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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신작시/오성인/바닥에 대하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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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오성인
바닥에 대하여
할당된 몫을 비우고도 여전히 밥그릇
핥는 데 여념이 없는 개, 바닥 깊숙이
스민 밥맛 하나라도 놓칠세라
잔뜩 낮춘 몸
지금 그의 중심은 오롯이 바닥이다
온몸의 감각을 한군데로 끌어모으는
나차웁고 견고한
힘
모든 존재들은 낮은 데서 발원한다
생이 맨 처음 눈뜨고
마지막 숨들이 눕는
계절이 첫발을 내디뎠다가
서서히 발을 거두어들이는
최초이며 최후인 최선이거나 최악인
더는 낮아질 일도 붕괴될 일도 없는
낮은 벽, 혹은
천장
낮춘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겪어내는 일, 혼신을 다해
희노애락애오욕을 지탱해내는 일
그러므로, 나는
낮을 것이다
개의 혀가 밥그릇 너머의 피땀까지
닦아내듯, 이생과 그 너머의 생까지
두루 읽어낼 일이다
기꺼이,
바닥을 무릅쓸 일이다
간이역전 공중전화
역에 들어오는 완행열차의
횟수가 줄어들고
열차는 아예 바람을
매단 채 달린다
그러다가 일부 바람은
도중에 낙오해 죽는다
바람이 죽는 일과
풍경들이 지워지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백, 바람의
시체
역전 공중전화의 황폐가
가속화된다
한 여정을 마칠 때마다
너는 전화기 안에 풀과
나무들을 심었고
나는 그들에게 물을 주었지
아껴두었던 햇볕도 한 줌
흩뿌려주었고
그러면서
서로를 한참 마주 보곤 했지
그러나 걸음을 멈추는 일이
차츰 뜸해졌고 발이 퇴화한
우리는 더 이상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풍경이 지워지고
바람이 죽을수록
풀과 나무가 메말라 죽은
공중전화에서는 그 어떤
목소리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사라진 것들은 매정한
저 속도 안에
있다
오성인_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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