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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신작시/진란/이별보다 더 먼 곳에 서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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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진란
이별보다 더 먼 곳에 서서 외 1편
간신히 달력 몇 장 뜯어내고 계절을 밀고 들어섰다
당신이 바람을 빌려 조곤조곤 하던 말들이
수수만년 달려온 전설처럼 붉어 매달려 있다
억새의 은빛 갈기가 흔들리는 곳에 시간의 더께 두텁고
당신 눈동자를 골똘히 들여다볼 때의 그 간격이
한사코 밀어내던 경계와 중력으로 팽팽하다
우렁우렁 물자갈 뒤채던 뜨겁던 여름의 한낮
지루한 장마로 얼룩져 곰팡이 냄새나는 시절
생각하다보니 오랫동안 깊이
그리울 일도 있었나 생각하고
그 날, 나는 무슨 말인가 했고
당신도 무슨 말인가 질러댔지만
이만큼 잊고 살다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얼 했었던가
몸은 저 홀로 옭죄어 지하에 갇히고
옛 미움은 오래전 먼 길 따라갔다고
처음 만난 사람처럼 무심한 듯 악수나 나누고
개쑥부쟁이 등 뒤의 그림자처럼
그런 날, 아슴아슴 오금 저렸던 것이다
슬픔도 닳아 수평으로 어룽거리는 늪에 잠기고
함부로 이별의 말을 꺼내고 보냈던 날이었다
어느 새 억겁이라도 지난 듯 바투 잡아
이른 낙엽 흩날리는 살구나무에 기대어 서서
이제 막 이별을 마친 사람처럼 귀를 씻는 날이었다
새벽에 문득 일어나
―어떤 출판회
어떤 복서를 읽다가 기가 막힌 단편이 떠오른다
그 날은 마침 중복이었고
우리들의 추억도 중첩되었다
현스티를 빌려 아홉 명의 복서가 모였다
선수는 정해져 있었지만
정작 링에 오른 건 제비꽃과 부들이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미 승부욕이 무르익은 판은 종이 울리기 전부터
제비꽃과 부들의 눈두덩이 왜 부었나가 화제였다
시간차를 두고 출입하는 불륜의 예시들이 쏟아졌다
구구절절 훈수를 두던 구절초와 제대로 아는 건 없지만
궁상각치우에 운을 맞추고 싶었던 개쑥부쟁이와
화제가 샛길로 샐 때마다 정곡으로 반드시 돌아오던
개미취가 박수를 치며 눈물 나게 웃어대고
무궁화와 수국은 선수들이 금을 벗어났는지
금을 밟았는지 윤리의 자를 촘촘하게 들이댔다
아무의 일이라도 좋았을 금단의 영역을 치고 들어가
부들과 제비꽃의 연애가 정설이 될 무렵
세속에 내려오지 못한 붉은 동백도 한 수위를 넘나들 무렵
담배꽃인지 강아지풀인지 모를 교정위원이
담 모퉁이로 부들과 제비꽃을 불러내어 도너츠를 만드는 동안
꽃밭에는 슬금슬금 거미줄이 엉기고
폭염을 핑계로 뒤풀이도 마다하고 헤어졌다는데
아무가 이긴 것인지 진짜 복서는 누구였는지
그 아무나는 알고 있을까 싶으니 한밤에 웃음이 나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릎을 꿇을 때까지 싸워야 했지만
이미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는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내려와야 하는 링의 복서는 한 숨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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