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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신작시/조성래/석탑에게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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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조성래
석탑에게 외 1편
나, 한 그루 은행나무로 물들어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온몸 황홀하게 물들어
그대 마음 어귀에 놓일 수 있다면
가을저녁 폐사지에서 깊은 적막
홀로 밝혀도 좋으리
그대 언제나
내 그리움 불타는 서녘 하늘 아래
긴 묵상에 잠긴 삼층 누각
천 개의 잎을 달고 만 개의 기도문 흔들고 들어가도
문을 열 수 없는
짙푸른 그림자의 고요
내 기다림은 이제 황매산 영암사지 龜趺 한 마리가 碑身 잃은 등에 무거운 바위산 얹고 오체투지로 진언 외며 남쪽바다 건너는 시간만큼 길게 이어져 있으니
이 늦가을
나, 한 그루 노랑 색종이로 콜라주 되어
그대에게 배달될 수 있다면
쇠기러기 울고 오는 시린 하늘 아래
사흘 밤낮 칼바람 길게 맞아도
섧지 않으리
남새 가꾸는 사람들
1.
이 땅의 어떤 이들은 도시에 나와서도 지극정성으로 남새 가꾼다. 변두리 공터나 집 주변의 자투리땅, 하다못해 옥상에라도 푸성귀 키운다. 해방 전에 시골서 태어나 육이오 사변 겪은 뒤 자식들 달고 도시로 이주한 어버이들이다. 보릿고개 넘기려고 어린 시절 개떡 먹고 송구 먹고 삘기 먹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늘도 부산맹학교 뒤편 공터에 가지 들깨 호박 가꾸는 노친 있다. 그래서 오늘도 석포성당 언덕배기 자투리땅마다 주렁주렁 고추 가꾸는 낡은 집 있다. 그래서 오늘도 장전동 뒤편 산기슭에 상추 부추 가꾸는 투박한 손길 있다.
재래식 삶의 방식 바꾸지 못하는 이들은 바캉스가 뭔지 해외여행이 뭔지 도무지 관심조차 없다. 백화점 입구 계단에 앉아 푸성귀 다듬으며 돈 한 푼에 마음 팔기도 하지만 흙을 가꾸어야 먹고 산다는 것, 일찌감치 몸으로 배운 사람들이다.
2.
“땅을 놀리모 되나. 뭐라도 조금씩 가꾸어야제.”
주례2동 어머니집에 가도 집 주변에 온통 남새를 키우신다. 어머니가 자투리땅에 씨앗 놓아 상추 부추 도라지를 가꾸시는 덕분이다. 아침저녁으로 물 한 바가지만 뿌려줘도 어머니의 작물들은 싱싱하게 자란다.
어머니는 2남2녀 자식들도 푸르게 가꾸셨다. 배추 상추 가꾸듯 싱싱하게 가꾸셨다. 그렇게 가꾸어진 아들딸들은 도시에서 아들딸 낳고 외모 가꾸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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