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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소시집/이병초/탈옥수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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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이병초
탈옥수 외 4편
논밭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이틀째 걷습니다
사람 손을 탄 작물들은
한층 더 푸르게 곱고
풀섶에 숨어 있다가 풀쩍
수갑처럼 빛내며 튀어 오르는 참개구리처럼
산들바람이 마중 나오기도 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데서
갈림길과 마주쳐 뒤돌아보면
그제야 자잘한 풀꽃들이
길의 상처처럼 쓰라리고,
어떤 자리에도 섞이지 못해
티눈 박힌 새끼발가락을
송곳으로 후벼파듯 내 운명을
반납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땀방울 들어간 눈알처럼 쓰라렸습니다
어쩌면 집착이었고 어쩌면
입에 칼을 문 절망이었고 어쩌면
강아지풀이었을 되똥되똥 지나온 길은
아무리 잘 봐줘도
눈썹에 서리는 이슬기만 못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새똥처럼 버려진 그늘 깔고
오이를 베어 먹으며
너는 몸통 잡아먹을 싹수라고
밑천 거덜낼 칫수라고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던 소금기 밴 어저께들이
허리춤 추듯 산들바람을 탑니다
탈옥수는 모자를 눌러쓰고
산모퉁이로 기어기어간 옛길을 바라봅니다
불
밤참 먹고 흙 뿌려 껐어도 야울야울 살아나는 불 풀잎에 잘린 이슬방울 뒤를 조이듯 사각거리는 밤의 기척이며 냇물 바닥을 긁는 달빛까지 쪼개 던졌는지 타다 만 장작 똥가리에 화르르 감기는 불 땅맛 비친 집주소를 못 찾고 평생 떠돌았으리 평생 떠돌았어도 갈 곳이 없어 네 몸속을 뛰쳐나갈 수 없어 지글지글 애간장이 타는 것이리 쯧쯧쯧 혀 차는 밤의 심장에 박혀 이글거리는 불
타는 속 꺼내놨다가 이글이글 되집어삼키는 밤의 눈동자다 숨이 컥 막히는 외로움이다 소리란 소리 죄 깔아눕히고 죄 그러모으는 밤의 귓구멍이다
모닝커피
화분에 엎어놓은 계란껍데기들처럼 방안은 조용했다
앞집 처마에 가려 햇살이 못 미쳐도
유리잔에 떨어지는 커피물소리
입술에 끼우고 굴리는 게 나는 좋았다
다리 꼬고 커피를 마시며
잔에 간직된 온기를 귓불에 대보기도 하며
자주색 생감자 먹고 목쉬었던 토막을 어루만지며
집주소 적힌 편지봉투처럼
납작해지는 것도 나는 좋았다
이래도 마음속에서 덜 빠져나간 게 있는지
내 체온으로 뎁혀진 이불이 푹 꺼졌다
가슴에 비수를 품을 수 없다면
독을 품어야 한다는 누구의 말
머리카락처럼 빠져나가는 날들
똘똘 뭉쳐 검처럼 뽑아들어도
찌를 곳이 없다는 누구의 말이 떠올랐는지
식빵봉투에 찍힌 날짜도 커피에 눈썹이 젖곤 했다
네 목소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말끝을 놓치고 번번이 되묻는 게 멋쩍어
웬만하면 알아들은 척한다
어려서 중이염을 앓아서 그렇다고 한다 얼떨결에 데모대에 파묻혔다가 닭장차 캄캄한 데 끌려들어가 지근지근 밟힐 때 터졌던 고막이 다시 의붓아비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어폰 꽂고 FM방송을 자주 들으면 소리가 차츰 들릴 거란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직직거리는 소리를 아예 뽑아버릴 수는 없는지 안 늙는 허기를 잡아당겨보고 문질러봐도 소리는 점점 멀어지지만
수십 년 네 목소리는 가깝다
둥지
화장실 이중창 속에
참새가 둥지를 틀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삶이라지만
볕이 덜 들어도
비바람 안 타는 곳이라 여겨
나뭇가지와 진흙을 물어왔으리
저들도 집에 돌아오면
양말과 속옷을 빨아서 널듯
핏기 잃은 잠자리를 쓸어도 보며
별빛 들이듯 하루를 누이리
비바람 안 타는 집을 찾아
비바람 타는 몸뚱이 데리고 떠돌던
둬 달이 오가는 사이
훔쳐보는 비좁은 둥지 속
알록달록한 알들이 눈에 아프다
<시작메모>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니 풀벌레소리가 맑다. 방충망에 들어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밤이 깊을수록 풀벌레소리는 방충망에 그어진 거미줄에 걸려 반짝일 것이다. 그친 비가 아쉬운지 나는 담배가 쏠린다. 빗발이 거세질수록 맑아지던 가시내 목소리가 그리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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