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1898 ~ 1972)의 계단처럼 끝없이 올라가는 것이 결국은 제 위치인 것과 같다. 이 개념상의 미묘한 양상의 차이가 결국 모든 창조적 활동이 가능한 공간, 흔히 말하는 ‘차이, 사이, 틈’을 열어준다.

불끈, 주먹 쥐고 남의 집 유리창을 깨는 나를, 내가 지켜본다

골반이 틀어진 삐딱삐딱이 빗금 치며 걷는다 모르는 입이랑 밥을 먹고 공중부양도 함께 한다 팔짱 끼던 안경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손 흔들어 이별한다
 
“여보세요” 노크하듯 누가 불러 세우면 획, 뒤돌아보는 나는 내가 아니다

신장을 갈아 끼운 친구는 언제부터 아랫입술을 심하게 빤다 정장 슈트에 하이힐 신고 가로수길 걷는 날, 내가 높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저도 나도 알아보지 못한 날은 왠지 뒤숭숭,

이쯤에서 조작이 가능할까 누가 나인 척, 나라고 자꾸 우긴다,
─「타인의 연속」 전문

손현숙 시인은 ‘나’가 아닌 ‘타인’을 고민한다. 물론 이 작품은 ‘주체-타자’의 논리로도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 즉 주체가 너무 확정적인 것으로 가정되기 때문에 마지막 행의 “누가 나인 척, 나라고 자꾸 우긴다.”의 해석이 불가능해지거나 고작해야 ‘허위의식’이라는 차원으로 떨어지고 만다. 따라서 이 작품은 위계의 개념을 적용할 때 더 적확한 해석이 가능하다.
1연에서 “남의 집 유리창을 깨는 나”는 ‘지켜보는 나’에 의해 관찰된다. 다시 말해 ‘유리창을 깨는 나’는 상상속의 나이거나 무의식에 휩싸인 나일 뿐이다. 시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은 ‘불끈’이 ‘쉼표(,)’에 의해서 유리창을 깨는 나와 지켜보는 나 둘 다를 포함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 ‘유리창을 깨는 나’를 삽입 되어 강조된 구절로 읽으면 된다. 어쨌든 3연에는 다시 “휙, 뒤돌아보는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부분이 등장한다. 누군가의 자극(“여보세요”)에 반응하는 ‘나’가 앞에서처럼 이중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 작품의 구성을 보면 1, 3연이 자신의 가면(성격)에 의문을 던지고 있고, 2, 4연은 그런 의문을 내장內藏한 채 말 그대로 지속되는 일상의 내용들이다. 이 두 번의 반복이 결국은 5연에서 하나의 커다란 의문, “이쯤에서 조작이 가능할까”로 귀착한다. 손현숙 시인은 ‘나’가 ‘타인’을 고민한다고 썼지만, 사실은 잘못된 문장이다. 시인은 자꾸 ‘타인’처럼 탈을 바꾸는 ‘나’를 고민한다. 또한 이 착탈의 순간에 어떤 외적 조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사실 정신분석을 문학에 대입하면 이런 고민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도대체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쓰는 것이 정신활동이라면 그 정신 활동을 보증하는 근거로서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미 다 알려졌듯이 본질적인 ‘나’, 원래의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바뀌는 이 자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그 부재를 대신할 뿐이다. 앞에서 애써 든 ‘화살과 계단’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이에 손현숙 시인은 ‘절망’을 이기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간략하나마 필자는 그 전략을 ‘분산과 위계’라는 두 갈래로 나누어 살펴봤다.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감각의 만족’, 또는 ‘지각의 충일充溢’이라는 매혹인데 시인은 이를 다음 작품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향기는 뒷모습으로도 후각을 부르네
불빛이 켜켜로 쌓이는 격자무늬 사이로
그림자가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한다
사람의 시작처럼 커피콩을 고르는 모양이다
혹은 종말을 선언하듯 지문을 문지른다
촉각을 세우면 비상의 은은한 유혹이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쓰는 사이
나는 문을 열고 나무 아래 오후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하리라
제의를 치르듯 사람의 길로 와서
시고 떫고 쓴맛으로 혀끝 적시면
누굴까, 장미를 깨우는
─「손가락으로 눈썹을 쓰는 사이」 부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감각의 향연’을 맛볼 수 있다. 그것도 ‘눈썹을 쓰는 사이’, 그 잠깐에 후각, 시각, 촉각, 미각 등의 생성과 소멸, 심지어 여운까지 다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열린 감각으로 “누굴까, 장미를 깨우는” 존재는 하고 물을 수 있다. 그것도 “어디서 실컷 두들겨 맞고 돌아가는 길”에서 말이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