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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특집/내 시의 처음/한인준/‘시’라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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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01회 작성일 18-04-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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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내 시의 처음



한인준


‘시’라는 것으로


1.
공터에서 빈 바구니를 든다. 하늘에서 나뭇잎 같은 것이 떨어진다. 사과 같은 것이 떨어진다. 새똥 같은 것이 떨어진다. 나는 공터를 돌아다니며 떨어지는 것들을 최대한 받아내지 않으려고 한다.
마침내 바구니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그 자체가 담겼을 수도 있지만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하나도 못 담았네. 사람들이 나의 빈 바구니를 본다.
빈 바구니 주변에 떨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2.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고 느껴진다. 서로 내뱉지 못한 말들이 그 빈 공간에 머물러 있다고 느껴진다. 그런 우글거리는 침묵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서로 내뱉지 못한 말이 많아질수록 침묵은 몸집을 불리고

여백이 온다. 그런 여백을 퇴고한다.
문장들을 양옆에 담벼락처럼 세워두기도 한다. 담벼락 사이에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 속에 둔다.
때로는 하고 싶은 말 대신에 이상한 말이 나온다. 반대로 말해버리고 만다. 잘못 말해버린다. 내가 한 말에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 여백은

뒤틀린다.

사라지지도 못하는 말들을 여백이라는 공간에 흘려둔다. 적어두어 박제된 말보다 발화되지 못한 채 떠도는 말에 눈길이 간다.

3.
나는 부정확한 것이 두려웠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으나 정확하게 표현할 때마다 나를 실패했다.

정확하려고 해서 실패한다.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로 무뎌지고 잊어버리는 그 어떤 것을 생각한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는 존재라면 그저 ‘부정확’ 자체만을 정확하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4.
이해나 인과가 필요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느껴지는 아프거나 괴롭고 무겁거나 혼란스러운 어떤 ‘한꺼번에’를 느낄 수 있다.
그런 ‘한꺼번에’가 나에게는 감정보다 상황에 가 닿아 있다.

과연, 정말, 그런데, 여전히, 아직, 기어코, 마침내, 등의 의미들도 나에게는 감정보다 상황에 가 닿아 있다.

감정의 정확함보다는 상황의 정확함이 보인다. 상황이 감정을 만들고
상황을 위해서

어디로든 가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고도 가야 한다.
잘못과 못함과 아님의 것들에게 가야 한다. 어쩌면 다른 차원이 나타날 때까지
그러나 생활을 잃지 않아야 한다. 쉬워야 한다. 부드러워야 한다. 또 다시 마음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핑계가 되지 않아야 한다.

5.
“중요한 건 아니야.” 라고 자주 말한다. 중요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주 말한다.
“그 지점에서.” 라고 자주 말한다. 그 지점을 모르기 때문에 자주 말한다.
“근데.” 라고 자주 말한다. 어긋나지만 표현하고 싶어서 자주 말한다.

5-1.
가끔은 ‘무엇’을 생각하다가 ‘어떻게’를 잊고 만다.
‘어떻게’를 생각하다가 ‘무엇’을 잊기도 한다.
‘무엇’과 ‘어떻게’를 잊어버려도 ‘왜’가 있었다.

6.
선생들은 나에게 나무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나무는 산사나무와 오리나무로 써야 한다고 배웠다. 생선은 고등어 한 손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반드시 특정한 명명이 있어야 뚜렷한 의미와 뚜렷한 공감이 탄생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와 내가 눈 앞에 있는 나무의 이름을 동시에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모르겠다는 생각과 모르겠다는 생각이 부딪쳐 서로 알게 되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말하지 않던 숨겨진 공감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공감하지 않음과 공감하지 않음으로 탄생할 수도 있을 이상할 
공감을 믿는다.

우리는 계속 같은 차원에서만 공감이라는 것을 나눠가졌다. 비슷한 지점에서 느꼈다. 사고한다. 슬프다. 해소된다. 안다. 잊는다. 모른다. 다시 느낀다. 사고한다. 슬프다. 해소된다. 안다. 잊는다. 모른다. 다시

느낄까.

7.
모호한 것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모호한 것을 말하기 위해 최대한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말해야 한다.

모호한 것은 얼만큼 정확하게 모호할 수 있는지 모호한 것이 정확해진다고 모호한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자꾸 정확하게 실패하고 마는 그럼에도 자꾸 정확해지려고 하는 우리를 말하고 싶다.

8.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상황이 있다. 그것을 적는다. 마음을 온전히 다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그것을 적는다.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온전히 다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한다. 시도를 한다. 서로 알아가려고 한다.

9.
무엇보다 핑계가 되지 않아야 한다.

‘시’라는 것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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